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페리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태평한 보호자를 둔 덕분에 나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를 열살 무렵 비디오로 보았다. 무서운 드라마와 영화를 싫어하는 어린이였는데도 브라운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영화도 있구나! 십수년 후 재회하기까지 내게 <서스페리아>는, 오직 스테인드글라스와 눈뜬 시체의 얼굴을 수직으로 갈라놓은 유리 파편이었다. 줄거리나 인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리메이크 개봉으로 다시 꺼내본 오리지널 <서스페리아>는 화면에 흉기가 등장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지로 우리의 시각을 공격한다. 어린 내게 피와 사이키델릭한 조명이 인상적이었다면, 이번에는 분홍이 소름끼쳤다. 발레 학교 벽을 덮은 핑크는, 감쪽같이 소녀적이면서도 어떻게 해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만의 색이다.
05/17
젊은 미국 여성이 대서양을 건너 독일의 유명 무용단체를 찾아와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여자를 받아준 곳은 알고 보면 마녀 공동체다. 마녀들은 낮에는 교사로 일하며 제자들의 육신을 취해 우두머리 마녀 헬레나 마르코스의 생명을 연장하고 마력을 유지한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지알로 호러 <서스페리아>(1977)와 40년 후 동료 이탈리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가 내놓은 <서스페리아>(2018)의 뼈대는 동일하다. 다만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는 위의 몇줄이 서사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도 친절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주인공 수지 배넌(제시카 하퍼)은 말 그대로, “음험한 구세계에 발을 들인 나이브한 미국인” 캐릭터다. 발레 학교의 실체를 발견한 수지는 당연히 온 힘을 다해 마녀 소굴을 탈출한다. 90분 조금 넘는 오리지널 <서스페리아>는 시청각 공포에 순수하게 집중한다. 불타 붕괴하는 학교를 탈출하는 수지의 얼굴에 스치는 미소를 보며, 관객 역시 유원지 귀신의 집을 빠져나올 때처럼 정화의 개운함을 맛본다. 반면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감독이 지닌 과시적인 야심가의 면모를 한껏 드러낸다. 데이비드 카가니치의 각본은 원작이 줄거리를 가운데에 두고 이전의 과거와 이후의 미래를 붙여, 장구한 연대기의 일부로 영화를 위치지었다. 오리지널에서 단역으로 스쳐간 정신분석학자를 주요 캐릭터로 키우는 등 없던 인물과 하위플롯을 덧붙여, 역사와 정치를 영화의 의미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시도했다. 결과적으로 러닝타임은 152분으로 원작에서 2/3만큼 늘었고 내부적으로 에필로그를 포함해 7개 장으로 나뉜다. 건물로 치면 구옥의 뼈대만 남기고 층을 올린 다음 생판 다른 양식을 적용한 대규모 증축이다. 감당 못할 공포를 겁내며 극장에 들어간 나는 기묘하게도, 뼈가 튀어나오고 장기가 쏟아지는 장면이 어느 하드고어무비 못지않은 새로운 <서스페리아>를 본 다음 과연 이 영화를 호러라고 부르는 게 적절한지 고민하며 돌아왔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마녀 오컬트라는 주제에서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를 몽땅 보여주고, 건드릴 수 있는 테마는 죄다 건드리는 맥시멀리스트 텍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결과물은 내게 전혀 공포의 감정을 일으키지 않았다. 호러영화의 메커니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판 <서스페리아>는 우리 안의 ‘괴물’을 보여주지 못했거나, 보여주었으나 알아보기 힘들었다.
05/18
2018년작 <서스페리아>의 배경은 원작이 개봉한 해인 1977년의 서베를린이다. 프라이부르크에서 베를린으로 무대가 바뀐 까닭은 종전 한 세대 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정치적 후유증을 내러티브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다. 마침 1977년 가을은 팔레스타인해방전선이 적군파 석방을 요구하며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공중 납치하고 급진 좌파 조직 바더 마인호프의 테러가 소요를 일으킨 시기였다. 심지어 구아다니노는 헬레나 마르코스 무용단 건물을 베를린장벽 지척으로 설정해 관객에게 반복적으로 시대를 상기시키려 애쓴다. 유럽인들은 파시즘의 악몽에서 깨어나려고 과격하게 몸부림치고 있다. 마르코스 무용단이 준비 중인 작품 <국민(VOLK)>은 이 몸부림의 예술적 판본이다. 영화는 주인공 수지(다코타 존슨)가 도착하기 전에 시작한다. 미국인 수석 무용수 패트리샤(클로이 머레츠)는 마르코스 무용단이 마녀들의 둥지임을 파악하고 탈출해서 급진 좌파 조직에 투신하고자 한다. 상담의 요제프 클렘페러(루츠 에베르스도르프/틸다 스윈턴)는 패트리샤의 의심이 망상이라고 보면서도 도우려 한다. 전쟁 중에 탈출을 원한 유대계 아내(제시카 하퍼)를 만류했다가 영영 잃어버린 클렘페러는, 당대 독일 지식인들이 그랬듯 나치즘의 정체를 직시하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려왔다. 그렇다면 마르코스의 마녀들은, 국가사회주의당의 등가물일까? 소수의 권력과 번영을 위해 다수를 현혹하고, 인간을 물화하고, 고유한 상징과 의식에 극도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은 유사하다. 패트리샤의 실종 즈음 등장한 오하이오 출신의 독학 무용수 수지는 빼어난 재능으로 마담 블랑을 사로잡아 단숨에 무용단의 주역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운영진은 수군거린다. “저 애가 어쩌면 적합한 자질을 갖고 있을지도 몰라.” 그들이 논하는 바가 후계자의 자질인지 제물의 조건인지는 불분명하다. 헬레나 마르코스가 절대적 보스였던 오리지널 영화와 달리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에서는 마담 블랑과 마르코스(또 틸다 스윈턴)가 마녀단의 리더십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로 그려진다. 하지만 결말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마르코스와 무용단의 예술감독인 블랑이 무슨 이슈로 어떻게 대립하는지는 모호하다. 마르코스는 반성하지 않고 지하로 숨어든 구악의 상징이고, 마담 블랑은 구체제를 회의하는 당대의 독일 시민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마담 블랑은 안티테제로서 설정되었을 뿐 행동하지는 않는다. 한편 의문을 품고 마녀들에게 저항하는 젊은 댄서들은 차례로 끔찍한 운명을 맞는다. 궁극적으로 해결은 아메리카에서 건너온 인물의 몫이다. “내가 너희의 어머니다”라고 선포하면 삽시간에 권력이 재편된다. 이것을 1970년대 서독과 미국의 역관계에 대한 2018년 시점의 풍자라고 보기엔 좀 맥이 빠진다.
05/19
홀로코스트, 정신분석, 여성의 섹슈얼리티, 역사적 집단 트라우마…. <서스페리아>가 논하고 있는- 또는 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슈들이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서스페리아>가 모성에 관한 영화이며 페미니즘은 선악을 포함한 여성의 복합적 속성을 인지하는 것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답했다. 확실히 <서스페리아>의 마녀 어머니들은 생명을 줄 뿐 아니라 임의로 박탈하는 강력하고 잔혹한 존재다. ‘지나치게’ 강한 힘을 가진 여성을 역사적으로 탄압하는 혐의였던 ‘마녀’의 이름으로 <서스페리아>는 남성 인물을 놀리고 배제한다. 남자들은 최면에 걸려 조롱당하며, 유일하게 유의미한 남성 캐릭터는 생물학적 여성배우가 연기한다. 하지만 대중문화에서 마녀가 힘을 겁내지 않는 여성의 표상이 된 것은 오래전 일이다. <서스페리아>는 여성 사제간의 관능적 교류, 독무가 불러일으키는 오르가슴을 언급하지만 여성끼리의 에로틱한 긴장을 묘사하는 필치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과 비교해 둔탁하고 의례적이다. “그러니까 여자들 말을 믿었어야지!”같은 여기저기 출몰하는 페미니스트적 대사들은 겉도는 향신료 같다. 영화가 열망하는 바와 달리 마녀의 힘은 무용단 외부로 범람하는 일 없이 내부의 여성을 주된 희생자로 삼는다. 여성의 몸은 다분히 대상화되고 퇴폐미의 오브제로 감상된다. 클라이맥스의 집회는, 살바도르 달리가 7인의 여성 누드로 해골의 형상을 연출한 그의 사진 프로젝트 <매혹적 죽음>(Desirable Death)을 극화한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나쁜 어머니를 축출한 새로운 세대의 마녀는, 반성하는 남성 인물을 살려주고 ‘딸들이 한 일’을 사과하며 여성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워준다. 강하고 좋은 모성이 줄 수 있는 해결책은 망각과 분리인 걸까? 마더 서스피리움은 무엇을 탄식하고 있는가? 무수한 암시의 이미지를 따라 헤매던 나는 끝내 길찾기에 실패한 채 탄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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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네트
춤의 교육과 공연을 중요한 소재로 활용한 것은 리메이크 <서스페리아>가 오리지널과 차별되는 지점이다. 패트리샤의 실종을 수상히 여긴 올가(엘레나 포키나)는 무용단 탈퇴를 선언한다. 건물을 빠져나가려던 올가는 거울에 둘러싸인 방에 들어서고 의지와 무관하게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멀리 떨어진 방에서 수지가 격한 춤을 추면 주술에 걸린 올가의 몸이 아바타가 되어 똑같이 비틀린다. 수지는 자유의지로 사지를 구부렸다 펴지만, 올가의 몸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뒤틀리기를 반복한다. 올가의 수난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춤추도록 저주받은 <분홍신>의 공포 그대로다. 한 사람의 재능이 발현되는 과정이 다른 사람에게는 곧장 생명을 소진하는 징벌이 된다는 설정은 예술을 소재로 삼은 호러의 고전적 모티브이기도 하다. 지상과 지하의 도플갱어가 동시에 독무를 추는 <어스>의 평행 교차 편집 시퀀스를 잇는, 죽음의 무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