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영적’인 영화를 좋아하고 이에 대한 글을 썼지만, 절대 이에 대한 영화를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제 몫이 아니죠. 저는 절대 ‘브레송이라는 위험한 얼음판’에서 아슬아슬한 모험을 하지 않을 겁니다.” 1972년, 오즈 야스지로, 로베르 브레송, 칼 드레이어 영화의 ‘초월적 스타일’에 대한 책(<Transcendental Style in Film: Ozu, Bresson, Dreyer>)을 발표한 비평가 폴 슈레이더는 당시 감독으로서 ‘영적’인 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개혁파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를 비롯해 신실한 믿음을 가진 가족들 속에서 신학을 공부한 폴 슈레이더는 어느 순간 이 ‘영적’인 세계를 버리고,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UCLA로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성한’ 과거와 ‘세속적’인 현재는 절대 만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소매치기>(1959)에 큰 감명을 받았지만 폴 슈레이더는 이 두 ‘세계’를 ‘영화’로 연결해보려는 ‘모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적어도 <퍼스트 리폼드>를 만들기 전까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퍼스트 리폼드>는 폴 슈레이더가 50년 넘게 필사적으로 피해왔던 세계, 그 아슬아슬한 얼음판 위로 내딛은 조심스러운 첫걸음 같은 영화인 셈이다.
폴 슈레이더의 이력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주인공
흥미롭게도 신성한 과거에서 세속적 현재로 옮겨갔던 폴 슈레이더는 자신과는 정반대로 ‘세속적 과거에서 신성한 현재’로 이행하는 인물을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퍼스트 리폼드’ 교회의 목사인 톨러(에단 호크)는 집안의 ‘애국적’ 전통에 따라 전쟁에 참전한 아들이 6개월 만에 전사하고 이로 인해 결혼 생활마저 파탄나자 목사가 되어 다시 한번 삶의 길을 찾아보려 애쓰는 인물이다. 하지만 원치 않는 과거의 유령들이 자꾸만 톨러 앞에 출몰해 그를 시험에 들게 한다. 소변조차 편히 보지 못하는 그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조금씩 쇠약해져 간다.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하느님의 ‘피’와 ‘살’인 딱딱한 빵과 와인으로 ‘신성한 현재’를 붙들어보려 하지만, 정작 그를 현재에 세워두는 건 세속적 과거의 잔재인 술뿐이다. 오히려 그가 기도를 통해 붙들어보려는 영적 세계는 끊임없이 톨러에게서 멀어지려 한다. 전적으로 영적인 공간이 되어야 할 톨러의 교회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다. 제목을 통해 선언한 것처럼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톨러가 아니라 ‘퍼스트 리폼드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화 전체에서 (물리적인 의미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첫 장면을 떠올려보자. 영화가 시작하면 서서히 밝아오는 화면 속에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로앵글의 카메라가 교회에 천천히 다가가 멈춰 서고, 이곳의 역사를 설명하고 외관을 보여주는 몇개의 숏을 거쳐 비로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기를 쓰고 있는 톨러(의 목소리)를 만나게 된다. 마치 이제 곧 비극이 시작될 공간적 배경을 암시하는 공포영화의 첫 장면처럼 <퍼스트 리폼드>의 시작도 어딘가 서늘하고 석연치 않다. 교회 안으로 들어온 카메라는 톨러와 몇명 되지 않는 신도들이 성스럽게 예배를 올리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이내 돌아서서는 관리인을 통해 남자 화장실에 물이 샌다는 소식을 톨러에게 전한다. 하지만 이 교회의 운영 자금을 지원하는 ‘풍요로운 삶’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자는 관리인의 제안에 톨러는 자신이 고쳐보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런데 ‘망가진 것’은 화장실뿐만이 아니다. 250주년 기념 재봉헌 행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오르간 역시 고장난 상태다. 10명 남짓 되는 신도들이 찾아오지만 풍요로운 삶 교회가 돈을 대지 않으면 교회는 사실상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기껏해야 관광객이 던지듯 주고간 돈 몇푼이 교회가 가진 운영비의 전부이다. 톨러의 고장난 신장처럼 교회의 화장실도 망가졌고, 더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는 교회의 오르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신도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실패한 사제 톨러의 목소리와 닮아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퍼스트 리폼드 교회와 톨러는 단단히 맞물려 있는 거울쌍에 해당한다. 그가 말하면, 교회도 말한다. (톨러는 환경오염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버크사 사장 에드를 만나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신이 우리를 용서할 것인가’라고 다그치는데, 얼마 후 그 말은 다시 교회 앞에 걸려 있다.) 이 지점을 염두에 두고 다른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영적’ 세계의 실패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의아했던 건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남편, 마이클이었다.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그는 인간에 의해 초래된 기후 변화로 (창조주가 만든) 세상이 망가져간다고 말한다. 돌이킬 수 없는 환경 파괴로 세상은 절망에 빠질 것이고, 그런 세상에 아이들을 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기후 변화를 ‘사기’(hoax)라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것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임에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이니, 마이클의 이러한 주장엔 이의를 달기 어렵다. 하지만 이 논리의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괴이하다. 그런 절망적인 세상에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못하게 (낙태)해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열성적으로 환경운동을 하다 체포돼 수감됐다 풀려날 정도로 마이클은 ‘현재’를 바꾸기 위해 ‘현실’ 속에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기후 변화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가려 하고 있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그는 ‘영적’인 세계에 기대려 들지 않는다(“그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절망적 현실에 처할 아이를 위해 희망을 위한 기도를 하는 대신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영화는 이렇게 한순간도 영적이지 않은 마이클을 이제 막 영적인 현재로 들어선 톨러 앞에 데려온다. 영적인 세계의 ‘메신저’가 된 톨러는 현실의 절망 앞에 목숨을 끊은 마이클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현실 앞에 선 톨러의 무기력은 거대 자본 앞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린 퍼스트 리폼드 교회의 무력함과 공명한다. 영화 초반, 톨러는 일기를 시작하며 1년이 지나면 ‘실험’이 끝날 것이고, 그때 일기장을 태워버리겠다고 다짐한다. 앞서 말한 대로라면 그가 말하는 ‘실험’은 아마도 퍼스트 리폼드 교회 자체의 실험에 다름 아닐 것이다. 돈이라는 현실 앞에서 영적인 세계는 과연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톨러는 마이클의 ‘자살 폭탄 조끼’를 대신 입고 창조주가 만든 세상을 (돈과 오염물질로) 더럽히는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현실로 나선다. 그가 재봉헌 행사를 위해 폭탄 조끼를 입기 전, 먼저 이 조끼를 입고 문제의 기업 ‘버크사’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자제해왔던 일본 된장과 생선회를 먹고 “이 얼마나 단순한 즐거움인가”라고 말하지만, 카메라는 톨러의 뒤에서 웃고 떠들며 술 마시는 에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폭탄을 터트리는 대신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교회로 다시 돌아간다. 결국 이것은 마이클의 자살의 반복이며 톨러의 실패이자 동시에 ‘영적’ 세계의 실패로 읽힌다. 이 예정된 실패는 하지만 메리의 등장으로 교란되고 중단된다. 영화의 마지막, 격정적으로 키스하는 톨러와 메리에게서 ‘희망’을 보았다면, 당신은 메리를 더 세게 끌어안을수록 더 큰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톨러를 의도적으로 잊은 것이다. 먼 길을 돌아온 폴 슈레이더는 조심스럽게 이 두 세계의 조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의심한다. 갑자기 중단된 이 실패가 어느 순간, 째깍거리며 가는 톨러의 시계처럼 다시 그의 조끼를 작동시킬지 모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