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다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지하
부의 양극화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기생충>은 두 가족이 살고 있는 공간을 반지하와 유명 건축가의 2층 건물로 설정했다. 반은 지상에, 반은 지하에 걸친 독특한 공간인 '반지하'는 한국에서는 아직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주거 형태다. 기택(송강호) 가족의 터전을 반지하로 설정한 것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분명히 지하인데 지상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공간, 그 묘한 반지하만의 뉘앙스는 서구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지점"이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영화 속 반지하는 한국인 관객들에게 더욱 송곳처럼 와닿는 대비의 공간이다.
iptime
도둑 와이파이로 연명하던 기택의 가족에게 닥친 데이터 재난. "윗집 아주머니 드디어 iptime 비번을 거셨다!"라며 탄식을 토하는 기우(최우식)의 대사에 한국 관객들의 공감 섞인 실소가 터져 나왔다. 부족한 휴대폰 데이터로 속 끓여본 사람이라면, 도둑 와이파이의 접근 금지 명령이 주는 야속한 심정을 십분 이해할 것이다. 특히 iptime이라는 구체적인 상품명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이름이 아니던가. 와이파이 검색창에 뜬 iptime(기본명)이 암호가 걸려있지 않은 와이파이일 확률이 높다는 것도 우리가 가난한 데이터 생활에서 터득한 일종의 지혜였다.
방역소독
매캐한 구름이 기택의 집안에 들어차자 관객들의 아련한 추억 하나가 소환된다. 방역차 뒤꽁무니를 미치광이처럼 웃어대며 쫓아다니던 유년 시절의 기억. 대체 왜 그랬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직도 동네 방역소독 작업이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꽤 많다. 기택의 집 앞으로 방역 아저씨가 지나가자 충숙(장혜진)은 창문을 닫으려는 기우를 말린다. "놔둬, 놔둬! 공짜로 집 소독도 하고." 아저씨는 지나간지 한참이 지났지만 환기에 취약한 반지하 방엔 하얀 연기가 오래도록 자욱하다. 연기가 걷히고 나면 구석구석에서 발견될 벌레들의 시체는 안 봐도 뻔한 사실이다.
실전은 기세
다혜(정지소)의 새 과외 선생으로 박 사장(이선균)의 집에 진입한 기우. 하지만 다혜의 엄마 연교(조여정)는 기우의 실력이 못 미더워 참관 수업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녀의 의심이야말로 기우(杞憂)였다. "시험이라는 게 뭐야? 치고 나가는 거야. 그 흐름, 그 리듬을 놓치면 완전 꽝이야. 24번 문제 나한테는 관심 없어. 나는 오로지 다혜가 이 시험 전체를 어떻게 치고 나가는가! 장악하는가! 그것만 관심 있다? 실전은, 기세야 기세." 수험생과 학부모를 홀랑 사로잡은 기우의 화술은 낯익어서 우습고, 익숙한 감각이라 슬프다. 어떻게 보면 수능이라는 긴 싸움에 배움보다 더 중요한 건 지친 마음 부여 잡는 동기부여 아니던가. 기우에게서 전국 1타 유능 학원 강사의 능수능란한 정신 교육의 기시감을 떨치기가 힘들다.
대만 카스테라
세상에 가난의 이유는 너무 많다. 물려받은 가난도 있고, 날려 먹은 가난도 있다. 그런데 <기생충>은 기택 집안에 드리운 가난의 원인을 단 한 마디로 설명한다. 유행이 순식간에 번졌다 사라지는 한국에서 한때 기하급수적으로 점포를 늘린 '대만 카스테라' 프랜차이즈가 있었다. 소자본창업 열풍의 중심에서 전국 1,000여 개 지점으로 뻗어 나간 대만 카스테라. 그러나 한 고발 프로그램의 폭로로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다시 순식간에 도미노처럼 줄도산을 했다. <기생충>에 휙 하고 지나간 '대만 카스테라' 이야기는 단번에 기택을 몰락한 자영업자의 상징적인 얼굴로 인식하게 했다.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기생충>이 개봉하고 '독도는 우리 땅'을 흥얼거리는 사람들이 늘었다. 무슨 상관관계인가 싶을 것이다. 많은 관객들은 이상하게 자꾸 떠오르는 기정(박소담)의 노랫말을 <기생충>의 명대사로 꼽았다.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과선배는 김진모 그는 네 사촌." 착 달라붙는 멜로디에 위트 있는 가사가 금세 외워진다. 그 멜로디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독도는 우리 땅'의 멜로디다. 실제로 시험공부 암기송으로 곧잘 활용되기도 했으니 학생 시절 봉준호의 암기 비법은 아니었을까. 여기서 봉준호가 해외 관객들을 향해 독도의 메시지를 이스터 에그로 숨겨뒀단 무리수는 두지 말자. 독도는 원래 우리 땅이고, 제시카는 아마 외동딸이다.
짜파구리
박 사장네의 귀가가 8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전화를 받고, 집에 기생하던 두 가족의 육탄전은 급히 마무리된다. 긴박감이 극에 달한 이때, 충숙은 연교로부터 막내 아들의 ‘짜파구리’를 만들라는 지령을 전달받는다. '짜파게티'와 '너구리' 라면을 섞어 만든 짜파구리는 몇 해 전 한국에서 붐을 일으켰던 이색 라면 조합의 대표주자였다. 한국인에겐 익숙하지만 해외 국가에선 알리 없는 이 단어. 영어 자막가 달시 파켓은 용케 '람동(Ramdon)'이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라면과 우동을 합친 탁월한 단어 선택이다. 한편, 일각의 네티즌들은 충숙의 짜파구리 조리법이 잘못되었다는 농담도 했다. 라면이 반반이면 스프도 반반씩 넣어야 했는데 스프를 통째로 넣어 버렸다는 것. 짠 줄도 모르고 맛있게 그릇을 비운 연교가 <기생충>의 옥에 티라는 이야기다.
미제 텐트
캠핑이 못내 아쉬운 다송(정현준)이가 한밤중 비가 쏟아지는 마당에 텐트를 펼쳤다. 박 사장이 다송이의 장난감 텐트에 비가 새진 않을까 걱정하자 연교는 “안 새. 저 텐트 미제야”라는 말로 안심시킨다. 한국인에게 ‘미제’는 단순히 미국에서 만들어진 제품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과거 전후 복구 차원으로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것은 세련되고, 달콤하고, 배부른 것들이었다. 세월이 흘러 흘러 한국은 미제와 경쟁하는 국가가 되었으나 여전히 그 시절을 아는 사람들 중 일부는 미제는 언제나 더 낫다는 환상을 극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우리는 이 다음 펼쳐진 서사 때문에 연교의 대사를 예사롭게 지나치지 못한다. 다송이의 미제 텐트가 방수 기능을 뽐내는 동안 박 사장네를 바퀴벌레처럼 빠져나온 기택이 보금자리로 돌아가 목격한 것은, 가슴까지 빗물이 차올라 세간이 둥둥 떠다니는 반지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