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신문사에 온 게 거의 10년 만인 것 같다. 예전엔 신문사 돌면서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입니다~!’ 인사하고 다녔는데. (웃음)” 신문사 내부에 위치한 <씨네21> 스튜디오에 들어선 최수영은 잠시 옛 추억을 떠올렸다. 소녀시대로 활동하던 시간은 자신의 이름보다 소녀시대라는 팀 이름이 언제나 앞서던 시간이었다. 앨범을 내면 그건 ‘소녀시대의 앨범’이었고, 콘서트를 하면 ‘소녀시대의 콘서트’였고, 상을 받아도 ‘소녀시대의 수상’이었으니까. 그래서 ‘수영의 첫 주연 영화’라는 이름으로 영화 <막다른 골목의 추억>이 소개되는 게 배우 최수영에겐 퍽 낯설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각색한 최현영 감독의 <막다른 골목의 추억>은 일본에서 일하는 남자친구와 연락이 잘 닿지 않자 그를 만나러 일본 나고야로 향하는 유미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영화다. 최수영은 유미와 비슷한 성장통을 겪은 한 여성으로서 또래의 보편적 얼굴을 차분히 그려낸다. 배우 최수영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그녀를 만났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막다른 골목의 추억>이 처음 공개됐고, 올 초 일본에서 영화가 개봉했다. 부산과 일본에서의 반응은 어땠나.
=부산에선 반응을 체감할 겨를이 없었다. 레드카펫을 밟는 것도, 내 영화로 관객 앞에 서는 것도 처음이어서 긴장을 많이 했다. 소녀시대 활동하면서 큰 무대에 많이 섰는데도 모든 게 새롭고 감동적이었다. 일본에서 개봉했을 땐 직접 영화표를 끊어 관객 틈에 섞여 몰래 영화를 봤다. 아무래도 일본에선 가수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차츰차츰 배우로 다가갈 기회가 더 많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어떻게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되었나.
=지인을 통해서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시나리오를 받았다. 원작을 먼저 읽었는데, 내 또래 여성의 이야기이고 지금이 아니면 못할 이야기 같았다. 마침 그때 영화의 정서와 비슷한 성장통도 겪고 있었다. 게다가 한·일 합작영화고 양국에서 개봉하니 좋은 기회고 배움을 위한 길 같았다. 놓치고 싶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러고 감독님을 만났는데, 감독님의 꿈에 내가 나왔다고 하더라. 처음엔 최수영이란 배우를 생각지 못하고 있다가, 꿈속에서 감독님이 쓰고 가는 우산 안으로 내가 들어왔다더라. 마치 <늑대의 유혹>의 한 장면처럼. (웃음)
-여성 원작자, 여성 제작자, 여성감독, 여성주인공의 영화다. 여성이 만드는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이 출연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 측면이 있나.
=처음엔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원작이고, 제작사 대표님이 여성감독님을 원했고, 감독님의 꿈에 내가 나왔다. (웃음) 프로덕션이 시작되고 난 이후에야 영화를 만드는 많은 이들이 여성이라는 걸 인식했다. 시대의 흐름에도 맞고,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것 같았다.
-원작의 주인공 미미는 일본 여성이고 영화의 유미는 한국 여성이라 원작에서 캐릭터를 참고하기는 어려웠겠다.
=원작의 미미에겐 수동적인 면이 보였다. 남자친구에게서 먼저 연락 오길 기다리고 그에 대한 의심도 쉽게 하지 못한다. 10년쯤 전에 쓴 소설이란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지고지순한 여성처럼 보이는 면이 있었다. 요즘 시대의 여성이라면 할 말도 하고, 오랫동안 연락이 끊기면 한번 부딪혀볼 것 같았다.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바뀌면서, 그리고 유미가 나를 만나면서 좀더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이 추가되지 않았나 싶다. 연기할 때 ‘유미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고, 그런 의견을 감독님과 많이 나눴다. 반면 원작에서 이것만큼은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기본적으로 유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였다. 니시야마(다나카 슌스케)가 그런 말을 하지 않나. “나는 네가 속도 깊고 어른스러운 친구라는 걸 알겠는데 4년이나 만난 네 남자친구는 널 잘 몰랐던 것 같다. 넌 여전히 좋은 사람이다.” 그때 유미는 내가 잘못 살진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을 거다.
-유미는 착하고 성숙한 반면 어려움을 모르고 곱게 자란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3년 전의 나도 유미 같았다. 솔직히 그땐 은행도 혼자 갈 줄 몰랐다. (웃음)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3, 4년쯤 전이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회사에서 나와 새로운 소속사에 둥지를 튼 것도 새로운 환경에서 나를 굴리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 없이, 별문제 없이 잘 지내온 사람이었지만 새로운 환경에 나를 노출하면서 또 다른 자아를 찾게 됐다. 용기도 생기고, 도전의식도 생기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기 시작하고. 최근에 그런 성장통을 겪었기 때문에 유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남자친구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 유미는 게스트하우스 ‘엔드포인트’에서 며칠 묵는다. 이곳 주인 니시야마와 유미의 관계가 연애로 발전되지 않는 것도 흥미로운데 이 둘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했나.
=책에서는 좀더 미묘한 감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는 한 여자의 성장기에 가깝다. 예상치 못한 이별을 겪고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리는데, 사랑으로 인한 아픔이 다른 사랑의 가능성으로 치유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감독님과 공유했다. 다른 남자를 만나 아픔이 치유된 게 아니라 유미 스스로 치유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니시야마는 방에만 갇혀 있던 유미를 밖으로 꺼내준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했다. 유미와 니시야마의 시선 교환에서도 그런 달달한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니시야마를 연기한 일본 배우 다나카 슌스케와 일본어로 연기의 합을 맞추는 과정이 어렵진 않았나.
=10대 때 일본에서 3년간 지낸 경험이 있어 일본어로 소통하거나 일본어 대사를 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다만 한국어 대사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색한 대사들이 있어서 그걸 자연스럽게 고치는 작업에 신경 썼다. 일본에서 촬영 전 가장 오랫동안 매달린 작업이 자연스럽고 적절하게 일본어 대사를 수정하는 거였다. 일본어로 된 원작 소설, 한국어로 된 소설, 한국어 대본, 일본어 대본. 이렇게 네권의 책을 놓고 다나카 슌스케와 대사를 맞췄다. 이 대사가 소설에선 어땠는지 찾아보고, 문어체를 구어체로 옮기고, 가장 자연스러운 대사를 찾는 작업에 오랜 시간 매달렸다. 그러면서 동갑내기인 다나카 슌스케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하나같이 끼 많은 또래 친구들과 10년 넘게 동고동락하며 우정도 나누고 경쟁도 하며 소녀시대 활동을 했다. 그 안에서 끊임없이 수영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포지셔닝해야 하나 고민도 많았을 것 같은데.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난 경쟁력이 없는 캐릭터였다. (웃음) 그때만 하더라도 나처럼 키 큰 친구가 없었고, 게다가 성숙해 보이는 얼굴까지. 아이돌로서 외모나 실력이나 경쟁력 있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하지만 춤추는 게 너무 좋았고 소녀시대가 너무 좋았고 무대에 서는 게 즐거웠다. 그 안에서 내가 할 몫을 찾으면서 즐겼다. ‘이번엔 어떤 머리 하지?’ ‘쟤보다 예뻐야 하는데’ 그런 생각은 안 했다. 소녀시대 멤버들은 멤버들 사이에서 경쟁하려고 하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했다. 멤버이고 친구지만 또래 여성으로서 아이코닉한 캐릭터를 잘 구축해나간 그들이 존경스럽다. 난 이제부터 시작이다. (웃음) 그동안 갈고닦은 걸, 내가 할 수 있는 걸 이제부터 다양하게 시도해보고 싶다. 소녀시대로 활동할 땐 기본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부담이 1/8이었는데 이제는 그 부담을 온전히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한다.
-나의 30대는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
=내 30대는 20대 같았으면 좋겠다. 20대에 할 법한 다양한 고민과 도전을 30대에도 하고 싶다. 예전엔 30대를 완성형 인간으로 생각하고 살았는데, 막상 30살이 되니 여전히 싸워야 할 게 많고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 나 아직 청춘이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계속 도전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