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의 37번째 장편영화이자 본인이 직접 배우와 감독을 맡은 23번째 영화 <라스트 미션>이 개봉(3월 14일)했다. 마치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은 제목이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2008년 <그랜 토리노>가 시대를 마감하는 고별사처럼 보인 것에 반해 멕시코 카르텔의 마약 운반책이 된 87살 노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라스트 미션>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세계가 아직 끝날 수 없음을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영화가 된 사나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2008년과 2018년의 이스트우드를 비교하며 노쇠한 몸에 새겨진 ‘영화라는 기억’을 더듬어본다.
구부정한 어깨의 각도가 이미 가파르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바로 이 초라하게 쭈그러든 노인의 뒷모습이다. 한껏 당긴 활시위처럼 굽은 뒷모습에서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윽고 노인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메우면 놀랄 수밖에 없다. 거기엔 극중 누군가가 아니라 늙어버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우두커니 서 있기 때문이다. 90살의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37번째 장편영화는 그렇게 시작부터 관객을 휘어잡고 들어간다. 짐작보다 훨씬 나이 들고 노쇠해 보이는 이스트우드의 육체가 느리고 힘겹게 발을 뗄 때마다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떠오르는 한 가지 질문. 과연 이 영화에서 극중 주인공과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분리해낼 수 있을까. 혹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분리해낼 필요가 있을까. <라스트 미션>은 이스트우드의 노쇠한 육체를 카메라에 등장시키는 순간부터 그것이 불가능함을 선언하고 들어간다.
그는 이미 늙어 있다
2005년 일리노이주의 한 농원, 한 노인이 멕시코 인부들에게 농담을 건네며 꽃을 트럭에 싣고 있다. 얼(클린트 이스트우드)이라고 불리는 늙은 백인 남성은 정성껏 키운 백합을 들고 전국 백합 컬렉션으로 향한다. 짧은 복도를 지나가는 와중에 그를 몰라보는 사람은 없다. 여기저기서 그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면 마치 록스타 같다. 구석에 마련된 부스 앞, 인터넷으로 꽃을 배달해준다는 전단을 보고 “그딴 게 왜 필요해?”라며 투덜대는 얼의 주름진 미간에는 약간의 짜증과 왠지 모를 불안이 적당히 뒤섞여 있다. 하지만 그마저 깔끔한 차림새와 세련된 동작 위에 양념처럼 더해져 노년의 멋을 한껏 끌어올린다. 콘테스트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얼은 간단한 농담으로 수상 소감을 마무리하고 호텔바에서 축하의 잔을 돌린다.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선 얼의 가족이 얼을 기다리고 있다. 딸은 아빠가 설마 자신의 결혼식마저 오지 않으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지만 엄마는 딸을 보듬으며 냉정하게 선고한다. “오지 않을 거야. 네 아빠가 이제까지 한번이라도 온 적이 있니?” 부드러운 목소리 사이의 떨림은 딸을 향한 안쓰러움인지, 남편을 향한 원망인지, 아니면 분노를 삭이는 소리인지 알 길이 없다. 얼의 손녀만이 의자에 앉아 별다른 동요 없이 모든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잠시 뒤 영화는 12년의 시간을 단번에 건너뛰어 2017년의 얼에게로 향한다. 생기 넘치던 농장은 폐허처럼 낡아버렸고 얼은 인부들에게 마지막 삯을 지불하고 이별을 고한다. 낡아빠진 트럭을 타고 얼이 향한 곳은 결혼을 앞둔 손녀를 축하하는 조촐한 파티장이다. 손녀는 얼을 반갑게 맞이하지만 아내와 딸은 갈 데가 없어져서 온 거 아니냐며 문전박대한다. 손녀의 결혼 피로연에 무료 음료를 제공하기로 한 약속조차 지키기 어렵게 됐다고 하자 아내는 피로에 지친 표정으로 싸늘한 비수를 날린다. 당신은 언제나 그랬다고.
얼핏 건조하고 단조롭기까지 한 오프닝 시퀀스는 늙은 원예사 얼이 이제껏 살아온 태도와 지금 처한 상황, 앞으로의 목표를 차례로 정리한다. 얼은 자신을, 자신의 일을 사랑해온 남자다. 타인에서 인정받고 싶어 바깥으로 맴돌다 가족을 돌보지 못한 남자의 곁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던 농원은 시대에 떠밀려 황폐해졌고 록스타처럼 화려했던 주변의 관심도 꺼진 지 오래다. 늦게나마 가족에게 돌아가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싶은 얼에겐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물건만 운반해주면 돈을 준다는 낯선 이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다. 얼이 처한 상황은 지극히 이스트우드적인 인물들의 연장 아래 놓여 있다.
<라스트 미션>의 오프닝 시퀀스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작을 관통하는 특징 중 가장 앞줄에 놓일 요소 하나를 꼽자면 바로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수상 소감에 구태여 말을 길게 보태지 않는 얼처럼 이스트우드 영화의 모든 숏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할 바를 다한다. 다시 말해 고전 할리우드의 서사 호흡에 충실하다. 이미 정제된 이 리듬에 자잘한 기교 따윈 불필요한데 거기에 이스트우드는 특유의 감성과 유머도 조금씩 보탠다. 이스트우드 영화의 상당 부분은 영화 바깥에서 이스트우드가 축적해온 영화적 기록과 기억에 빚지고 있다. 같은 상황, 같은 장면을 이스트우드가 시도했을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스트우드의 역사, 그러니까 <스페이스 카우보이>(2000)와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그랜 토리노>의 연장선에 놓인다.
처음에 불안했던 마음, 캐릭터 얼이 아니라 배우 이스트우드만이 보이면 어쩌나 싶었던 걱정은 이쯤 오면 어느새 흩어졌을 것이다. 얼이라는 인물이 제대로 구축될수록 이스트우드의 늙어버린 육체는 영화 속으로 깊이 스며든다. 전통적인 할리우드 고전주의 서사와 장르적 표현법, 개인의 스타일과 미국의 신화를 이음매 없이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성취해온 영화적 마술이라 할 만하다. 이건 단지 위대한 배우, 빼어난 연출이라는 한쪽 측면을 넘어선 영역에 있다. 이스트우드가 출연해온 영화들이 서로 내밀하게 대화하며 축적해온 역사와 그와 함께 늙어온 관객의 기억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적을 간결한 동작으로 처치하던 <페일 라이더>(1985)의 목사는 이스트우드의 육체에 스며들었다. <사선에서>(1993)의 비밀요원 호리건과 이스트우드를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며 <그랜 토리노>의 노인 코왈스키는 노쇠한 육체로 자신의 안녕을 고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축적은 다음 작품에서 이스트우드의 육체를 빌려 거꾸로 영화 속으로 스며든다.
<라스트 미션>의 오프닝에선 12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얼이 짧은 간격으로 등장하지만 2005년의 얼 역시 이미 늙어 있다. 2017년의 얼은, 그러니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거기서 한층 더 늙은 상태를 ‘연기’한다. 그는 좀더 굽은 어깨와 무거워진 걸음으로 우리를 설득하려 하지만 사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다. 스스로 영화의 육체가 된 이 배우의 몸짓 하나 주름 하나가 이미 그 어떤 특수효과보다 효과적이다. 요컨대 우리는 오프닝부터 이스트우드의 늙음이라는 사건에 정면으로 충돌한다. 뒤이어 짧은 서사를 통해 얼이라는 캐릭터의 틀이 굳어지면,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이 쌓아온 육체의 기억들을 부어서 분리 가능한 상태로 나아간다. 이스트우드의 육체는 언제나 그렇게 영화와 함께 늙어갔다. 반대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그의 육체와 함께 나이 들어왔다. 영화적 시간과 자연인으로서의 시간이 분리되지 않는 지점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건 오로지 세월을 정면으로 마주 선 그 육체다. 그의 굽은 어깨의 각도가 가팔라질 때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잔뜩 찡그린 미간의 주름이 깊어질 때마다 우리는 거기서 분리되지 않는 시간의 두께를 감지해낸다.
<그랜 토리노> 다시 쓰기, 가족의 회복 뒤에 감춰진 것들
<라스트 미션>은 이미 진즉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했던 서부 사나이의 긴 첨언 같은 영화다. 우리는 이미 <그랜 토리노> 때 이 서부 사나이의 고별사를 목격했다. 이스트우드 영화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는 <그랜 토리노>에서 그는 인종 갈등에서 시작해 종교적 질문을 경유한 뒤 스스로 마침표를 찍듯 속죄의 자리에 올라선다. 이후로도 영화작업을 이어왔지만 이스트우드적인 캐릭터의 행보는 여기서 사실상 끝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다시 돌아와 자신의 걸음을 한 차례 복기한 후 슬쩍 방향을 비튼다. 본래 전작들의 연장에서 영화와 함께 늙어왔음을 감안해도 <라스트 미션>은 <그랜 토리노>에서 이어지는 영화가 아닐까 싶을 만큼 겹치는 부분이 유난히 많다. 얼은 <그랜 토리노>의 코왈스키와 마찬가지로 참전군인이고 가족들과 서먹하다. 물론 달라진 것도 있다. 얼은 코왈스키보다 훨씬 친화력이 좋고 주변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무엇보다 아직 아내가 살아 있다.
이스트우드가 굳이 이미 지나온 길, 마감된 길로 되돌아가 다시 걷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 2008년의 이스트우드와 2018년의 이스트우드는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라스트 미션>으로 향하는 첫 번째 열쇠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영화의 원제인 ‘The Mule’의 뜻처럼 이 영화는 노년에 멕시코 마약 카르텔 운반책이 된 87살의 레오 샤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실제 레오 샤프는 원예가이자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으며 10년간 코카인을 나르는 ‘노새’ 역할을 했다. 이스트우드를 자극한 건 참전용사 출신의 늙은 마약운반꾼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지만 여느 영화와 달리 <라스트 미션>에선 제일 마지막에 “실화에서 영감을 얻음”이라고 짧게 언급하고 지나간다. 이 자막의 위치는 의미심장하다. 실화의 사실성에 기대려는 여타 영화와 달리 <라스트 미션>은 어디까지나 이스트우드의 세계 아래에 속해 있다. <라스트 미션>의 이야기에 무엇이 보태졌는지를 살펴보면 이 영화의 의도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마침 이스트우드적인 캐릭터와 여러모로 겹치는 캐릭터가 있으니 빌려볼까 하는 정도의 활용.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건 실은 전혀 중요치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각색을 시도한다. 가족과 가까워지기 위한 마약운반의 동기 등은 모두 허구다.
오프닝에서 간단명료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분명한 목적을 제시한 영화는 이스트우드에게 지속적, 반복적으로 임무를 부여한다. 마약을 실어 나를 때마다 목돈이 생기고 얼은 그걸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수행한다. 첫 번째 임무에서 얻은 돈으로 얼은 손녀의 결혼식에 무제한으로 술을 제공한다. 아내는 “왜 내가 과거를 다 잊고 당신과의 추억에 젖을 거라 생각해?”라며 일침을 놓지만 한 걸음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한번만 하겠다고 생각했던 마약운반은 필요한 것이 생길 때마다 연장된다. 자신의 농장에 압류 딱지가 붙자 고민 없이 바로 다음 거래가 이어지고, 오랜 단골이었던 참전용사의 가게가 문을 닫자 또 한번 운반 임무를 떠맡는다. 여기에 고민과 갈등의 시간 같은 건 굳이 보여주지 않는다. 필요와 행동. 얼은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다. 불법적인 범죄가 지속되지만 영화는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족을 위한 일이고, 영세한 사업을 살리기 위한 일이며, 사회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가치들을 수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렇게 강력한 알리바이를 제공하며 얼의 행동을 지지하도록 이끈다. 동시에 그건 서부 사나이가 살았던 방식이기도 하다. 얼의 행동, 이스트우드의 원칙은 철저히 자유주의의 근본가치를 수호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 기꺼이 악행을 떠맡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 <용서받지 못한 자>(1992)에서 스스로의 신화를 해체하고 파산시켰던 이스트우드의 모순된 위치 설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바깥에서 인기를 끌었던 얼은 주변 사람과 같은 눈높이에서 친근하게 동화되는 법을 아는, 이른바 정이 가는 남자다. 처음엔 그를 무시하고 거리를 두던 멕시코 갱단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친구(혹은 유사가족)가 되어 있다. 그것이 얼이 탁월한 마약운반책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자 범죄로부터 알리바이를 획득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선보인 유사가족에 대한 포용은 이번에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시스템 바깥에서 시스템이 지켜주지 않는 이들도 함께 끌어안는 소규모 커뮤니티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은 멕시코 마약 카르텔조차 함께할 수 있는 집단으로 끌어안는다. 물론 여기엔 한 가지 트릭이 있다. 범죄자를 진정한 악인과 이해 가능한 인간으로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그어놓은 상식과 가치 위에서 수호해야 할 것들을 구분해낸다. 처음엔 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감시역 훌리오(이그나시오 서린치오)도 얼의 픽업트럭에서 들려오는 컨트리음악을 함께 듣다 어느새 동료, 아니 유사가족의 위치에 다다른다. 이들은 가족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지점에서 얼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마약 카르텔의 보스 안톤(앤디 가르시아)이 베풀어준 연회에서 한껏 쾌락을 즐기고 난 뒤 얼은 훌리오에게 “이 일을 그만둬. 여기 사람들은 아무도 너에게 신경 쓰지 않아”라고 충고한다. 가족이 필요한 자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것, 그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정의이자 상식인 셈이다.
그럼에도 <라스트 미션>을 인생의 마지막에 접어든 노인이 지난날을 반성하고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단순한, 그리고 따뜻한 이야기로만 보는 건 순진한 발상이다. 이스트우드가 <그랜 토리노>에서 죽었던 아내를 다시 살려내고, 굳이 같은 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도달하고자 한 곳은 어디인가. 이스트우드는 반성하지 않는다. 기꺼이 죄를 떠안고 사라질 뿐이다. <그랜 토리노>와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도 그랬다. 여기엔 보수적인 남성이 지난날의 과오를 깨닫고 각성하는 달콤한 이야기는 없다. 다만 타자를 함부로 동정하는 대신 지나쳐온 것들에 예의를 갖추고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있을 뿐이다. 규칙을 어긴 죄를 기꺼이 떠안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길을 택했던 이스트우드는 <라스트 미션>에서 별안간 고백과 속죄를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잃어버린 가치, 즉 가족을 회복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전작들에서 이스트우드는 이미 가족을 떠나보낸 상태에서 출발하지만 이번에는 굳이 바로잡을 기회를 준 상태에서 이야기의 문을 연다. 그리고 기어이 아내에게 “미안해”, 그 한마디를 남기고야 만다.
하지만 이러한 속죄와 회개의 절차가 회복시키는 건 가족만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얼이, 이스트우드가 비호해온 가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가족 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 말하자면 ‘아메리칸 퍼스트’로 요약되는 트럼프 시대의 가치들이 함께 회복된다. 거꾸로 보면 그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구태여 아내를 되살려 끝내 사과하고 “함께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야 마는 게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얼의 후회와 반성을 매개로 이 모든 보수적인 가치들은 인간 중심의 따뜻한 시선으로 정당화되는 길을 확보한다. 얼은 길가의 흑인들을 도와주고서 “검둥이(니그로)들을 도와줘서 기분이 좋다”라고 말하는 남자다. 그의 사고 체계는 여전히 거기에 머물러 있다. 아니 타자를 종종 대상이 아닌 주체로 등장시켰던 <그랜 토리노>보다 후퇴했다. 영화는 흑인들의 입을 빌려 ‘블랙’이라고 불러야 한다며 친절하게 정정해주지만 이쯤 되면 자기 비판적인 성찰조차 ‘합리적’ , ‘인간적’이라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려는 변명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법정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얼의 모습은 얼핏 <그랜 토리노>의 속죄 방식, 이스트우드가 평생 취해온 방식을 따른다. 문제는 사람은 바뀌지 않았지만 상황이 변했다는 것이다. 얼은 아내에게 용서받았고 가족을 되찾았으며 교도소 한편에서 안전하게 자신만의 화단을 가꿀 자유도 얻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용서를 받아버렸다. 위장된 평화와 상처의 회복 사이, 이스트우드의 모순된 행보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라스트 미션>은 없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본래의 이스트우드인지도 모르겠다. <그랜 토리노>에서 이스트우드의 태도를 “선한 본성의 개화”(로저 에버트)라고 읽는 시선도 있지만 실은 이스트우드는 항상 그랬다. 다만 ‘선하다’의 기준이 반드시 사회의 규범을 따르지 않고, 아니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의심하고 반항하는 쪽으로 표출되었을 따름이다. 근본은 바뀌지 않지만 시대에 따라 현상은 변한다. 이스트우드의 짙게 팬 미간 주름은 1970년대 미니멀리즘 연기의 아이콘 때부터 유지되었지만 그 깊이와 형태는 세월이 묻은 만큼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2008년의 이스트우드가 자신이 믿어온 가치 위에 개방과 포용의 시선을 살포시 더했다면 오늘날의 이스트우드는 가족으로 대변되는 집단의 가치로 적극적으로 되돌아가 환상 속에 안착한다.
<그랜 토리노>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말이 많은 편에 속했지만 그는 이번 영화에서 유독 수다스러워졌다. 얼의 필요와 임무를 간결하게 제시하고 경제적으로 편집하던 영화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을 늘어놓는 지점이 세 군데 있다. 세 가지 방식의 서로 다른 수다는 각각의 이스트우드를 증명한다. 첫 번째는 아내 메리(다이앤 위스트)와의 대화, 두 번째는 감시역 훌리오와의 대화, 세 번째는 특수요원 콜린(브래들리 쿠퍼)과의 대화다. 앞서 언급했듯이 훌리오와 얼은 범죄 카르텔 안에서 유사가족의 위치를 대변한다. 백인들이 주로 가는 식당에서 이들을 비호하는 얼의 모습은 소수와 타자의 위치를 역전시켜 서로의 입장을 짐작하게 한다. 개방과 포용의 시선으로서의 이스트우드. 아내 메리와의 대화는 영화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고백처럼 들린다. 어떻게 꽃에만 그렇게 정성을 쏟을 수 있느냐는 아내의 비난에 얼은 “사랑하니까. 특별하잖아. 화려하게 피고 하룻저녁에 지니까. 소중하게 대접받을 가치가 있어”라고 답한다. 영화라는 꽃을 가꾸는 원예사로서의 이스트우드. 마지막으로 특수요원 콜린과의 관계는 계승자에 대한 조언처럼 들린다. ‘오래 살아서 말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늙은 남자 얼은 자신을 뒤쫓는 특수요원에게 굳이 “나처럼 살지 마라. 일도 중요하지만 가족만큼 중요하지는 않다”고 충고한다. 벌써부터 차세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될 거라 지목받고 있는 브래들리 쿠퍼에게 건네는 진심이라고 볼 수 있을까.
<라스트 미션>을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걸음, 집대성으로 읽고 싶은 건 이스트우드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의 욕망일 것이다. 전설이라 불러도 무방할 90살 노장의 행보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랜 토리노>를 마지막으로 다시 스크린 위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영화적 분신은 이렇게 익숙한 듯 다른 모습으로 귀환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이스트우드의 행보에 ‘라스트 미션’ 같은 건 없을 것 같다. 그저 늙은 노새처럼 뚜벅뚜벅 다음 걸음을 옮길 뿐이다. 지역 정치학적인 해석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스트우드는 이스트우드라는 흔적으로만 증명된다. 걸음을 옮기는 자는 변함없지만 걸음(영화) 자체는 매번 새롭게 찍히고 다시 발견되는 것이다. 그 족적이 쭉 모여 이윽고 이스트우드라는 영화가 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대표되는 프랜차이즈와는 다른 의미에서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전체가 한편의 영화, 아니 시스템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개별 영화의 정치학적 의미나 완성도, 드라마를 논하면서도 동시에 ‘이스트우드 영화’라는 거대한 흐름 아래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기본에 충실한, 동시에 조밀한 미장센을 자랑하는 이스트우드의 손끝은 여전히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장면들을 피워낸다. 다만 말이 많아진 만큼 전작들의 팽팽하던 긴장과 내적 갈등은 다소 줄어든 게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영화 안에서 포착되는 흔적으로만 정의 가능하다. “이스트우드는 영화 안에서 프레임에 포착될 뿐이다. 그는 세상에 출몰하는 완벽한 육체를 가진 유령이다”(영화평론가 빈센트 캔비)라는 말은 처음에는 배우 이스트우드의 정형화된 연기를 변명하기 위한 평가였지만 어느새 이스트우드의 본질을 꿰뚫는 개념이 되었다. 이스트우드라는 육체를 가지고 스크린을 넘나들며 영화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거의 유일한 존재. <라스트 미션>의 미세한 변화가 미진하고 의심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트우드의 얼굴, 깊게 팬 미간과 주름, 눈을 찡그린 채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이미 영화라는 거대한 세월 앞에 항복하고야 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