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디즈니’랜드
2019-07-10
글 : 김혜리
<존 윅3: 파라벨룸>

<존 윅3: 파라벨룸>(이하 <존 윅3>)은 자기만의 우주에 존재한다. <존 윅3>의 뉴욕은, 상점 뒤에 엄청난 무기고가 숨겨져 있고 발레단 예술감독이 러시아 비밀조직의 수장인 도시다. 암살자 네트워크는 도스 화면의 구형 컴퓨터로 관리되고 수배 현황은 칠판에 분필로 기록된다. 유리가 화면에 등장하면 반드시 박살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개는 다치지 않는다는 것도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존 윅은 맨해튼 한복판에서 아무 제지를 받지 않고 줄을 매지 않은 반려견과 달리고, 위기에 몰리자 개부터 호텔로 대피시킨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폭력은 안 된다던 친구 소피아(할리 베리)는 자신의 개가 공격받자 견아일체의 액션으로 중대 병력을 쓸어버린다. 사막에서도 식수는 개가 먼저 마신다. 1편에서 스토리를 시작하기 위해 희생한 비글 강아지 데이지에게 사과하듯.

06/17

앞서 디즈니가 기존 장편애니메이션을 실사로 리메이크하는 이유로 세 가지를 짐작했다. 첫째, 지명도가 보장하는 흥행 수입, 둘째, CG 기술의 발전, 셋째, 시대에 뒤떨어진 차별적 표현의 업데이트를 꼽았다. 세 번째 근거와 관련해 <알라딘>이 힘주어 부각시킨 것은 공주 자스민(나오미 스콧)의 변화다. 애니메이션에서 단지 원치 않은 결혼에 저항했던 자스민은 실사판에서는 왕이 되고자 한다. 밸리댄서처럼 옷을 입는 일도 없고 강제로 악당 자파에게 스킨십을 당하는 모욕도 겪지 않는다. 무엇보다 새로운 자스민은 “결코 침묵당하지 않겠어”라는 가사의 신곡 <Speechless>를 독창한다. 이 노래가 <알라딘> 오리지널곡들과 이질적이라는 점은 이미 썼다. 하지만 그보다 마음에 걸리는 바는 극중에서 <Speechless>가 배치된 맥락이다. 자스민은 자파의 명을 받은 병사들에게 끌려가다가 문득 주체성을 다짐하는 이 노래를 열창한다. 그러나 이 의미심장한 신은 자스민의 상상이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거의 아무런 결과(consequence)를 낳지 못하고 영화에서 고립된다. 결의에 찬 공주의 외침을 극중 현실에서는 아무도 듣지 못한 셈이다. 게다가 노래로 각성한 자스민이 취하는 행동은, 장군 하킴(누만 아카르)의 충성심에 호소하는 것이 고작이라 <Speechless>가 고조시킨 긴장을 흩어놓는다. 장군의 개심도 자파에게 이렇다 할 타격을 주지 못하고 흐지부지된다. 자스민은 술판의 옥좌에 오르나 영화에서 왕권을 행사하는 유일한 케이스는 왕자가 아닌 남자와 결혼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 정도다. 결과적으로 자스민의 묘사는 진보했으나 그의 성장은 <알라딘>의 이야기 전체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덧붙여질 뿐이다.

그러고 보니 디즈니에는 네 번째 동기도 있다. 그림 형제, 페로, 안데르센이 쓰거나 편집한 오래된 동화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인어공주> 등의 원본은 독점할 수 없는 퍼블릭 도메인에 속한다. 고전은 어느 영화사나 각색할 수 있다. 문제는 대중의 뇌리에 새겨진 ‘원본’이 안데르센이나 그림 형제의 책이 아니라 디즈니의 만화영화라는 점이다. 디즈니의 캐릭터 디자인, 의상, 배경, 덧붙인 조연과 에피소드, 배경은 지적 재산권에 속해 인용할 수 없다. 역으로 디즈니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대중의 의식 안에서 누려온 고전의 점유권을 갱신할 필요가 있다. 애니메이션의 디자인과 음악을 복제한 실사영화들은 오리지널과 배타적으로 동일시되는 디즈니 이미지의 유효기간을 연장해줄 터다. 생각하면 조금 무서운 노릇이다.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와 마블 슈퍼히어로를 접수하고 폭스까지 흡수한 지금, 디즈니는 현대의 설화를 독점 공급하는 공장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관객의 이익도 디즈니의 그것과 일치하란 법은 없다. 디즈니는 지금까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울 나라의 앨리스>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 <피터와 드래곤> <잠자는 숲속의 공주>(<말레피센트>) <덤보> <정글북> <알라딘>을 실사로 옮겼고 <라이온 킹> <뮬란> <크루엘라> <말레피센트2> <레이디와 트램프> <피노키오>도 1, 2년 안에 개봉을 예고하고 있다. 이중 예술적 완성도 측면에서 존재 이유를 입증하거나 참신한 해석으로 평가된 작품은 <신데렐라> <피터와 드래곤> <말레피센트> 정도다(<정글북>과 <라이온 킹>의 경우는 CG애니메이션에 가깝지만 포토리얼리스틱한 실사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묶어서 쓰기로 한다). 1990년대 디즈니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관람한 세대로서, 나는 거의 비슷하지만 비교 열위인 실사판을 최초의 <알라딘>으로, 최초의 <덤보>로 극장에서 만나는 어린 관객이 조금 불운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주먹왕 랄프>(2012) 이래 <겨울왕국>(2013), <빅 히어로>(2014), <주토피아>(2016), <모아나>(2016) 등 시대정신을 반영한 완성도 높은 오리지널 장편을 내놓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크리에이티브를 돌아보면 더욱 아쉽다. 1억달러 이상을 들여 과거 영화의 낡은 오류를 수정한 리메이크를 굳이 만드느니, 동시대적 발상으로 새롭게 쓴 서사를 쌓아가는 편이 관객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이다. 디즈니의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이들은 대부분 과거에 가부장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디즈니 고전을 사랑해 무수히 리플레이한 어린이들이었다. 영화의 수용은 극장 안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언제나 아이들과 토의할 수 있고, 불완전한 영화를 사랑하는 동시에 문제를 의식할 수 있다.

06/20

세편의 <토이 스토리> 영화에서 장난감들은 마치 부모 같았다. 노심초사 아이의 손을 놓칠까 염려하고 아이의 애정을 모든 유혹에 앞세웠다. 마침내 성장한 앤디가 대학으로 떠나자 우디(톰 행크스)와 동료들은 앤디의 엄마와 함께 빈방에서 한숨지었다. <토이 스토리4>의 우디는 말하자면 조부모의 자리로 옮겨간다. 앤디에게 장난감 일동을 물려받은 어린 소녀 보니는 티타임 소꿉놀이를 좋아하고, 카우보이 우디는 벽장에 처박혀 보내는 시간이 길다. 우디는 여전히 보니를 사랑하고 보호자의 책임감을 갖지만 직접 같이 놀 수는 없다. 다만 아이가 좀더 자주 자기를 찾아주길 바라고, 아이가 제일 사랑하는 장난감 포키(토니 헤일)를 지키는 데에서 존재 이유를 찾는다. 우디가 (쓰레기통에서 꺼내) 제공한 재료로 보니가 손수 만든 포키는 갑작스런 장난감의 정체성에 적응하지 못하고 연신 휴지통으로 투신한다. 그를 구조하기 바쁜 우디의 동분서주는 <인크레더블2>에서 미스터 인크레더블의 육아소동을 연상시킨다. 탈출한 포키를 보니에게 데려오는 길에 인생사를 들려주던 우디는 포키가 설득당하는 동안 반대로 “이것이 삶의 전부인가?”라는 자문을 품는다. 요컨대 우디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바라보며 깨닫듯, 아이가 자신과 연결돼 있지만 여생의 중심일 수는 없다는 사실에 눈뜬다. 곧이어 재회한 도자기 인형 보핍(애니 포츠)은 주인 없는 상태를 주체적으로 즐기는 모습으로 우디에게 몰랐던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3편까지 우디의 최대 공포였던 버려지고 망가지고 애정을 상실하는 일은 어쩌면 비극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없어도 보니와 장난감 동료들은 잘 지낼 수 있음을 우디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을 여행하며 어린이들을 기쁘게 하고 길 잃은 토이들을 돕는 ‘프리랜서’의 삶은, 우디의 신념과 조화로울 것이다. 여기서 <토이 스토리4>는 출산이나 입양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다음 세대에 책임감을 갖는 성인, 집 없는 아동 또는 동물들이 영구적 가정을 찾기까지 안식처를 제공하는 임시 보호자들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인다.

<칠드런 액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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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

<칠드런 액트>는 영국 고등법원 가사부의 존경받는 판사 피오나 메이(에마 톰슨)의 일과 삶이 맞닥뜨리는 사건을 그린다. 냉철하고 사려 깊은 피오나는 혼외 연애를 원한다는 남편 잭(스탠리 투치)의 폭탄 선언에 충격을 받은 채 예정된 재판에 임한다. 성년을 두어달 앞둔 소년 아담(핀 화이트헤드)과 부모가 종교적 이유로 생명 연장에 필요한 수혈을 거부해, 병원이 제기한 소송이다. 마침 “사랑에서 시작해 혐오로 끝난 무엇”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던 피오나는, 이례적으로 소년을 직접 만난 다음 판결을 내리기로 한다. 미미한 일탈이다. 중환자실의 소년은 부모쪽 변호인의 주장대로 총명하고, 본인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리처드 에어 감독은 문병 신이 끝날 때까지 피오나가 내린 결론을 밝히지 않는다. 소년과 판사가 즉흥적으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연주하는 에피소드가 있을 뿐이다. 관객은 오직 이어진 판결문에 의해 피오나가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소년에게서, 자신이 잃은 생의 열망을 예민하게 감지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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