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끔찍한 돌봄
2019-06-26
글 : 심보선 (시인)
일러스트레이션 : 다나 (일러스트레이션)

예나 지금이나 돌봄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적용되는 관계는 가족일 것이다. 부모는 아이를 돌보고 자식은 노부모를 돌본다. 돌봄이라는 말은 흔히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보살핌을 뜻한다. 그러나 돌봄에는 정신적 보살핌뿐만 아니라 물질적 보살핌도 있다. 물질적 보살핌은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대부분의 물질적 보살핌은 구매를 통해 주어진다. 사회복지는 구매력으로만 돌봄이 보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의거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본 조건들은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은 복지국가의 이상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은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퇴색되고 있다. 복지는 낭비의 다른 말이고 사회 전체의 돌봄은 경제성장과 직업의 양에 달려 있다. 복지는 기본적 권리가 아니라 극빈층에 제공되는 시혜로 간주된다.

한국의 경우,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산후 조리원에서 상조 서비스까지”라는 말로 대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후 조리원과 상조 서비스 사이에는 물론 학원, 취업사이트, 결혼정보회사, 심리상담, 보험 등이 있다. 돌봄은 이제 아웃소싱을 통해 제공되는 재화이자 서비스다. 그렇다면 구매력이 결여된 가족들은 서로를 어떻게 돌볼까? 혹은 구매력이 넘치는 가족들은 서로를 어떻게 돌볼까? <기생충>은 상층계급 가족의 돌봄과 하층계급 가족의 돌봄이 기괴한 방식으로 만나 서로를 파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층계급의 가족은 구매력으로 서로를 돌본다. 과외 교사를 고용하고 가사도우미를 고용하고 운전기사를 고용한다. 하층계급의 가족에게 돌봄의 핵심은 서로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돌봄은 거짓말이다. 신분과 자격을 속이고 가족 전체가 상층계급 가족에게 고용된다. 이 두 가족 사이의 관계를 봉준호 감독은 “기생”이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아들아, 너는 꿈이 있구나”라고 말하지 않고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고 말한다. 필요한 것은 생존을 위한 단기계획이다. 하지만 그 계획도 그리 합리적이지는 않다. 위기와 분노는 그 계획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영화의 가족관계를 돌봄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기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이기적인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하는 관계에 돌봄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을까?

<기생충>을 보고 두 영화가 생각났다. 옛날 영화 중엔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자전거를 훔치다 망신당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전거 도둑>이 생각났다. 최근 영화 중엔 한 가난한 가족이 유괴를 하면서까지 이웃의 아이를 돌보는 <어느 가족>이 생각났다.

모두 범죄와 가족과 돌봄이 만나는 영화들이다. 앞서 두 영화에서 셋의 만남은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망설임 끝에 선택한 결과로 나타난다. 하지만 <기생충>에서 셋의 만남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결과이다. 성공은 있지만 윤리는 없고 좌절은 있지만 슬픔은 없다. 전자는 비극적이지만 후자는 끔찍하다. <기생충>은 돌봄을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끔찍한 보살핌”이라고 정의하는 것 같다.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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