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배심원들>은 변호사와 검사가 비장의 증거를 주고받으며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는 이야기가 아니다. 임용된 지 18년 동안 형사부를 전담할 만큼 강단 있고, 법과 원칙에 충실한 김준겸 재판장이 맡은 첫 국민참여재판에 ‘법알못’(법을 잘 알지 못하는) 배심원 8명이 참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법 하면 딱딱하고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지만 이 영화는 때로는 경쾌하고, 또 때로는 피의자의 안타까운 사연 때문에 울컥한다. 홍승완 감독은 인터뷰 내내 “새로운 법정영화를 만들려고 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국민참여재판의 어떤 점에 흥미를 느꼈나.
=배심제가 도입되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재판에 참여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매료됐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명이 등장해 소동을 벌이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국민참여재판 또한 그런 상황 연출이 가능할 것 같아 취재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만난 판사님들이 해주신 자문에 따르면 국민참여재판이 처음 도입됐을 때 배심원들이 자기 일도 아닌데 얼마나 열심히 할까 걱정이 컸고, 사법부 안에서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배심제를 진행해보니 배심원들이 놀라울 만큼 성실하게 참여했고, 그 모습이 무척 신기하고 인상적이었다고 하더라.
-우리나라 최초로 진행된 국민참여재판은 2008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강도사건 공판이지 않나. 영화에 등장하는 존속살해사건과 다른데.
=대구에서 진행된 첫 국민참여재판은 빚으로 생활고를 겪던 강도가 월세방을 구하는 것처럼 가장한 채 주인 할머니의 집에 들어가 돈을 훔치다 발각되자 할머니를 폭행한 사건이다. 강도가 할머니를 직접 병원에 옮긴 뒤 제3자(마을 사람)를 통해 자수했고, 피해자인 할머니 또한 선처를 구하면서 집행유예 판결이 나왔다. 그 사건도 흥미로웠지만 영화로 다루기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다룰 사건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지난 10년 동안 논란이 됐던 재판 500여건의 판결문을 찾아 읽었는데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질렀지만 피고인의 사연이 기구하고 함부로 손가락질할 수 없는 사건들이 많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존속살해사건은 2008년 말 서울중앙지법에서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 사건이다. 이 사건을 끌어들인 건 현실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보편적인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평소 한국 사법제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는 많은 분쟁을 법으로 무 자르듯이 판단하는 것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인간의 삶을 법의 테두리로만 정리할 수 없으니까. 여러 판결문을 읽고 재판을 취재하면서 묵묵히 일하는 판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 판사는 아침 6시에 법원에 출근해 자정까지 일할 만큼 격무에 시달리며 지내시더라. 뉴스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권력 지향적인 판사 몇몇을 제외하면 판사 대부분은 평생을 공부만 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해 인상적이었다. 또 형사사건의 경우 업무 관련 스트레스가 유난히 많은 편이라 판사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듯 하더라.
-문소리가 연기한 김준겸 판사의 모델이 된 인물이 있나.
=한명을 콕 집어 얘기하긴 어렵다. 시나리오를 처음 쓸 때 참고했던 사람은 배심제가 한국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김상준 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였다. 그가 로스쿨에서 무죄판결과 사실인정에 관한 주제로 강의를 했는데 그의 허락하에 한 학기 동안 강의를 들었다. “법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영화 속 대사도 그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들은 얘기다. 그러다가 김영란 전 대법관,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 등 여성 판사들이 화제가 되면서 김준겸을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바꾸면 좀더 풍성한 결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또 다른 주인공인 배심원 8명을 어떤 사람들로 구성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성비를 동등하게 배분하고 연령을 다양하게 구성했다. 특이한 직업을 설정하면 극적으로 재미있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로 채우려 했다. 무엇보다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맛깔나게 살린 덕분에 인물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났다. 촬영 전 한달 동안 네 차례씩 만나 하루 6시간 동안 재판 전 과정을 연극하듯이 리허설했다. 그때 이미 합을 맞췄고, 촬영 들어가서는 세부적인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수정했다. 배우들은 리허설 과정을 힘들어했지만 만족도는 컸다.
-8번째 배심원이자 개인회생이 시급한 청년 창업가 권남우 역할에 박형식을 캐스팅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출연한 MBC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를 보는데 서툴고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남우를 연기할 배우를 찾다가 그때 봤던 그 얼굴이 떠올랐고, 남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박형식은 얼굴이 무기다. 얼굴 근육을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진심을 보여주는 힘이 있다. 촬영할 때 그가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카메라를) 보라고 주문했다.
-그간 재판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에 비해 재판 신이 생생하고 경쾌하던데.
=배심원이 주인공인 첫 영화인 만큼 새로운 법정영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법정, 법원 등 공간을 철저하게 고증해 리얼리티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보통 법정에 창이 없어 법정 세트에 창을 낼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수원에 창이 있는 법정이 있는 걸 확인한 뒤에야 창을 낼 수 있었다. 시나리오를 쓸 때도 개연성에 맞게 이야기를 구성했다. 실제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이 현장을 검증한 사례가 있었고, 추락사의 경우에는 자살 가능성을 항상 검토한다. 그렇게 확인한 뒤에 이야기에 반영했다.
-보통 판사가 법대에서 내려오는 경우를 보지 못했는데, 이 영화에선 김준겸 판사가 피고인석까지 내려와 무척 인상적이었다.
=판사가 법대에서 내려오는 장면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상징적이라고 보았다. 판사가 ‘바닥’까지 내려오는 의미 있는 장면이니 잘 찍자고 촬영감독과 얘기를 나눴다. 컷을 잘게 나누는 다른 시퀀스들과 달리 카메라가 김준겸을 따라가며 한컷으로 담아냈다. 한국에서는 판사가 법대에서 내려온 사례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김상준 판사에 의하면 “미국에서 서기관이 앉는 책상에 걸터앉아 재판을 진행한 판사를 본 적 있다”고 하셨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출신인데.
=영상원에 입학하기 전에 공대생이었다. 영화를 좋아해서 많이 챙겨 보았다. 어릴 적 허세가 심해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이 만든 예술영화를 좋아했다. (웃음) 서사에는 관심이 없다가 영상원에 진학해 이창동, 황지우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서사에 매력을 느꼈다. 영상원에서 단편 <가족나들이>(2006)를 만들었다. 한 가족이 한적한 시골의 한 식당으로 식사하러 왔다가 겪는 소동극이자 블랙코미디다.
-첫 상업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기분이 어떤가.
=닥쳐야 느끼는 성격이라 아직은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새로운 법정 영화를 만들었다고 인정받고 싶다. 또 철저한 고증을 거쳐 만든 만큼 재판과 법정을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말이 안 된다”라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이 두 가지 목표를 꼭 이루고 싶은 마음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