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는 왜 떠나는 걸까.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를 보면서 가장 궁금한 지점이다. 아사코는 료헤이와 함께 오사카로 떠나기 직전에 마련된 송별회 자리에 놀랍게도 옛 연인인 바쿠가 찾아오자 그의 손을 잡고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는 짧은 동행을 마친 뒤 료헤이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 일탈적인 궤적이 왜 필요했을까. 영화는 그녀의 심리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는 똑같은 외모를 가진 두 남자 사이에서 결정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혼란의 상태일까. 아니면 마치 의례를 치르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제자리에서 벗어난 뒤 다시 되돌아오는 의지의 실현일까.
이런 아사코의 행동이 웨스턴의 정서와 유사하다고 느낀다. 웨스턴의 남성들은 이따금 안정적으로 보이는 가족 공동체를 떠나거나 집을 불태운다. 그들의 선택은 필연적인데, 더 이상 그 자리에 스스로가 거주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집을 잃어버린 자들의 여정이 시작된다. <아사코>에서도 집은 고정된 거주지가 아니다. 집에서라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연인이 사라지거나, 불길한 환상으로 옛 연인이 찾아오는 사태가 발생한다. 떠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특별한 점은 아사코의 불가피한 여정이 별개의 목적지를 예정해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사코는 집에 돌아오기 위해 집을 떠난다.
<아사코>는 동선의 궤적을 충실히 보여주는 영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로. 누군가를 찾아가는 길목, 거리를 따라 움직이는 발걸음의 이동을 이토록 세심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드물 것이다. 움직임의 궤적을 보여준다는 것은 서로 떨어진 연인이 공유하게 되는 상태를 불러낸다. 누군가는 다가가고, 누군가는 기다리는 것. 다가감과 기다림,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 두 가지 물리적 작용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아사코>의 프레임은 내부와 외부를 넘나드는 개방의 신호를 예민하게 수용하는 접촉의 장소가 된다.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인해 연극이 중단되었을 때, 마야는 료헤이에게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지만, 료헤이는 바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 사소한 지향의 몸짓이 아사코와의 재회를 추동한다. 물론 이런 개방성이 료헤이와 아사코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두 행위를 실천하는 자의 역할은 유동적으로 뒤바뀌어, 바쿠 역시 아사코가 위치한 공간 내부로 침투하게 된다. 하마구치는 마치 세 사람이 겪는 사랑의 형태를 외부의 침입에 취약하게 노출되는 쇼트의 속성에 빗대는 것처럼 보인다.
비와 구름과 거리와 인물들의 신체
도식적으로 말하면 <아사코>에는 두 가지 선이 펼쳐져 있다. 첫 번째는 인물들 사이를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하는 관계망의 선이고, 두 번째는 그 인물들의 관계를 어지럽히는 움직임의 동선이다. 전자는 바쿠와 아사코, 하루요와 오카자키가 한데 모인 자리에서 모두가 서로를 알고 있다는 걸 확인한 바쿠가 “운명”이라는 말로 정리한다면, 후자는 인물과 인물의 틈새를 진동하며 어긋나는 동선의 교차를 지목한다. 하필이면 지금 아사코에게 돌아온 바쿠, 붙잡을 새도 없이 뛰쳐나가는 아사코의 선택, 자동차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료헤이의 뒤쫓음. 그런 움직임들의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기에 쇼트 내부에는 불화와 균열이 발생한다. 아사코의 여정은 자신을 집단에 가둬두는 전자의 선을 부정하고 후자의 궤적에서 가능한 연인의 형태를 다시 모색하는 과정이 된다.
하마구치의 전작인 <해피 아워>(2015)에서 관계의 균열을 마주한 인물들이 이유 없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던 모습을 떠올려본다. <해피 아워>의 인물들은 균형을 잡는 워크숍에 참여해 역설적으로 일상 속의 불균형을 지각하고 발견한다. 드라마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이런 신체의 형상은 <아사코>에서도 징후적으로 각인된다. 오토바이 사고로 쓰러진 아사코와 바쿠, 지진 직후 홀로 쭈그려 앉아 우는 여인, 루게릭병으로 병상에 누운 오카자키의 몸이 그러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된다고 해서 불균형한 상태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침입이야말로 균열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루요와 재회하면서 바쿠의 존재가 인지되고, 마침내 바쿠가 료헤이의 눈앞에 나타나는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아사코>에서 두 사람이 한 프레임에 잡히는 것은 불안과 연결되어 있다. 혼자 있으면 무너지지만, 둘 이상이 있으면 파열음을 자아내는 관계의 역설이 아사코와 바쿠/료헤이의 구도에 불안을 드리우는 시각적 규범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영화의 후반에에 아사코와 료헤이가 펼치는 질주가 선사하는 놀라운 감흥의 정체를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실현되는 것은 영화 전체를 가로지르며 대기에 깃든 불안을 가시화하던 속도와 균형의 부조화에 저항하는 움직임의 총체다. 비와 구름과 거리와 인물들의 신체가 만들어내는 모든 움직임이 함께한다. 여기서 아사코와 료헤이는 거의 동시에 온힘을 다해 내달리며 두 사람 사이에 펼쳐지는 거리를 유지한다. 그건 상대를 따라잡으려는 의지가 담긴 추격도,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전조의 몸짓도 아니다. 그들은 차라리 변화하는 속도에 자신의 자리를 내맡기면서 동시에 끈질기게 상대와의 간격을 지키는 모순적인 형태를 그려낸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선 멈춤 없이 달려야 한다.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모색하기 위해선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아사코와 료헤이의 달리기는 그런 이중의 요구를 충족하는 유일한 영화적 운동이다.
아사코와 료헤이가 벌이는 기묘한 질주의 선은 아사코가 바쿠를 처음 마주치는 장면의 동선과 느슨하게 공명한다. 전시장을 나온 아사코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앞에서 걷는 바쿠를 바라보며 같은 방향으로 따라 걷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위치한 두 개의 ‘추적’ 시퀀스는 움직이는 걸음의 속도를 다르게 한 같은 무대의 변주이다. 하지만 이는 동어반복이 아니다. 수많은 반복과 선택을 지나친 아사코는 같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는 발걸음을 이번에는 전력을 다해 옮긴다.
이제는 료헤이에게 돌아온 아사코가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이탈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료헤이에게 문전박대당한 아사코는 느닷없이 옛 친구 오카자키를 만나러 간다. 이는 <씨네21> 1197호에 실린 우혜경 평론가의 비평에서도 거론되는 대목인데, 다른 견해를 말하고자 언급하려 한다. 우혜경 평론가는 “<아사코>에는 실패한 포르트-다 게임과 그 이후 인물들이 겪을지 모를 ‘퇴행’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내내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설정으로 오카자키의 루게릭병을 거론한 뒤, 이를 “엄마와의 성공적인 분리에 실패한 그는 엄마와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유아 상태로 퇴행하고 만 것”이라 결론짓는다. 그러나 만약 이 장면에서 퇴행에의 공포가 드러난다면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어조로 료헤이에게 되돌아가는 아사코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혜경 평론가의 지적과는 반대로, 나는 오카자키와의 만남에서 아사코에게 주어지는 건 퇴행의 결과가 아니라 모종의 결단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이 결단은 오카자키의 어머니인 에이코가 전해주는 비밀에서 비롯한다.
루게릭병에 걸린 오카자키와 그 앞에서 말을 꺼내는 아사코의 모습은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2000)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할머니에게 비밀을 속삭이고 숨겨둔 심정을 드러내는 고백의 형식을 떠올리게 하지만, 하마구치는 영리하게도 카메라를 잠시 부엌으로 돌려 아사코가 어떤 말을 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에이코가 돌아오면 아사코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이 순간을 상쾌하게 전환하는 건 갑작스레 쏟아져 마당에 걸린 빨랫감을 적시는 소나기이다. 그리고 마당에 나와 빨래를 걷는 아사코에게 에이코는 몇 번이고 들려준 젊은 시절의 사랑이야기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의 이야기라고 말해준다.
이것은 퇴행에의 불안이 아니라 사랑의 표면을 감싸던 거짓과 비밀이 벗겨지는 순간이다. 아사코가 진실을 듣게 되는 마당은 바쿠와 아사코가 애정을 나누던 공간이기도 하다. 오카자키가 흰 천을 떨어뜨리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천이 씌워져,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을 연상시키는 구도를 연출해내던 곳이다. 연인들의 유토피아적 장소로 여겨지던 마당은 이 순간 하나의 비밀을 발설하면서 또 하나의 비밀을 생성하는 공백 지대로 변모한다. 비밀의 상실과 또 다른 비밀의 탄생을 기반으로 추동하는 영화. 그곳에서 백색 스크린을 상기시키며 연인들의 배경으로 자리하던 흰 옷들을 걷어내자 사랑이 품은 비밀은 한 순간에 나타나고 또 소실된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서 사랑의 형태를 모색하는 아사코의 여정을 따라, 이 장면은 영화가 사라진 곳에서 영화의 윤곽을 이끌어내려 한다.
깨진 접시를 보고 코스케가 말한 대로 “형태가 있는 것은 모두 깨지기 마련”이라면, 마찬가지로 사랑 또한 이런 필연적 조건에 해당되는 물리적 대상이라면, 아사코는 항구적인 사랑의 형태를 포기함으로써 거꾸로 미래의 시간을 향해 움직인다. 그녀는 료헤이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용서받을 수 없음을 확인하러 온다. 그때 문이 열린다. 이전과 다른 관계의 조건으로, 다른 세계의 질서에 진입하는 순간이다. 그건 아사코가 돌아오는 도로에서 버스 창문을 통해 본 것처럼, 어둠 속에서 한치 앞의 시야만을 밝히며 매번 다른 질감의 영역에 발을 내딛는 감각에 근접하는 것이다.
피부의 영화, 촉각적인 화해의 감각
그래서일까, 영화의 마지막에 흰 상의를 벗는 아사코의 모습을 보면서 <아사코>를 피부의 영화라고 말하게 된다. 되돌아보면 카메라는 그런 순간들을 비추고 있었다. 대화를 이어가기보다는 입술을 포개는 것으로 촉발되는 마주침, 상대의 기습적인 출현에 뺨에 손을 가져다 대거나 말없이 품에 안기는 것으로 대응하는 재회의 방식. 아사코는 피부적인 접촉으로 감정을 구축하고 이끌어간다. 이 영화가 몸과 몸이 접할 때의 돌연한 감각을 세심하게 조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사코>는 전에 알던 대상을 새롭게 마주했을 때 피부에 잔상처럼 맴도는 촉감을 활성화한다. 젖은 수건을 아사코에게 던져주는 료헤이의 제스처에는 그런 촉각적인 화해의 감각이 마련되어 있다.
마침내 집에 되돌아온 연인의 눈앞에 불어난 강물이 흐르고 있다. 언제든 범람하여 집을 무너뜨릴지 모르는 강의 줄기를 그들은 바라본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불가역적인 파국에의 예감을 피부에 새긴 채로, 화면 바깥을 향한 시선만이 영화를 지속하고 있다. 신뢰 없는 사랑이 작동하는 시간이다. 탁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은 그렇게 지속된다. 그 앞에서 우리는 몇 번이고 우리를 갱신할 것이다. 아사코는 더 이상 료헤이에게 기대지 않겠다고 말한다. 무너져 내리는 신체를 입맞춤과 포옹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멈춰 선 수평의 형상으로 그들의 관계는 균형을 이룬다. 영화는 그런 절반의 믿음으로 나머지 절반의 불가능성을 극복한다. 파국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를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