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박누리 감독의 <첨밀밀>
2019-04-30
글 : 박누리 (영화감독)
그 시대를 추억함

감독 진가신 / 출연 여명, 장만옥 / 제작연도 1996년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집에 늘 무협 시리즈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다. 무협영화를 좋아한 아버지 때문이었다. 7살인 내게도 강호를 누비는 협객들의 영웅적 활약상과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주인공들은 멋져보였다. 손가락 하나, 부채 한번 휘두르면 악당들이 턱턱 나가떨어지는 모습이라니!

어느 날부턴가 비디오 가게의 최신 코너는 무협물 대신 홍콩 누아르물이 차지하게 됐다. <지존무상> <첩혈쌍웅> <천장지구> 속 주인공들은 선글라스에 멋진 정장이나 가죽점퍼를 빼입고 비정한 도시를 누볐다. 여전히 의리에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오토바이에 올라 질주했다. 멋졌다. 폼도 났다. 우정은, 사랑은, 인생은 저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 영화 <첨밀밀>이 개봉했다. 그즈음 아마도 첫사랑 비슷한 감정에 눈을 떴던 나는,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함께 보러 가자는 말도 못해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펑펑 울 준비를 하고 갔지만 운명적인 사랑에 목숨을 거는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은 없었다. 대신 세상에서 제일 우유부단하고 어리바리한 남자주인공과, 사랑보다 돈이 먼저인 여자주인공이 나와서 10년 동안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답답했다. 여소군(여명)은 왜 고향에 두고 온 약혼녀와 헤어지지 못하고 이요(장만옥)는 왜 표 형님(증지위)을 떠나지 못하는 걸까. 화도 났다. 왜 저들은 저렇게 망설이고 엇갈리고 후회하는 건지. 나라면 절대 서로를 놓치지 않을 텐데. 그렇게 영화 속 주인공들을 현실에 끌어와 대입하며 안타까운 사랑에 아우성치는 동안, 어느새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덮인 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영화판을 기웃거리며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하던 20대 초반. 한번은 명절을 앞두고 백화점 특판원으로 일했다. 말주변 없는 내가 물건을 팔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마지막 날, 옆 주류 코너의 아주머니가 시음용으로 따고 남은 술을 주셨다. 집에 와 퉁퉁 부은 발을 씻고 술을 꺼냈다. 영화가 그리워 고른 것이 하필 또 이 영화였다. 그날 따라 유난히 이요가 통장잔고를 확인하는 장면이 슬펐다. 사랑하는 사람을 ‘동지’라 칭하며 밀어내고 억척같은 현실로 돌아와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자신의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이요가 미울 정도로 나와 닮아 있었다. 또 화가 났다. 이번엔 안타까운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안타까운 ‘인생들’이 보였다. 40도가 넘는 술이 목을 태우며 잘도 내려갔다. 1980년대 홍콩의 낡은 아파트 곳곳에 낀 때처럼 오랜 시간의 흐름 위에서 부유하다, 결국 낯선 타국에서 만나게 된 두 사람. 고물 TV에 흐르는 등려군의 얼굴처럼 꽃다운 청춘은 지났지만, 또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나이 든 얼굴만큼 쌓인 그들의 인생이 되레 멋졌다. 표 형님의 인생이, 고모의 인생이 그러했다. 현실 속 인생은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 속 인생처럼 그리 폼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후반작업을 끝내놓고 문득, 지난 몇년간 한번도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인생 영화를 꺼내 들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여소군 동지가 탄 열차는 나를 20여년 전 순수했던 사춘기 소녀로, 꿈을 위해 치열하게 달려들던 20대 청춘으로, 그리고 이 영화를 마주했던 삶의 곳곳으로 데려다놓았다. 몇년 뒤 어느 날 또다시 이 영화를 꺼내 든다면, 그때 나는 또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어쩌면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늘 시대와 추억을 동반하니까.

● 박누리 영화감독. <부당거래>(2010), <베를린>(2012), <남자가 사랑할 때>(2013) 조감독을 거쳐 첫 영화 <돈>(2018)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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