몇 가지 약점을 고백하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애석하게도 나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전설적’ 전작 <해피 아워>(2015)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래서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아사코>를 두고 <해피 아워>와 비교하며 온통 실망과 불만을 쏟아냈던 비평들에 어찌됐든 동의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번역본이 없는) <아사코>의 원작인 시바사키 도모카의 동명 소설을 읽지 못했다. 인터뷰 기사들을 통해 영화가 소설과 몇몇 지점- 예를 들어 동일본대지진 에피소드- 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정확하게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논할 수 없다. 달리 말해 나에게 <아사코>는 어떠한 참조점도 없이 도착한 온전한 영화이다.
감독의 이름마저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이 영화를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가 아닐까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의 최근작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극장판>(2017)에 ‘침략자’로 등장한 배우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첫 장면에서 아사코(가라타 에리카)의 등 뒤로 불쑥 나오는 순간,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의 제목처럼) 등줄기가 ‘섬뜩’(creepy)해졌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아사코>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최근영화)의 정반대에 놓인 영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친 일반화를 용서한다면, 구로사와의 최근작들은 익숙한 ‘낯선 것’이 등장해 무너뜨린 공포스러운 세계를 ‘사랑’으로 버텨내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면, <아사코>는 익숙한 것이 사라지고 낯선 것이 등장하면서 사랑이 어떻게 공포로 변해가는지를 보여준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남자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사라진 자리에 (똑같은 얼굴을 한)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가 등장한다. 료헤이는 바쿠인가? 그렇지 않다. 프로이트는 ‘포르트-다 게임’을 통해 아이가 자신의 ‘실패’(絲牌)를 던졌다가 다시 당기는 놀이를 설명하며 엄마(실패)의 ‘부재’를 자신의 통제하에 다시 나타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성장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던졌던 실패가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점이다. 아사코가 던진 실패(빵을 사러 간 바쿠)는 애타게 그를 부르는 아사코에게 돌아온다. 하지만 두 번째 던진 실패(신발을 사러 간 바쿠)는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 대신 뜻하지 않게 ‘새로운 실패’, 료헤이가 찾아온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아사코 앞에 놓인 두개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먼저 <아사코>에서 가장 이상한 숏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아사코와의 몇번에 걸친 우연한 만남이 지나가고, 료헤이는 포트를 찾으러 온 그녀를 비상계단으로 불러낸다. 그리고 자신은 무섭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며 아사코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그녀의 뺨에 손을 갖다댄다. 이때 고개 숙인 아사코의 옆모습을 보여주던 숏이 갑자기 컷되고, 동일한 앵글로 좀더 타이트하게 다가간 아사코의 모습이 다시 한번 ‘점프컷’으로 보여진다. 이 숏은 (점프컷이라고 보아도) 이상하다. 게다가 이 두개의 숏에 등장하는 료헤이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세하게 위치가 달라져 있는데, 이는 결국 첫 번째 숏을 찍은 다음 같은 위치의 카메라로 줌인해서 (의도적으로) 다시 촬영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점프컷은 컷간의 ‘시간’을 접는 역할을 하지만 이 장면에서의 점프컷은 (시간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접어내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사코는 마치 무언가로부터 ‘각성’했다는 듯 두 번째 숏에서 고개를 들고 료헤이를 바라본다. 뒤이어 키스를 하는 아사코와 료헤이의 모습은 영화의 처음, 아사코가 바쿠를 만났을 때 고개를 숙이고 팸플릿을 읽으며 걷던 그녀가 아이들의 폭죽 소리에 놀라 깨어나듯 바쿠를 발견하고 키스를 나누던 장면과 정확하게 공명한다.
바쿠와의 만남을 각성한 것이 시끄러운 폭죽 소리였다면, 료헤이와의 만남을 각성한 것은 영화를 덜컹 흔드는 점프컷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키스를 하고 친구 오카자키-하루요와 더블데이트를 한 다음 바쿠가 사라졌다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사코와 료헤이가 키스를 하고 (동일하게) 친구 구시하시-마야 커플과 암벽등반장에서 더블데이트를 한 다음 사라지는 건 료헤이가 아니라 아사코다. 1인2역으로 겹치는 바쿠-료헤이의 교차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화를 아사코를 따라 읽게 되지만, 이 두번째 각성이 일어나는 순간 영화는 아사코의 ‘게임’에서 료헤이의 ‘게임’으로 옮겨간다.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아사코(실패) 앞에서 어른스러웠던 료헤이는 안절부절못한다. 울고 싶은 료헤이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해주는 듯 그는 지진 후 길가에 앉아 울고 있던 낯선 여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처럼 <아사코>에는 실패한 포르트-다 게임과 그 이후 인물들이 겪을지 모를 ‘퇴행’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내내 도사리고 있다. 이를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설정은 바쿠의 친구 오카자키다. (아버지 없이) 엄마와 단둘이 자라 마마보이라고 놀림받던 오카자키는 ‘퇴행성’ 질환인 루게릭병에 걸려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엄마와의 성공적인 분리에 실패한 그는 엄마와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유아 상태로 퇴행하고 만 것이다. 바쿠와 도망치다 돌아선 아사코가 뜬금없이, 정말 뜬금없이 오카자키를 찾아가는 이유도,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모습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고 다시 절박한 심정으로 료헤이에게 돌아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쿠와 도망치던 아사코는 이제까지 길고 행복한 꿈을 꾸었고,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눈을 떠보니 전혀 변한 게 없다고 말한다.)
빵을 사러 갔다가 하룻밤 만에 돌아온 바쿠처럼 아사코는 불안해하던 료헤이에게 돌아온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돌아온 아사코는 신발을 사러 간 바쿠처럼 오래지 않아 다시 사라질 것이다. 바쿠를 잃어버려 불안해하던 아사코도 새로운 실패, 료헤이를 찾아내지만, 여기에서 얻은 건 언제 깨어질지 모를 ‘거짓’ 안도에 불과하다. 마치 바쿠가 갑작스럽게 다시 찾아오는 순간 산산조각 나버린 접시처럼 말이다.
아사코와 처음 만나는 순간, 바쿠는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며 ‘보리’(麥)라는 뜻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바쿠’라는 이름은 ‘맥’(獏)이라는 한자로도 읽히는데, 이는 ‘꿈을 먹는 요괴’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악몽을 꾼 뒤 바쿠를 부르면 이 요괴가 그 꿈을 가져간다는 전설이 있다. 바쿠(麥)를 잃어버린 아사코도 계속해서 바쿠(獏)를 부르며 끔찍한 악몽이 끝나길 바란다(반면 아사코를 처음 마주친 료헤이는 그녀가 자신을 ‘바쿠’라고 부르자 (보리도 요괴도 아닌) 남미에 사는 동물 ‘바쿠’(테이퍼)를 떠올린다). 아사코는 사라진 바쿠(麥) 대신 새로운 바쿠(테이퍼)를 찾았지만 그는 바쿠(麥)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버리고 떠나갔다 돌아온 ‘아사코II’는 처음 료헤이가 사랑에 빠졌던 ‘아사코I’이 아니다(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아사코 I&II>이다). 영화의 마지막, 이렇게 변해버린 아사코와 료헤이는 마치 엇갈린 지층처럼 다시 만난다. 매끄럽게 붙여놓았지만 한번 깨진 접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제 그들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실패를 더이상 던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잃어버릴까 두려운, 어긋난 ‘실패’를 끌어안고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일본어 원제처럼 ‘꿈속에서도, 그리고 깨어나서도’(寝ても覚めても) 끝나지 않을 이 불안한 세계를 나는 차라리 ‘연옥’이라고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