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에만 가능한 열렬함이 있다. 이 시기에 통과의례처럼 닥쳐오는 자아에 대한 괴로움, (짝)사랑, 처음 느끼는 성적 긴장감 같은 것을 어떤 이들은 평생 잊지 못하기도 한다. 생애 딱 한번뿐이면서, 순식간에 지나가는 그 시기를 곱씹는 기쁨으로 지금껏 수많은 성장 서사들이 쉼 없이 쏟아져 나온 것도 같다. 제7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퀴어사자상을 수상한 <하트스톤>(2016) 역시 14살 동갑내기 두 소년이 겪는 반짝이는 순간들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성장, 퀴어, 북유럽 시네마가 조화롭게 만난 이 영화의 성질을 잘 드러내는 한 장면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피오르 사이에 난 어느 작은 호수 안에 티 없이 아름다운 소년이 서 있다.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맑은 광경. 그러나 소년이 잠수를 시작하면 종전의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온갖 침전물이 떠다니는 물 아래는 누렇고 혼탁하며, 그 속에서 소년은 절규한다. 그동안 몰랐던 것들을 목도하는 나이, 그래서 비밀이 많은 나이를 그리는 <하트스톤>의 세부는 이렇게 종종 놀랍고 유혹적이다. 이 영화의 미덕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몇 가지 경로를 정리해봤다.
장편영화 시나리오를 진즉 써놓고도 투자를 받지 못해 단편영화를 5편이나 찍은 감독이 있다. 아이슬란드의 신예 구두문두르 아르나르 구드문드손(이하 구드문드손) 감독은 <하트스톤> 초고를 완성한 이후 만든 일련의 단편영화로 전세계 200여개 영화제에 초청받았고, 50여 차례 수상의 영광도 안았다. 그사이 두 형제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 <웨일 밸리>(2013)가 칸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서 특별언급됐고, 영화제가 지원하는 시네파운데이션 레지던스에 입주해 <하트스톤> 시나리오를 마무리지었다. 그래서일까. <하트스톤>은 외피보다 알맹이가 더 단단한 영화다. 확신을 갖고 작품을 써나간 감독이 오랜 기간 그 이야기를 묵혀두면서 연습하고 또 숙려한 뒤에 만든 데뷔작. 감정적으로 충만하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았고, 사춘기의 특징적인 상태에 최선의 존중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은 우리 삶을 아주 명확하고 아름답게, 때로는 가혹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반영한다”는 구드문드손 감독의 말에 보태자면, 두 소년 토르(발더 아이나르손)와 크리스티안(블라에 힌릭손)은 <하트스톤>에서 다소 힘겹게 성적 지향과 젠더 감수성을 감지하는 첫걸음을 떼고 있다. 물론 그 시작점은 어떤 용어로도 정의할 수 없는, 이상하고 두근거리는 섹슈얼리티 그 자체다. 이번 영화와 현실을 일정 부분 공유하고 있을, 극중 캐릭터와 비슷한 나이의 배우들에게 빚진 부분도 커 보인다. 이 영화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제16회 마라케시국제영화제에서 남자연기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발더 아이나르손과 블라에 힌릭손은 현재 북유럽영화계가 단연 주목하는 뉴페이스다. 10개월에 걸친 트레이닝을 거쳐 카메라 앞에 선 배우들은, 훈련 끝에도 실제와 연기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미덕을 잃지 않은 채 지극히 생생하고 자연스럽다.
노르딕 시네마의 감수성으로
또래와 달리 아직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아 콤플렉스를 느끼는 토르와 자신의 성적 지향에 혼란을 겪고 있는 크리스티안의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예상 가능한 전개를 따라간다. 그리고 <하트스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영롱한 디테일을 뽐낸다. 빙하, 호수, 용암지대가 광활하게 펼쳐지는 섬의 자연적 특성이, 구성원의 프라이버시가 유지되기 어려운 작은 생활 반경이 캐릭터만큼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런 특질은 영화의 이야기에, 스타일에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토르와 크리스티안을 비롯한 아이들은 전자기기 한번 사용하는 적 없이 바쁘고 심란한 여름을 보낸다. 소년들의 최대 일탈은 여자아이들과 말을 훔쳐 캠프를 떠나거나 동네 술집에 숨어드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아마도 마을 전체에 단 하나뿐인 것 같은 술집에서 싱글맘인 엄마가 데이트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기도 한다. 비극과 성장의 문턱은 보편성을 띠지만, 영화를 채우는 사건과 액션은 다분히 지역적이라 할 만하다. 이처럼 아이슬란드영화에서 고유한 지역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엇이고, 이는 근본적으로 연출자의 태도에도 영향을 끼친 듯싶다. 미니멀한 서사에 비해 <하트스톤>은 129분이라는 다소 긴 러닝타임으로 설계됐다. 이유가 뭘까. 구드문드손 감독은 두 소년 사이에 서서히 피어오르는 성애적 기류를 마치 자연 활동을 포착할 때처럼 길고 끈질기게 담아야 한다고 믿는다. 토르와 크리스티안의 열병은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자연의 섭리와 하나로 포개진다. 어쩌면 그건 지루할 수도 있는 과정이다. 누군가는 좀더 편집했어야 한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시간의 두께를 다 살피고 나면, 소년들의 마음이 끓는점에 도달했다가 조금씩 풍화되고 침식되는 과정을 지켜본 감독의 선택에 긍정하게 된다. 감독과 프로듀서가 입을 모아 “요정의 가호를 받아 무사히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 세계에서 영화의 흐름은 자연의 신비를 닮아있다.
‘이상한’ 섹슈얼리티
영화의 첫 장면, 다부진 소년 토르는 심기가 불편하다. 작은 어촌의 또래 소년들이 부둣가에 드러누워 여름의 나른함을 만끽하고 있는데, 토르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상의를 탈의한 상태다. 아무래도 토르는 자기 겨드랑이 털을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는 크리스티안이 내심 부러운 눈치다. 아직 2차 성징이 시작되지 않은 토르는 이후로 친구들과 수영장에 가는 것을 거부하고 가급적 자기 몸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 욕실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은밀한 관심사를 드러낸다. 근육질의 포즈를 흉내내고, 빗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수북이 떼어내 자기 몸에 붙여보면서 어떤 남성성을 갈망하는 식이다. 이 장면 직후, 짓궂은 두 누나에 의해 발가벗겨진 채 태양광 아래로 내쫓긴 그의 모습은 자욱한 수증기만큼 나르시시즘이 가득했던 욕실 장면과 대비를 이룬다. 한없이 욕망하면서도 한없이 부끄러운 것. 토르가 자신과 또래 집단의 몸을 보며 처음 인식한 섹슈얼리티는 아직 부끄럽고 불만족스러운 무엇이다.
크리스티안은 토르보다 몸도 마음도 훨씬 조숙하다. 큰형과 한참 어린 동생이 붙어다니는 것 같은 듀오 구성은 개인간 성장격차가 크게 벌어지곤 하는 10대 초반에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토르에겐 아직 모든 것이 모호하고 유보적이지만,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점차 선명하게 깨닫는 중이기도 하다. 한편 외양도 성격도 판이한 두 친구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폭발하는 호르몬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종 얄궂은 행동을 일삼는 ‘소년 세계’에 미묘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이를 부정하듯 토르는 또래 여자아이와 데이트하는 데 열을 올린다. 계산을 모르는 크리스티안의 사랑은 토르의 곁을 묵묵히 지키면서, 토르가 강박적으로 달려드는 이성애의 성공을 위해 전령사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내가 대신 고백해줄까?”, “내가 귀띔이라도 해줘?”). 물론 이렇게 가까운 관계에 비밀이 오래 유지될 리 없다. 성적 행위를 흉내내며 에너지를 배설하는 온갖 장난이 묘하게 진짜 흥분을 띠기 시작하자, 토르는 “너 좀 이상해”라는 말로 크리스티안에게 결계를 친다. 가부장적인 남성성을 빠르게 답습하는 또래 소년들, 동성애와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공공연한 사회, 소문이 곧 진실이 되는 좁은 커뮤니티에서 게이로 지목된 소년은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을까. 영화는 토르와 크리스티안의 내적 갈등을 보여주면서, 작은 비중이지만 무력한 어른들의 세계도 평행하게 놓아두고 있다. <하트스톤>에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외부의 시선 때문에 죽어버리는 사랑으로 고통받는다.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하겠어?” 이 한마디로 많은 것이 부서져버리는 광경을 목도하며, 아이들은 큰 몸살을 앓는다.
놀랍도록 아름답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한
바깥에서 한참을 달리고, 던지고, 때려부순다. 그러다 좁은 실내에 진입하면 서로의 몸을 더듬는 데 온 시간을 할애한다. 역동하는 14살의 신체리듬은 소년들이 머무는 공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발현된다.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거머쥔 영화 <램스>(2015) 이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노르웨이의 촬영감독 스툴라 브랜드스 그로블렌은 와이드 숏과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자신의 장기를 한껏 발휘했다. 광활한 자연과 내밀한 자기만의 방, 목가적 풍경과 혼란스러운 심장은 그렇게 공존할 수 있게 됐다. 보편의 성장담이 <하트스톤>에서 시각적으로 신선해지는 중요한 이유다. 특히 타이트한 숏에서 <하트스톤>의 촬영은 촉각에 특화돼 있다. 더운 여름날 피부를 맞댄 소년들이 서로의 살결을, 속눈썹을, 솜털을 인지하는 순간이 흔들리며 유영하는 카메라 안에 담긴다. 극도로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신체를 과장하고 박제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하트스톤>은 비밀스러운 흥분을 잃지 않는 쪽이다. 상대를 바라보는 소년의 떨리는 눈동자에 이입한 카메라라고 할까. 이 시선을 경유하면, 토르 스스로 그토록 불만스러워하던 육체가 크리스티안의 애정 속에서 아름다움으로 무장하게 된다. 수영장에 몸을 담근 토르의 피부가 물에 젖은 채 눈부시게 반짝일 때 크리스티안을 덮치는 매혹도 덩달아 빛난다.
<하트스톤>의 카메라가 유독 애호하는 것 중에는 동물도 있다. 끊임없이 의미심장한 기호로 등장하는 야생동물이나 가축은 자주 학대받거나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한다. 크고 아름다운 자연에서 산다는 것은 야생과 싸워야 한다는 뜻일 터. 그 때문에 어른들은 철저히 쓸모와 생존의 관점에서 동물을 대한다. <하트스톤>에서 다치거나 죽은 동물을 클로즈업에 가깝게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아이들뿐이다. 작고 못생겨서 놀림받는 물고기를, 개에 물려 불태워진 양의 뼈를, 새와 닭의 사체를 응시하는 토르와 크리스티안은 다름과 연약함이 무시되는 사회를 당혹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박된 동물들처럼 강력한 환경의 영향 아래 놓인 소년들을 위해, 감독은 영화의 제목을 빌려 견고한 생명력을 주문한다. 구드문드손 감독이 기억하는 유년 시절에 대한 묘사를 빌리면 <하트스톤>은 “자연과 사람이 둘 다 얼마나 놀랍도록 아름답고,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한지” 끊임없이 배우고 버티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