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파브로 감독의 <라이온 킹>을 본 후 여러 질문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왜 25년이 지난 지금 <라이온 킹>을 리메이크했을까. 기본적으로 실사를 모방한 CG인 건 마찬가지인데 존 파브로의 <정글북>과 달리 동물들의 행동이 낯설고 어색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욘세가 부른 신곡 <Spirit>은 굳이 왜 필요했을까. 몇 가지는 즉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몇 가지는 숙고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남은 질문은 이거다. 1994년의 셀애니메이션을 보지 못한 이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까. 그건 셀애니메이션을 먼저 즐긴 나로선 막연히 상상해볼 뿐 결코 경험하지 못할 미지의 영역에 있는 감각이다.
무서운 영화?
존 파브로 버전으로 <라이온 킹>을 처음 접했다는 이들의 반응을 수소문해서 몇 가지 확인해본 결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루하진 않았다고 만족을 표하기도 했고, 원작에서 별반 달라진 것 없는 전개에 아쉬움을 드러낸 이들도 있었다. 그중에서 유난히 흥미로웠던 답변은 ‘무섭다’는 표현이었다. 성장한 심바가 티몬, 품바와 함께 <Hakuna Matata>를 부르며 흥겹게 달려가는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셀애니메이션에서는 리듬에 맞춰 좌우로 고개를 흔들며 나아가는 동작으로 심바의 성장을 압축적으로 그려낸다. 그런데 존 파브로의 <라이온 킹>에서는 심바와 티몬, 품바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자와 멧돼지, 미어캣이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다가 심바가 갑자기 품바를 덮쳐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는 게 무섭다는 이유였다.
이건 무엇에 더 익숙한가의 문제다. 94년의 <라이온 킹>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 장면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주목할 것이다. 하지만 기존 이미지 정보가 없는 관객이라면 좀더 익숙한 다른 이미지와 연결시키기 용이하다. 심바가 품바를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연다큐멘터리에서 숱하게 봤던 이미지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존 파브로는 <라이온 킹>을 실사화하면서 그 모델을 실제 존재하는 동물들에서 따왔다. 실제 아프리카 대초원에서 뛰어노는 동물들의 모습을 바탕으로 사실에 가깝게 재현한, 이른바 포토 리얼리스틱한 CG다. 존 파브로의 <라이온 킹>이 ‘사실적’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CG로 그려진 사자와 하이에나, 코뿔새와 비비원숭이는 현실에 존재하는 동물들과 거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다.
하지만 심바가 진짜 사자처럼 그려질수록 본래의 의도와 다르게 종종 무섭게까지 느껴지고 각 캐릭터들의 감정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존 파브로의 <라이온 킹>은 2000년대 초반 극복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CG의 언캐니 밸리(불쾌함의 골짜기)를 다시금 우리 앞에 소환해버렸다. <라이온 킹>에서 클로즈업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표정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존 파브로는, 그리고 디즈니의 경영진은 ‘리얼리티’의 방향에 대해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 안일하고 단순하게 접근했다고 해도 좋겠다. 셀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해야 하니 당연히 진짜 자연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진짜 자연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기술도 이미 확보되어 있으니 어려울 것도 없다. 문제는 ‘무엇을’ 모델로 할 것인지 방향 설정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왜 다시 만들어야 했을까
존 파브로와 디즈니의 착각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우회로를 거쳐야 할 것 같다. 21세기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경향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프랜차이즈의 확보, 두 번째는 CGI 기술의 비약이다. 규모의 경제를 지향하는 할리우드가 장르, 시리즈 다음으로 선택한 안전한 시스템이 이른바 프랜차이즈다. 일단 하나의 세계관을 학습시키고 그 안으로 들어오면 그다음은 자동적으로 속편이 갱신되는 시스템인데, 여기서 핵심은 안정적인 콘텐츠의 공급에 있다. 무수히 많은 오리지널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는 디즈니는 이런 측면에서 결정적 우위를 확보 중이다. 문제는 과거 이 오리지널 콘텐츠들을 리메이크, 실사화했을 때 그다지 메리트가 없었다는 점이다. 여러 문제가 얽혀 있지만 애니메이션과 달리 표현의 한계에 부딪친 것이 결정적이었다.
여기서 국면이 전환된 계기가 바로 CGI의 비약적인 발전이다. 첫 등장 당시 CG는 기발한 특수효과 정도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은 필름의 근본을 대체하고 있다. 오늘날 애니메이션은 실질적으로 모든 움직이는 영상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으로 확장 중이다. 바야흐로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시대, 디즈니의 기회는 거기에 있었다. 디즈니는 수많은 애니메이션 콘텐츠들을 창고에서 다시 끄집어내어 포토리얼 CG와 실사영화 기법을 거쳐 새롭게 단장시키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다른 목적도 끼어드는데, 디즈니의 실사화 프로젝트의 욕망에 대해서는 김혜리 기자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씨네21> 1211호 ‘유효기간’, 1213호 ‘‘디즈니’랜드’)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으니 여기서는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시작한 디즈니의 실사화 프로젝트는 사실 두 가지 결로 나뉜다. 하나는 <말레피센트>(2014), <신데렐라>(2015), <미녀와 야수>(2017), <알라딘>(2019), <덤보>(2019)와 같은 실사영화이고 나머지 하나는 <정글북>과 이번 <라이온 킹> 같은 애니메이션이다. CG라는 표현방식 때문에 거기서 거기처럼 보이지만 두 가지는 지향과 근본이 아예 다르다. 전자는 CG의 힘을 빌려 표현 불가능했던 것들을 실사의 영역에서 표현하는, 기본적으론 실사영화에 애니메이션을 보조장치로 사용한 경우다. 반면 존 파브로가 연출을 맡은 <정글북>과 <라이온 킹>은 포토 리얼리스틱한 CG를 기반으로 라이브 액션 시네마의 관습을 빌려와 재현한, 어디까지나 애니메이션이다. 두 가지를 혼동하고 뒤섞는 순간 지금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포토 리얼리즘에 입각한 2019년 <라이온 킹>의 CG는 매우 사실적이다. 다만 그 사실적이라는 정보의 근간은 실제 동물들의 형태, 표정, 동작에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동물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자연다큐멘터리를 볼 때 그들의 몸짓, 행동, 정황 등을 통해 감정을 유추해야만 한다. 그런데 <라이온 킹>의 동물 묘사의 근간은 실재하는 동물들이다. 그러다보니 심바, 무파사, 스카, 랄라 등 사자는 물론이고 쉔지 같은 하이에나, 코뿔새 자주, 어금니멧돼지 품바와 미어캣 티몬까지 모든 동물들의 표정을 읽어낼 수가 없다. 인간의 표정연기로 치면 그들의 눈가와 뺨, 입 위쪽의 근육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동물의 얼굴을 하고 인간을 따라 입모양만 움직이는 셈이다. 연기 못하는 배우들이 하는 더빙 드라마를 보는 듯한 거리감 내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보는 것 같다는 감상은 거기서 비롯된다.
어쩌면 존 파브로의 <라이온 킹>에서 가장 생생한 표정은 무표정일지 모른다. 심바와 랄라, 티몬과 품바가 프라이드 록을 되찾기 위해 하이에나 무리를 뚫고 침입하는 장면에서 잊기 힘든 무표정이 나온다. 하이에나 무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품바가 미끼 역할을 하는데, 품바가 누가 미끼 역할을 해야 하는 건지 혼자 신나게 떠들 때 심바와 랄라는 그냥 가만히 품바를 쳐다본다. 그런데 이 장면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다. 아마도 ‘당연히 너지’라는 심정으로 품바를 바라보는 장면일 텐데 동물들의 무표정이 의도치 않게 웃음을 던진다. 모든 표정이 딱딱하기 때문에 반대로 딱딱한 표정이 나와도 좋을 장면에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클로즈업보다 롱숏이 더 힘을 발휘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라이온 킹>의 CG는 분명 뛰어나다. 이제 웬만한 이미지는 모두 재현 가능한 영역에 이른 CG가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을 모사할 것인가, 그 타깃을 정하는 일이다. 거기서 존 파브로 감독은 ‘실사화’에 대해 심각한 착각을 해버렸다.
실사와 애니메이션, 모방 대상에 대한 착각
CG를 통한 실사화의 원리는 기존의 대상을 ‘흉내내는 것’에 있다. 무엇이든 창조하고 그릴 수 있지만 기존에 있는 특정 대상을 최대한 본래에 가깝게 모사, 재현하는 것이 현재 CG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방식이다. 실은 그건 애니메이션의 형성원리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흉내내는 대상에 따라 결과물의 성격이 바뀐다는 것이다. 초창기 CG가 사람을 닮으려 할수록 언캐니 밸리, 그러니까 낯설고 어색함을 일으킨 건 대상의 모든 정보를 옮기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CG의 본질이 애니메이션, 즉 그리는 것이라는 걸 깨닫곤 대상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실제의 이미지가 아니라 사진(혹은 필름)으로 재현된 이미지를 흉내내기 시작하며 이른바 리얼리티를 확보한 것이다. 존 파브로 감독의 전작 <정글북>이나 <혹성탈출> 시리즈의 시저 등이 그 결과물이다. 요컨대 특정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특정한 효과를 모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실제이든 아니든 혹은 착각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핵심은 대상이 아닌 감각의 모방이다.
셀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이 생생했던 건 이른바 데포르메(일부로 변형, 축소, 왜곡을 가해 대상을 표현하는 기법)를 통해 캐릭터에 딱 맞게, 적절한 과장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1994년 원작에서 스카의 테마곡 <Be Prepared>에 맞춘 뮤지컬 장면은 스카의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공간 전체로 확장시켜 캐릭터의 비열함, 음험함, 성적 매력까지 극적으로 표현해낸다. 하지만 실존하는 사자의 움직임에 갇힌 존 파브로의 <라이온 킹>은 그와 같은 효과적인 표현을 생략할 수밖에 없다. 2019년의 <라이온 킹>이 금지당한 것은 대부분 ‘실사’를 우선순위에 두고 캐릭터를 간과한 결과다. 셀애니메이션이 캐릭터의 성격에 맞춰서 선을 과장하고 색을 부여한 뒤 캐릭터를 그린 반면, 포토 리얼리틱한 CG는 실제 동물 이미지를 가져와 얼마나 진짜와 닮았냐고 자랑하는 데 그친다.
프라이드 록으로 돌아가길 주저하던 심바가 밤하늘 구름에서 아버지의 영혼을 만나는 장면을 비교해보자. 셀애니메이션에서는 아버지의 형상을 직접 보여주는 반면 CG는 거대 한 구름더미의 모호한 형상을 제시한다. 아마도 진짜 구름의 형태 속에서 심바(혹은 관객)가 보고자 하는 걸 발견할 수 있도록 (존 파브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의 경이를 포착’한 장면이겠지만 결과적으론 감정의 거리를 벌리고 애매모호한 느낌을 안기는 장면이 되고 말았다. 이건 서사의 흐름에 따른 필연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기술적으로 할 수 있으니까 해버린 장면에 가깝다. 2019년의 <라이온 킹>은 실사/애니메이션의 갈림길에서 항상 사진적 이미지를 앞자리에 둔다. 그리하여 자연다큐멘터리의 생생함을 더할수록 이야기의 생기가 희미해지고 캐릭터의 움직임마저 둔해진다. 모든걸 재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초창기 CG의 착각과 실패가 떠오른다.
<라이온 킹>을 왜 지금 만들었냐고 다시 질문한다면, 보장된 상업적 성공과 기술 과시 이외의 답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엔 25년이 지난 후 <라이온 킹>이 어떤 달라진 메시지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갱신이 없다. 그저 돈이 되는 프로젝트니까, 기술적으로 할 수 있으니까 지금 할 수 있는 최상의 기술을 쏟아부어 자랑했을 뿐이다. ‘왜’가 부재하니 제대로 된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게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었다기보다는 할 수 있으니까 해버린 리메이크는 ‘굳이 왜 했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순환과 도돌이표, 안전한 자리에 안착하기 위한 변명
1994년 <라이온 킹>은 프라이드 록에서 도망쳤던 왕자가 하쿠나 마타타의 세계에 잠시 머물다 다시 귀환하는 이야기였다. <햄릿> <리처드 3세>의 틀을 빌려왔지만 죄와 존재의 내면적 갈등 등 메인 테마는 상당히 단순화되고 결국 적자에 의한 왕위 승계라는 보수적인 세계관 아래 수렴된다. 모티브가 된 작품들이 고뇌에 초점을 맞췄다면 <라이온 킹>은 이른바 대자연의 ‘생명의 순환’이라는 테마로 모든 갈등을 환원시킨다. <라이온 킹>은 전체 서사 구조마저 순환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프라이드 록의 계승식에서 출발한 영화가 다시 프라이드 록의 계승식으로 마무리될 때 차이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완벽한, 혹은 멈춰버린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프리카의 거대한 자연은 그렇게 순환한다’, 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거기에 인간의 드라마를 끼워넣은 순간 여러 가지 불편한 충돌들이 발생할 수 있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1994년의 <라이온 킹>은 그런 충돌들을 다 무시하고 프라이드 록의 권위 아래 무릎 꿇린 영화였다. 스카와 하이에나를 배척하고, 하쿠나 마타타도 부정하면서 끝나는 엔딩. 그리고 이 점은 2019년 <라이온 킹>도 변함이 없다.
25년이 지난 만큼 서사의 한계를 갱신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처음에 괜한 걱정까지 했었다. 시대 경향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상업적으로 반영해온 디즈니의 지난 행보를 모르지 않는 만큼, 원작에 비해 너무 달라져버리지 않길 바랄 정도였다. 내가 상상한 최대치는 랄라가 프라이드 록의 새로운 여왕이 되고, 심바가 복수를 완료한 후 적극적으로 하쿠나마타타의 세계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허무맹랑한 상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개봉한 <토이 스토리4>가 이와 유사한 구성 아래 세계관을 짜기도 했고, 성장이라는 테마에 집중했을 땐 오히려 차이와 반복을 드러내는 정석에 가까운 선택지다. 하지만 존 파브로의 <라이온 킹>은 생명의 순환이라는 테마처럼 돌고 돌아 원래 자리에 머무는 쪽을 선택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갱신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야기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자신을 갱신해야 한다. 무한히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도 사이클을 돌 때마다 조금씩 변모해나가기 마련이다. 디즈니는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 하되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바꾸는 것만으로 많은 차이를 발생시킬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라이온 킹>은 실사가 아니라 실사를 모방한 애니메이션이다. CG가 여전히 애니메이션, 그려진 것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기술에만 방점을 찍고 매달릴 때 이미 진즉에 극복됐다고 착각했던 ‘언캐니 밸리’들이 되살아난다. 이미 예고된 재앙인 <소닉> 실사판이나 <캣츠> 실사판처럼 말이다.
존 파브로 감독은 <라이온 킹>이 영화냐 애니메이션이냐는 질문에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마법 같다. 우리는 새로운 매체를 발명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CG와 함께 본격적으로 열린 디즈니의 시대,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구분이 무력해진 시대를 살고 있다. 디즈니는 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던 스튜디오에서 이젠 스스로 동화의 원형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는 중이다. 동시에 그런 이유로 끊임없이 과거의 자신과 투쟁하고 스스로를 갱신해야 할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라이온 킹>은 그런 디즈니의 실사화 프로젝트의 정점이자 갈림길에 서 있는 영화다. <라이온 킹>은 영화인가, 애니메이션인가. 1994년 버전을 먼저 본 나로서는 사진을 모방한 CG의 힘을 빌린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한다. 2019년 버전을 먼저 본 관객은 전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그들, 새롭고 젊은 관객의 생각이 궁금하다. 무엇을 뿌리로 삼고 무엇을 모방할 것인가, 아마도 미래의 영화에 대한 힌트는 거기에 있을 것 같다. 이것이 또 다른 도약의 전환점이 될지, 아니면 다시 한번 기본으로 돌아가는 숙고의 계기가 될지, 그것도 아니면 이것조차 거대한 순환의 일부에 불과할지 상상하다보면 이 밋밋한 왕의 귀환도 꽤 흥미롭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