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봉준호 / 출연 송강호, 김상경, 김뢰하, 박해일 / 제작연도 2003년
과거 자신이 담당했던 사건 현장을 찾은 형사에게 한 소녀가 말한다. “어떤 아저씨가 옛날에 여기서 자기가 했던 일이 생각나서 진짜 오랜만에 한번 와봤다 그랬는데….” 영화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대사다.
2004년 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적한 샌프란시스코 히피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평소 자주 가던 레코드숍에 갔다. 신기한 제3세계 영화나 잡지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살인의 추억>이라는 낯설지 않은 제목의, 쉽게 접할 수 없던 한국영화 DVD를 덥석 집어들고 집으로 향했다.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영화를 본 뒤 ‘봉준호’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박혔다. 영화를 보고 배우에게 빠진 적은 있어도 영화를 만든 감독이 궁금하긴 난생처음이었다. 그 후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팬심을 드러내며 DVD를 빌려주곤 했다.
그러던 4월 어느 날 봉준호 감독이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를 방문했을 때 한인이 운영하는 한 포차에서 그를 만났다. 웨타 디지털에서 <반지의 제왕> 시리즈 특수시각효과(VFX) 작업에 참여한 한국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해 나를 만나러온 자리였다. 당시 할리우드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한국인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웨타 이후 내가 미국에서 다녔던 회사는 티펫 스튜디오였는데 <스타워즈> <쥬라기 공원> <매트릭스> 시리즈 등의 CG 작업을 한 당대 최고의 VFX 회사 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봉준호 감독님이 <괴물>(2006)을 준비하던 시점에 가장 많이 떠올린 회사 두곳을 다닌 경험이 있는 나를 궁금해하셨을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봉 감독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업계 사람들도 모를 법한 할리우드 시각효과의 역사나 인물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는 점이다. 진심으로 놀라웠다. 이 정도로 VFX를 이해하고 있는 감독이라면 회사에 그를 소개해줘야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감독님이 당시 준비하고 있는 영화가 괴물이 나오는 영화라고 하기에 티펫에서 진행하던 <헬보이>(2004)라든지 <콘스탄틴>(2005)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연결을 해드렸지만 일이 잘 진행되지는 않았다.
한국영화의 예산으로 할리우드의 시각효과 회사와 일한다는 것은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감독님을 만나뵙고 팬심과 확신을 가지게 되니 용감한 마음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던 형이 근무하던 오퍼나지가 떠올라 그 형을 소개했고, 형을 비롯해 많은 동료들이 계약이 성사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한 끝에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그 형은 영화 <킹콩>(2005)의 젖은 털 CG를 제작해서 유명한 EVR 스튜디오의 박재욱 이사이고 지금은 내 옆자리에서 일하는 직장 동료이기도 하다.
이후 시간이 흘러 봉 감독님의 인터뷰를 읽다가 당시 웨타와 <괴물> CG작업이 예산 문제로 결렬되고 힘들어하셨다는 대목을 보고 너무 놀랐지만, 거장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아 팬으로서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다. 이후 박재욱 이사는 <기생충>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으니 이 얼마나 재미난 인연인가. 만약 15년 전 감독님과의 첫 만남 때로 돌아간다면 “에이, 같은 영화인끼리 사인이라뇨?”라며 소탈하게 웃으시던 감독님에게 끝내 받지 못한 사인을 뒤늦게나마 받는 상상을 해본다. 이렇듯, <살인의 추억>은 내 인생의 가장 영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준 영화다.
● 구범석 VFX 할리우드 진출 1세대로 다수의 영화, 게임 분야의 프로젝트를 맡아 작업했다. 대표적으로 <반지의 제왕> <황금나침반>에 참여했으며 세계 최초 4DX VR <기억을 만나다>(2017)를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