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너무 극단적인데요.” 학생들에게 소설 감상문을 받아보면 꼭 이런 질문이 있다. 전통적인(?) 문학 교육을 받은 나는 당연히 난감하다. 에? 이건 픽션인데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일어나죠. 여자를 강간하고 줘패며 남자들끼리 우애를 다지는 일은 현실에 비일비재합니다. ‘장학썬’(장자연·김학의·버닝썬) 게이트를 보세요”라고 직접적인 사례를 들어 설득해야 했을까. 혹은 “소설은 현실의 폭력을 직접 고발하는 게 아니라, 폭력의 구조를 알레고리를 통해 암시하는 겁니다”라고 소설 미학에 대해 설명해야 했을까.
어떻게 답해도 학생들은 만족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내 질문을 바꿔야 한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라는 기준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일본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는 학생들이 문학에 기대하는 것이 이전과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제 독자들은 책에서 “즉효가 있는 정보”를 원한다는 것, 문학 역시 ‘기능적 독서’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미정은 더 나아간다. 문학에서 자신의 현실과 관련해 “즉효가 있는 정보”를 원한다는 것은 곧 ‘문학이 나를 대의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같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재현’과 ‘대의’를 뜻하는 영단어는 모두 ‘representation’이다.
그런데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임을 ‘입증’하는 일은 가능할까. 영화 <김군>(2018)에서 지만원은 말했다. “광주 시민군으로 알려진 사진 속 남자는 사실 북한에서 남파된 ‘제1광수’다. 이에 반박하는 자료를 내놓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영화는 이 주장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사진 속 얼굴의 신원을 추적한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자로 나섰다. 그 증언들은 사실에 근접하거나 혹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와중에 한 증언자가 분노했다. ‘지만원이 자기 주장을 반박해보랬다고 해서, 우리가 꼭 그래야 해? 그 방식이 맞아?’
결국 영화가 도착한 ‘진실’은 좀 다른 얘기를 한다. 사진 속 얼굴의 신원은 ‘입증 가능하지 않다’는 것. 1980년 5월 당시 선봉에 선 이들은 애초에 이름, 나이, 주소 등의 사항이 국가에 탑재되지 않은 넝마주이, 부랑자, 즉 한국 사회의 ‘미등록자’였다는 것. 서로의 신원을 묻지 않음으로써 누구나 평등하게 ‘시민’의 일을 행하도록 한 것이 당시 ‘절대공동체’를 가능케 한 핵심이었다는 것.
자, 그렇다면 ‘팩트’로만 답하도록 강제하는 물음의 구조에서 ‘팩트’로 입증되지 않는 존재들은 어떻게 재현/대의될 수 있나. 소설가 박솔뫼는 어떤 “장막” 때문에 “내가 모르는 시간”이 된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을 생각하며 “그럼 무얼 부르지”라고 읊조렸다. 그리고 <김군>은 바로 그 질문, 결코 “내게 겹쳐지지 않는 시간들”을 상상하는 법에 대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