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 출연 마르쿠 펠톨라, 카티 오우티넨 / 제작연도 2002년
살면서 후회하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왜 영화를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는지부터 시작해 어머니가 (영화 하는 것을) 말릴 적에 왜 말을 듣지 않았는지, 학교 다닐 때 만든 영화는 왜 그렇게 제작비를 많이 쏟아부었는지 따위의 것들이다. 물론 영화 만드는 삶 이외에도 기억하고 싶지 않고 차마 적지 못한 부끄러운 일들이나 죄스러운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새롭게 시작하는 삶을 꿈꾼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를 본 것은 고등학생 때이다. 이토록 단순하고 시시하고 말도 안 되는 로맨스라니! 나는 이 남자의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사랑을 동경하며 조만간 성인이 될 나의 삶에도 ‘이토록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과거가 없는 남자>를 두 번째 본 것은 군 복무 시절 휴가를 나왔을 때이다. 이미 완성된 영화가 바뀌었을 리 없으므로 변화된 개인의 상황이 같은 영화를 달리 보이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에는 영화가 대단히 슬픈 코미디로 보였다. 너무 슬퍼서 울고, 좌절하고, 욕해야 하는 영화 속 인물들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각자의 선의를 다했다. 선의를 다하는 그들은 상대에게 어떤 호의도 바라지 않고, 심지어 ‘감사하다’라는 인사조차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각자의 역할을 무표정하게 수행하고 사라졌다. 그 무표정이 너무나 말도 안 되고 우스워서 슬프게 느껴졌다.
<과거가 없는 남자>를 세 번째 보게 된 것은 대학 학부 시절, 졸업작품을 막 촬영하고 돌아왔을 때이다. 이미 처음 영화를 보던 어린 날의 ‘새로움에 대한 동경’ 따위는 다른 세상의 일로 떠나보낸 지 오래였다. 함께 촬영 떠났던 친구들과 나는 ‘이제 어떡하지? 어떻게 (영화 만들며) 살아가지?’ 따위의 자조 섞은 농담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때의 나는 비로소 이 ‘과거가 없는 남자’가, 사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죽어버린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로써 영화는 호러가 되었다. 이후의 모든 등장인물과 모든 사건들은 당연하게 흘러가는, 인과를 상상해봐야 아무 쓸모없는 저세상의 이치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가장 아름다운 영화는, 단 한번의 감상으로 정리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길은 때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고, 그 오랜 시간동안 영화는 여전히 멈추지 않은 채 관객의 마음 안을 흘러다닌다. 아직도 이 영화를 완전히 이해했노라 감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2년 전, 배낭을 메고 헬싱키의 어느 삭막한 교차로를 지날 때, 나는 분명 처음 와본 이 매력 없는 거리가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한참 뒤에 네 번째로 <과거가 없는 남자>를 보았다. 그 삭막한 교차로, 바로 정확히 그곳에 ‘과거가 없는 남자’가 서 있었다. 정말이다(이 글을 쓰기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니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동경했던, ‘이토록 새로운’ 일이 우연 속에서 무표정하게 탄생한 것이다. 비로소 이 아름다운 영화는 어느 동아시아 관객 1인의 마음속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
● 임정환 영화감독. <라오스>(2014)와 <국경의 왕>(2018)을 만들었다. 다음에 만들고픈 영화 속 공간과 그 세상에 함께할 인물들을 상상하며, 낯선 곳을 찾아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