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 시절을 살아냈을까. 얼마나 치열했을까. 독립군들의 사진을 마주했을 때 그들의 치열함이 사진을 뚫고 전해졌다.” 전작 <말모이>에선 우리의 말을 모아 나라를 지킨소시민이었고, 이번엔 칼을 들어 이 땅을 지키는 독립군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유해진은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군 황해철을 연기한다. 독립군들의 큰형 해철은 크고 묵직한 항일대도를 휘두르며 일본군을 제압한다. 휘두르는 검의 무게만큼 <봉오동 전투>에 임하는 유해진의 마음 또한 묵직할 수밖에 없었다.
-<봉오동 전투> 촬영 이후 어떻게 지냈나.
=여행을 좀 길게 다녀왔다. 워낙 <봉오동 전투>가 쉽지 않은 작업이어서 마음먹고 쉬는 시간을 가졌다.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으로 유럽에 간 김에 겸사겸사 여행을 다녔다.
-어떤 점에서 쉽지 않은 작업이었나.
=전쟁영화다 보니 폭파 장면도 많고 안전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니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시늉만 해서는 안 되는 전투 신이 많아서 처음엔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도 컸다.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비단 전투 신 때문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의 규모도 큰 데다 독립군 이야기여서 책임감이 컸겠다.
=기교가 없고 묵직한 영화, 진정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작품과 마찬가지로 해철이라는 인물 또한 포장되어 있지 않은 느낌, 감자 같고 바위같은 느낌이었다. 독립군의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보여주려면 나 역시 기교를 부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역사를 잘 전해야 한다는 무게감도 있었는데, 관객이 영화를 봤을 때 의문이나 의심이 생기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영화를 보고 ‘아, 정말 힘들게 지켜온 나라구나’라고 느낄 수 있게 일조하고 싶었다.
-<말모이> <택시운전사> <1987> 등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에 꾸준히 출연했다.
=<말모이>와 <봉오동 전투>가 비슷한 시기,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출연을 결정할 때 멈칫하진 않았다. 역사의 메신저로서의 사명감이 있었다거나 이런 영화를 해야지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좋은 이야기들이 내게 왔고, 이 이야기를 알 필요가 있는 것 같았고, 작품 자체도 재밌었다. ‘요즘 내가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에 너무 많이 출연했군’ 하면서 굳이 좋은 이야기를 피할 이유는 없었다.
-오늘 입은 의상도 역사 선생님 같다.
=자, 숙제 검사! (웃음) <봉오동 전투>에 ‘어제의 농민이 오늘의 독립군이 될 수 있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말모이> <택시운전사> <1987>까지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해온 것 같다. 가끔은 ‘내가 이렇게 소시민이나 숨겨진 영웅들을 대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봉오동 전투>의 해철도 칼을 쓰고 거친 모습이라는 것만 다를 뿐 기존에 연기한 인물들과 같은 맥락에 놓인다. 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마음, 말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노력이 비슷한 것 같다.
-해철의 무기는 항일대도다. 큰 칼을 자연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액션을 위한 액션은 피했다. 생존을 위한 칼짓이고 칼솜씨다. 거기에 테크닉이 들어가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투박하게 베어버리고 투박하게 막아내고. 생존을 위해서 칼을 휘두른다. 내 무술 대역을 정두홍 무술감독님이 맡았는데, 원신연 감독님이 그런 말을 하더라. 정두홍 무술감독님이야말로 기교가 안 들어간 무술을 하는 분이라고. 또 칼 쓰는 장면을 좀더 생동감 있게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셀프캠’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한손엔 칼을, 또 다른 손엔 카메라를 들고 직접 찍은 장면이 있다. 뿌듯하고 재밌는 작업이었다.
-능선을 타거나 숲속을 뛰어다니는 장면이 많다. 있는 힘껏 뛰는 게 느껴지더라.
=적을 유인하거나 적에게 쫓기는 상황인데 꼼수를 부리면 안 되지 않나.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뛰었다. 정말 원 없이 뛰었다. (웃음)
-<삼시세끼>에 이어 <스페인 하숙>까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 유해진이 아닌 보통 사람 유해진의 모습도 꾸준히 만날 수 있었다.
=차승원씨나 나영석 PD나 서로 보여주고자 하는 색깔과 방향이 같았고, 출연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삼시세끼>나 <스페인 하숙>은 어떤 모습을 의식해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거의 반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있다. 그래서 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다.
-차기작은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다. 로봇으로 출연한다던데.
=결과적으로는 로봇의 목소리로만 나올 텐데, 실제로는 로봇의 동작을 표현하는 모션 캡처까지 하고 있다. 현장에서 센서가 부착된 옷을 입고 연기한다. 제작사에선 목소리 출연만 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러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더라. <봉오동 전투> 이후 내 얼굴이 나오는 영화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