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미성년>에서 김윤석 감독이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하여
2019-05-01
글 : 홍은애 (영화평론가)
영주의 맨발이 ‘다시’ 등장할 때

김윤석 배우의 감독 데뷔작 <미성년>을 보았다.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장면은 영주(염정아)의 맨발이었다. 그녀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녀가 맨발일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감독은 그녀의 맨발을 딸 주리(김혜준)에게 도시락을 건네고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영화의 배경이 된 계절은 겨울이었다. 딸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당당하게 걸아가는 그녀의 맨발을 본 순간, 신동석 감독의 <살아남은 아이>(2017)에서 미숙(김여진)이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난 후 걸어가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남편 대원(김윤석)의 불륜을 알게 된 영주의 상황과 아들이 친구의 괴롭힘으로 익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숙의 상황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이 두 여성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두 영화는 이들의 감정을 표정이나 대화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뒷모습을 통해 보여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는 두 감독이 기존의 사건 중심 영화에서 벗어나 인물의 내면에 충실한 인물 중심 영화를 연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김윤석 감독은 <미성년>에서 어떤 방식으로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가?

어떻게 욕망을, 충격을 표현할까

먼저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영주의 맨발을 다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번엔 냉동된 음식에 발을 찧는 장면을 통해서다. 감독이 영주의 맨발을 반복해서 보여준 의도는 무엇일까? 이는 영주가 꽁꽁 언 시멘트 바닥을 걷는 맨발의 통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아니면 한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가정의 위기(남편의 불륜)에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영주의 욕망을 맨발 이미지로 표현하려 한 것일까. 여기서 인상적인 점은 영주의 맨발과 미희(김소진)의 수면양말이 대비를 이룬다는 것이다. 영주가 남편의 불륜 상대인 미희의 오리집을 찾아간 장면을 보자. 감독은 오리집에서 미희의 안내로 홀에 올라가면서 신발을 벗는 영주의 스타킹 신은 발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상 앞에 앉자마자, 손으로 상을 쓱 문질러본 후 주변을 빠르게 살핀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미희라는 여성을 탐색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잠시 후 미희가 신발을 벗고 홀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수면양말 신은 그녀의 발을 똑같이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감독은 왜 두 여성의 발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는 영주와 미희의 상반된 상황(미희는 영주 남편의 아이를 임신 중이다)을 발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닐까. 처음엔 당당하고 의연하게 미희의 가게를 찾아갔던 영주는 자신이 신고 온 스타킹 올이 풀린 것을 발견하고 감추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영주의 자존심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다. 식탁의 청결을 확인하던 앞 장면과 반대로 영주는 남편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다정하게 통화하는 미희를 목격하면서 흔들린다. 이후 미희가 넘어지고 이로 인해 조산하는 과정은 이미 예견된 상황은 아니었을까. 그 후 미희의 딸 윤아(박세진)는 조산아 동생을 위해 신생아 양말을 준비한다. 여기서 영주의 맨발과 윤아가 준비한 양말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일까? 생뚱맞아 보일지 모르는 이 두(맨발과 양말) 이미지가 영주와 윤아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으로 읽힌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영주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다. 윤아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으로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주리와 윤아(같은 학교, 같은 학년)의 격렬한 몸싸움 장면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주리는 아빠 대원의 비밀(미희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을 알고 엄마 영주가 알기 전에 수습(미희에게 아빠를 만나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하기 위해 미희의 오리집을 찾아갔지만 실패한다. 오히려 윤아가 주리 엄마 영주에게 아빠의 비밀을 폭로해버린다. 학교 복도에서 윤아를 본 주리는 윤아에게 달려가서 머리채를 잡는다. 두 사람은 유리창에 부딪히면서 강화유리를 깨고, 교실 문에 부딪히면서 문이 떨어져 그 위로 넘어진다. 감독이 이처럼 두 사람이 치열하게 싸우는 장면을 오랫동안 보여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감독이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서로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 보며 바닥에 넘어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서로 원수처럼 여기는 두 사람이 가까이 얼굴을 맞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이들이 지지 않기 위해 상대방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몸싸움 이후에 이들은 미희의 조산으로 태어난 동생 못난이(미희가 지은 태명)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신생아실 인큐베이터에 있는 못난이를 보기 위해 머리를 맞댄 장면은 앞의 치열한 몸싸움 장면과 대비를 이룬다. 못난이는 두 사람이 모두 태어나길 원하지 않았던 아이였지만, 이들은 작은 생명을 보면서 마음이 변한다. 특히 윤아는 못난이를 위해 양말을 준비하고, 엄마를 대신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동생을 키우겠다고 결심한다. 그녀는 왜 마음이 바뀐 것일까?

이제 윤아의 욕망에 대해서 말할 차례다. 이전의 그녀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가정 있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는 철부지 엄마(미희는 19살에 윤아를 낳았고, 현재 딸이 고등학교 2학년인데, 동생을 낳겠다고 한다)를 원망하면서 아이를 낳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윤아는 인큐베이터에 있는 동생을 보면서 “사는 거 되게 빡세다. 각오는 돼 있어? 힘내!”라고 말한다. 그녀의 말에서 우리는 동생을 지키고 싶은 마음을 알 수 있다. 엄마처럼 무책임한 여성으로 살고 싶지 않은 그녀의 욕망이 신생아의 양말에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윤아는 동생의 양말을 정성껏 빨고, 출생신고서를 작성한 것이 아닐까.

장소의 의미 바꾸기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코믹한 장면은 대원이 미희를 만나러 병원에 와서 들키고 도망가는 장면이다. 주리는 아빠 대원을 발견하고 부르지만, 대원은 못 들은 척 달아난다. 이때 윤아도 함께 대원을 쫓는다. 주리는 대원을 놓치고 윤아는 끝까지 대원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쫓아가는 장면이 웃음을 자아낸다. 이렇게 뒤바뀐 대상은 영주가 대신 낸 미희의 병원비를 갚기 위해 윤아가 영주를 찾아가서 만나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다. 영주는 그동안 애써 참아왔던 눈물을 딸 주리가 아니라 윤아 앞에서 터트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같은 상황은 반복된다. 주리와 윤아는 못난이를 화장한 재를 들고 놀이공원에 간다. 이곳은 주리의 아빠가 윤아의 엄마를 만나서 사진을 찍은 장소다.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은 동생을 애도하기 위해 함께 놀이기구를 탄다. 만남의 장소가 애도의 장소로 바뀐다.

이처럼 감독은 영화에서 서로 대립되는 두 인물을 하나의 상황에 배치(주리와 윤아의 몸싸움)시키거나, 뒤바뀐 대상(불륜의 장소에서 애도의 장소로)을 만들거나, 대비되는 대상(맨발과 양말)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영화 속 등장인물의 내면을 드러낸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