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 이제 그 열기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약 26억 7747만 달러(우리돈 약 3조 1703억 원 / 이하 5월27일 환율 기준)의 수익을 거둬들며 전세계 흥행영화 2위로 자리 잡았다. <엔드게임>을 통해 MCU(Marvel Cinematic Universe)와 작별을 고한 배우라도 한동안은 그가 연기한 캐릭터 이름이 수식어처럼 붙을 듯하다.
그러나 <엔드게임> 출연진 가운데 단순히 히어로 캐릭터로만 기억되기에는 아까운 배우들도 있다. 상당수가 이미 MCU 이전,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로 여러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거머쥔 배우다. 다섯 명을 추려 그들에게 트로피를 안겨준 캐릭터를 살펴봤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채플린> 찰리 채플린아이언맨 그 자체가 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그는 MCU 이전에도 여러 작품으로 관객들에게 모습을 비췄다. 1970년대부터 단역으로 활동했던 그는 1980년대에 접어들며 <환상의 발라드>, <회색 도시> 등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1992년 그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캐릭터를 만났으니, 시대의 아이콘, 찰리 채플린이다.
찰리 채플린의 일대기를 그린 <채플린>의 주역으로 발탁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그러나 찰리 채플린이라는 거대한 이름에 대한 부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위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세밀한 습관부터 테니스, 바이올린 등 당시 채플린의 취미를 모조리 연습했다. 거기에 화면을 통해서는 볼 수 없었던 무대 뒤 채플린의 모습까지 그만의 해석으로 표한했다. 찰리 채플린의 딸 제랄딘 채플린은 영화를 보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너무 똑같아 놀랐다고. 이런 노력으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관객, 평단 모두에게 큰 호평을 받았으며 런던 비평가협회상,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마크 러팔로
<유 캔 카운트 온 미> 테리다음은 헐크를 연기한 마크 러팔로다. 에드워드 노튼의 하차로 공석이 된 헐크 역에 마크 러팔로가 캐스팅됐을 때 놀란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전까지 그는 주로 작은 규모의 인디 영화들에 출연, 흥행보다는 연기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런 그에게 트로피를 안겨준 첫 작품이 2000년 제작된 <유 캔 카운트 온 미>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는 새미(로라 리니)와 그녀의 동생 테리(마크 러팔로)의 이야기다.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 함께 하며 서로 갈등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그렸다.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테리는 누나와 달리 방탕한 삶을 살아온 자유로운 성격의 소유자. 두 사람이 갈등하는 이유도 대부분 그의 행동 때문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탕아 캐릭터라면 영화는 뻔하게 흘러갔을 것. 테리는 그저 살아온 환경이 달라 충돌하게 되는, 조금 철없는 애어른으로 그려졌다. 마크 러팔로는 이런 테리의 순수한 얼굴과 복잡미묘한 심경을 세밀하게 표현하며 심도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그 결과 LA 비평가 협회상에서 신인상을 수상,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미국 인디영화계를 이끌어갈 배우로 주목받았다.
스칼렛 요한슨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샬롯스칼렛 요한슨도 블랙 위도우를 연기하기 전에는 블록버스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배우다.(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일랜드> 정도가 전부). 10살 무렵부터 아역배우로 활동해온 그녀가 처음 대중에게 각인된 작품은 얄미운 누나로 등장한 <나 홀로 집에 3>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기력을 인정받은 시점은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남편을 따라 일본에 오게 된 샬롯을 연기했다.
이른 결혼과 타지 생활 속에 샬롯은 권태와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쇠퇴기를 걷고 있는 배우 밥(빌 머레이)을 만나 공감대를 형성, 서로 위로가 되어준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다른 듯 비슷한 두 사람의 조화가 독특한 케미를 이룬 작품이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연출도 크게 작용했지만, 소녀와 여인 사이 어딘가 위치한 듯한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도 우울과 설렘이 함께 묻어나는 영화의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이 캐릭터를 통해 스칼렛 요한슨은 LA 비평가 협회상 신인상,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아역에서 성인 연기자로서 발돋움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고모라> 등 작품성을 인정받은 여러 영화들도 있지만, 스칼렛 요한슨의 필모그래피에서는 <그녀>도 빠질 수 없다. 인공지능 사만다를 연기한 그녀는 오로지 목소리 연기만으로 로마국제영화제에서 최고의 여자배우상을 차지했다.
제레미 레너
<허트 로커> 윌리엄 제임스호크아이를 연기한 제레미 레너는 MCU 외에도 그의 얼굴을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한 프랜차이즈 영화가 또 있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다. 그러나 이 모든 영화들에 출연할 수 있었던 계기로 작용한 것이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허트 로커>. 팔콘, 안소니 마키와 MCU 출연 이전에 호흡을 맞춘 작품이기도 하다.
이라크 전쟁에 투입된 폭탄 제거반을 소재로, 전쟁의 참상을 그린 <허트 로커>. 제레미 레너는 제거반의 새로운 리더 제임스를 연기했다. 주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중심이 됐던 여타의 전쟁영화 캐릭터들. 그러나 제임스는 이와 정반대 격 인물이다. 그는 오히려 전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듯 보였다. 보통 전쟁영화들이 고통받는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주며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유발했다면, 제이미는 그 자체로 전쟁의 암담한 결과인 셈. 죽음이 너무나도 일상적인 그는 오히려 이질적인 공포를 자아냈다. 쉽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한 제레미 레너는 <허트 로커>로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 전미 비평가 협회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브리 라슨
<룸> 조이<스콧 필그림>, <21 점프 스트리트> 등 코미디가 필모그래피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브리 라슨. 그녀는 2013년 위탁 청소년들을 소재로 진정성 있는 메시지를 담아낸 <숏텀 12>에 출연하며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브리 라슨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작품은 단연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의 <룸>일 것이다.
단순히 시놉시스만 보자면 <룸>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한 남자에게 납치돼 무려 7년 동안 작은방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견딘 조이(브리 라슨)와 그 방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들 잭(제이콥 트렘블레이)의 이야기다. 그러나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은 두 인물의 감정에 철저히 집중, 영화를 짙은 드라마로 풀어냈다. 영화에서는 그의 탁월한 연출력이 드러났지만, 이를 완성시킨 것은 두 주연 배우. 브리 라슨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모성을, 제이콥 트렘블레이는 천진난만함과 처음 보는 세상에 대한 불안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그 결과 제이콥 트렘블레이는 단번에 천재 아역으로 인정받았으며, 브리 라슨은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과 함께 여러 영화제에서 트로피를 거머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