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감독의 <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2014),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2017, 이하 <고려 아리랑>), 그리고 지난 5월 2일 개봉한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이하 <붉은 청춘>)이라는 망명 3부작은 모두 떠나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들에는 어떤 쓸쓸함이 있다. <붉은 청춘>에는 사랑을 떠나왔지만, 결코 그 사랑을 버릴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는 쓸쓸함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사랑과 고향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이 느낄 수 있으며, 느껴야 하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김소영 감독은 북한에서 추방되고 소련으로 망명한, 어쩌면 우리와는 별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김소영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감독 자신의 말 그대로 “뿌리로 내려가서, 뿌리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영화를 처음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오래전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졸업작품으로 실험영화를 만들고, 유학을 가게 된 곳이 마침 미국 언더그라운드 실험영화의 메카였다. 선생님들이 내 영화를 매우 좋아했고, 영화제에도 많이 상영됐다. 그렇게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 실험작가가 되었다. 1985, 86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88년에 귀국한 뒤에 변영주 감독 등과 여성영상집단 바리터를 만들고,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들었다. <파업전야>(1990)가 나온 때와 비슷한 시기였다. 그렇게 실험영화를 만들던 작가로서의 인생은 끝났다. (웃음) 실험영화를 만들던 사람이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들다보니 이상한 프로파간다 영화가 나왔다. (웃음) 그리고 10년 정도 연구와 평론으로 영화 만드는 일을 쉬다가 2000년, 변영주 감독이 프로듀서를 하겠다고 해서, 3회 서울여성영화제 개막작인 <거류>(2000)로 다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영화를 이렇게 오래 만들어왔는지 몰랐다.
=잠시였지만, 미국에서 실험작가로 잘나갔다. (웃음) 한국으로 돌아와서 프로파간다 영화로 망해서 그렇지만. 사실 나한테는 흑역사다. (웃음)
-영화는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전작 <고려 아리랑>은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다큐였고, 여성들에 대한 다큐에는 익숙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남성들이 8명이 나오고 중요한 여성은 지나이다 여사 한명밖에 없어서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하나의 방법이 장르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비극적 남성주인공을 그리는 방식을 장르적으로 구현해보면 어떨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는 어떻게 보면 남성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지나이다 여사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려 했다. 다른 남성 감독이 만들었다면 지나이다 여사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역사의 교훈을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지나이다 여사다. 남성 8명의 이야기를 감싸는 사람은 지나이다 여사다,
-재미있었던 장면은, 지나이다 여사가 보청기의 건전지를 넣는 장면이었다. 다른 감독이라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장면이다.
=시네필인가보다. (웃음) 그런 장면이 좋지 않나? 그런 장면들의 호불호가 나뉠 것 같지만 시네필이라면 좋아할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예술, 예술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오고 있다.
=<고려 아리랑>이 행운이었던 것은, 이 영화의 예술인들은 예술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원론적이지만, 생생하게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강제이주 후에 조명도 없고 무대도 없는 곳에서 공연을 하고, 아이를 잃고 부모를 잃은 사람이 공연을 보러 와서 고맙다고 손을 잡고. 그분들이 사할린에서 공연을 할 때 공연을 보러온 사람들이 사할린에서는 굉장히 비싼 꽃다발과 수박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엄청난 환대를 해준 것이다. 집단농장에서 그 예술인들을 신처럼 기다렸다고 하지 않나? 그런 예술의 펼쳐짐을 본 것은 행운이었다. 굉장히 유명한 예술가, 예를 들면 파울 클레를 다루고 싶기도 하지만, 그보다 정말 아래로부터 예술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에게서 예술적 활동의 핵심을 본 것 같다.
-이주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안산에서 처음 시작했다고 들었다.
=안산에서 이주노동자들에게 미디어를 가르치는 수업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분들에게 미디어가 중요한데, 예를 들면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걸 가르치면, 캄보디아에서 온 여성 농민이 작업장에 들어가서 그냥 기록을 하는 거다. 그런데 그게 노동 착취의 증거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런 미디어 교육이 나에게도 영화의 근본을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해체적인 무엇을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국영화사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안산으로 갔다. 학생 중 한명은 한국영화사 수업시간인데, 고려인을 만나고 있고, 멘붕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웃음) 그런데 좋다고 했다. (웃음)
-이 영화와 감독님의 관심사인 ‘트랜스’라는 주제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내가 하는 것은 말하자면, 트랜스레이션, 일종의 번역 작업이다. 나는 다큐멘터리가 다른 문화권 혹은 다른 사람과 나와의 번역 행위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최국인 감독이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였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고려인에 관심을 두면서, 동시에 한국영화사 총서 토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기존의 한국영화사가 기술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토대를 잡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 미국쪽이 아니라 소련, 러시아, 중앙아시아쪽을 찾아보았다. 그때 최국인 감독이 검색되었고, 생존해 계신 것을 알고 알마티로 갔다. 2014년이었다. 한국영화사 작업에서 북한 출신 최초의 영화인,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중앙아시아의 주목할 만한 감독이 된 최국인 감독이 한국영화사의 기술 방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아카이브 작업의 일환이었다.
-인상 깊게 봤던 장면 중 하나는 최국인 감독의 얼굴과 눈사태가 디졸브되는 장면이었다.
=그 눈사태가 양원식 감독의 촬영 다큐다. 나중에 양원식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양원식 감독이 설산을 찍은, 카타스트로피(파국)의 느낌이다. 우리가 만났을 때, 최국인 감독은 중앙아시아에서 유명한 감독이었지만 자신이 조국에서 한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설산이 그러한 최국인 감독의 상황과 양원식 감독의 푸티지라는 점에서 의미망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의미들을 숨겨놓는 게 재미있다. (웃음)
-양원식 감독의 작품은 어떤 느낌이었나.
=양원식 감독은 자연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크레바스를 오랫동안 촬영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심연이기도 하지 않나? 자연 다큐멘터리로 자기 삶의 심연을 보여준, 미장아빔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영화는 ‘굿바이 마이 러브NK’라는 제목처럼 어떻게 보면 사랑에 관한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 이분들은 북한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 빅토르 최의 노래와 가사가 이분들의 애증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잠든다면, 누가 노래를 부를까?” 이 가사는 마치 이 영화를 위해서 만들어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