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는 집단 체험의 예술이지만 장민승 감독과 음악가 정재일의 명상적 중편 <오버 데어>는 혼자만의 관람도 권할 만하다. 2015년부터 2년간 제주의 자연을 촬영한 영상과 사진이 때로는 안개로 매개된 디졸브로, 때로는 단호한 컷으로 연쇄되는 <오버 데어>는 화면 안 소리를 배제하고 정재일의 음악으로 사운드트랙을 채웠다. 고드프리 레지오 감독과 필립 글래스의 문명비판적 <카시> 3부작을 연상하는 관객도 있겠으나, <오버 데어>는 자연의 이미지를 미학화하고 나아가 추상화한다. 정재일의 음악은 자연의 순환을 닮아서 낙숫물처럼 이미지의 표면을 건드리다가 격랑을 이루고 다시 잦아든다. <오버 데어>의 메시지는 감독이 이 영화가 자연을 바라보는 관습적 시선을 벗어나 열심히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연히 생성된다.
04/13
음식점 덕향오리의 사장이자 독신모인 김미희(김소진)는 샐러리맨 기혼남 권대원(김윤석)과 사랑에 빠져 임신하기에 이른다. 부모의 불륜을 알아차린 대원의 딸 주리(김혜준)와 미희의 딸 윤아(박세진)는 대책 없는 커플을 멈추려 하지만, 미희는 아기를 낳을 생각이고 대원은 주리가 자신의 연애를 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윤아의 도발로 상황을 파악한 대원의 아내 영주(염정아)는 우여곡절 끝에 조산기가 있는 미희를 산부인과로 실어나르게 된다. 마침 학교에서 드잡이를 벌이다 병원으로 달려온 멍투성이 윤아와 주리에게 영주는 대원의 신용카드를 쥐어주고 표표히 돌아선다. 그리고 등 뒤로 툭 던진다. “그리고 싸우지 마. 니들이 왜 싸워?” 이 대사는 관객의 쓸데없는 염려를 덜어주고 앞으로 어떤 범주의 이야기를 기대하면 될지 명시한다. 영주는 불륜 상대의 딸인 윤아를 주리와 똑같이 보호해야 할 아이로 간주한다.
<미성년>은 뜻하지 않게 엮인 네 여자가 불필요한 상처를 최소화하며 불운한 사태를 통과해가는 이야기다. 감독 김윤석이 직접 연기하는 대원은, 마치 이번 공격에선 서브를 넣고 공 배급만 하기로 결심한 배구의 세터처럼 사건의 불씨를 댕긴 다음 네 여자 둘레를 겸연쩍게 배회한다. 대원이 시시한 행동을 할수록 관객은 그를 연민하긴커녕 이 남자와 삶을 공유한 영주를 안쓰러워하게 되는데, 이는 <미성년>의 최대 역습이다. 중요한 점은 이 캐릭터가 실패한 남성성을 보여준다는 점이 아니라 실패한 남성성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자리다. 한국영화에서 배우 김윤석은 남성이 연출하고 주연하는 장르영화의 대표적 얼굴이었고, 이야기 안에서 패배할지언정 그의 패배와 고통은 영화가 그리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도끼와 소뼈, 소주병을 휘두르는 그는 다음 세대 남자아이들에게 정신적 내상을 입히며 장렬히 패배하는 남자였다. 그러나 <미성년>의 대원은 보통의 조연이다. 대원은 ‘멀리서 보면 희극인’ 인생을 사는 1인이다. 카메라는 관객이 대원의 애환을 알아주도록 그의 얼굴 가까이로 데려가거나 오래 지켜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행히 감독 김윤석은 이것이 대원의 스토리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미성년>이 대원을 ‘싸고도는’ 유일한 지점은, 가족에게서 밀려난 그가 지방에 내려갔다가 불량배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사건이다. 피투성이가 돼 집으로 돌아온 대원에게 영주와 관객은 추궁을 유예한다. 하지만 영주는 야무지게 ‘일단’이라고 단서를 단다. “쯧, 일단 병원에 가자.” 대원의 카리스마 결핍은 영주의 견고한 퍼스낼리티와 대비된다. 영주는 우리가 현실에서 한두명쯤 알고 있지만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유형의 여성이다. 영주는 남편의 외도가 있기 전에도 활짝 웃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선택을 후회하는 대신 실망을 받아들이고 가정을 경영하는 보람으로 삶을 지지해왔다. 피해자로서 영주는 놀랄 만큼 객관적으로 사태를 파악한다. 중언부언 변명하는 대원에게 영주는 “당신은 날 기만했어!”라고 쏘아붙이지 않는다. “당신은 두 사람을, 네 사람을 기만한 거야”라고 깨우친다. 대원의 미숙함과 무책임함은 영주를 모욕하지만 쓰러뜨릴 수 없다.
04/15
영주의 일관성은 미희의 다면성과도 대조를 이룬다. 윤아 나이에 엄마가 된 후 무책임한 남편과 헤어져 홀로 윤아를 키워온 미희는 중년까지 유예한 욕망과 열정을 무슨 일이 있어도 실천해보려는 중이다. 미희는 딸에게는 억지를 부리고 손님에게는 오지랖 넓게 친절하다. 참견하는 구경꾼한테는 이악스럽다가 애인과 통화할 때는 우아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컵라면을 들이켜는 미희는 차돌처럼 무표정하다. 김소진의 연기는 미희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미비하게 창조된 캐릭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한 인격으로 설득한다. 두 딸은 긍정하건 부정하건 두 엄마를 고스란히 닮았다. 합리적이고 단호한 주리는 산부인과에서 도망치는 아빠를 보자 뒤쫓는 대신 그저 운다. 그리고 원망의 과정 없이 아빠 딸 안 하기로 했다고 선언한다. 윤아는 철 없는 엄마를 타박하며 돌보는 데에 이력이 난 것 같지만 학교를 당장 그만두고 돈을 벌어 동생을 양육하겠다고 막무가내로 나서는 모습은 미희 그대로다. 윤아가 엄마의 임신에 극구 반대한 까닭은 자신이 불가피하게 아기를 사랑하고 짊어지게 될 줄 무의식적으로 짐작했기 때문일 터다. <미성년>은 네 여자의 합으로 굴러가지만 자매애를 답으로 내세우는 드라마는 아니다. 짐짓 상냥하게 구는 여자는 아무도 없다. 미희마저 영주에게 빈말로 사과하지 않는다. 네 여자는 그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서로에게 솔직하다(반대로 대원은 스스로도 자신의 진의를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언뜻 연기가 떠받치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영화 연기의 성패는 배우만의 몫이 아니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미성년>의 대화가 성공적이고 캐릭터끼리의 관계가 흥미롭다면, 감독이 다른 요소를 동원해 적절한 상황을 조성해서다. 돋보이는 공간은 영주의 집이다. 신도시로 설정된 아담한 중산층 아파트는 개성적이진 않지만, 분양 이후 인테리어를 개비하고 꼼꼼히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몇해 전부터 각방을 쓰는 대원은 부부 침실에 들어가는 장면이 없고 영주의 집에서 대부분의 사건은 거실에서 일어난다. <미성년>은 대체로 단독 신보다 둘 이상이 상호작용하는 장면을 통해 인물을 묘사한다. 대원이 영주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목은 연극의 무대를 보는 듯하다. 안방 문고리를 잡고 외워온 변명을 읊는 대원 뒤에 영주가 등장한다. 흠칫 놀란 대원은 영주를 졸졸 따라다니며 애원하는데, 영주는 앞뒤로 난 발코니를 왕복하며 커튼을 열어 젖혀 대원의 비굴한 얼굴에 백주의 햇빛이 조명처럼 떨어지도록 한다. 또 하나의 효율적 ‘무대장치’는 현관과 거실 사이의 중문이다. 집 안으로 인물이 진입하기 전에 안을 살필 수 있는 중간 지대는 망설임과 발견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윤아와 영주의 유일한 일대일 대화 장면은 좋은 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병원비를 돌려주러온 윤아는 용무를 마치고 나서다가 중문을 통해 눈물을 터뜨리는 영주를 보고 되돌아온다. (관객은 중문 옆에 걸린 거울로 영주의 울음을 엿본다.) 소녀는 사과하는 대신 진의를 분명히 한다. 오해로 불필요한 상처를 늘리기 싫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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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니티 워>)가 끝난 시점, 즉 여섯개의 스톤을 모두 입수한 타노스(조시 브롤린)가 손가락을 튕겨 절반의 종말을 불러온 순간에 시작한다. <인피니티 워>에 아예 등장하지 않았던 호크아이(제레미 레너)는, 소망대로 평범한 아빠로 돌아가 딸에게 활쏘기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과녁에서 화살을 뽑아 돌아선 호크아이의 눈에는, 칭찬해주려 했던 딸도 식탁을 준비하던 아내와 막내도 보이지 않는다. 루소 형제 감독은 이 장면을 대단한 특수효과 없이 카메라의 움직임과 컷 나누기 그리고 흩날리는 약간의 분진만으로 표현해 상실감을 극대화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갑작스런 부재를 재외하면 여전히 화창하고 거짓말처럼 평온한 (와이드 스크린의) 야외 풍경은 더욱 철렁하다. 슈퍼히어로의 절반이 소멸한 <인피니티 워>의 피날레가 주지 못했던 정서적 충격이다. 이 오프닝은, <엔드게임>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이후 이야기에서 배제된 일반인의 세상과 다시 연결을 시도할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