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일본의 문화비평가 우노 쓰네히로 - 오타쿠, 비판적 기술주의자, 언어를 만들고 발신하는 전문가…
2019-08-01
글 : 김일림 (대중문화 연구자)
사진 : 백종헌
낡은 사회 체질을 바꾸는 힘, 다음 세대에 말한다

해방 74년을 맞이했지만 최근 한일 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 하다. 일본에서 ‘젊은이들의 오피니언리더’로 불리는 우노 쓰네히로가 마침 7월 20일 열린 서울상상산업포럼 강연차 방한했다. 우노 쓰네히로는 ‘제로연대의 상상력’을 논하며 2008년 일본의 비평 공간에 등장한 인물이다. 마흔살이 된 지금도 여전히 ‘낡은 세대’를 비판하고 있지만 그를 기존의 틀로 분류하고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서브컬처 비평가로서 극우 만화가나 자유민주당 정치가와도 함께 책을 펴내는가 하면, 역사수정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극우세력의 비난을 받고 출연하던 TV프로그램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우노 쓰네히로는 전쟁을 반대하면서도 헌법 9조 개정을 주장한다. 어쨌든 기존 잣대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현실을 바꾸는 힘으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상상력과 테크놀로지다. 때문에 테크놀로지 관련 기획서를 발행하고 작은 공동체를 조직해서 젊은이들과 꾸준히 대화를 시도한다. 그가 추구하는 가치는 낡음보다 ‘새로움’, 거대함보다 ‘작음’,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 아니라 ‘실행성’이다. ‘젊은 일본인’을 표방하는 1978년생 우노 쓰네히로의 생각을 들어봤다.

-본인의 정체성을 뭐라고 생각하나.

=역시… 오타쿠라고 본다. 오타쿠, 비평가, 그리고 미디어 프로듀서.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2008년에 출판한 첫 저서 <제로연대의 상상력>은 일본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신 논의에서 ‘젊음’은 중요한 키워드다. 그러나 ‘젊음’은 상대적인 가치다. ‘젊음’을 구분하는 어떤 층위가 있는가.

=내가 데뷔했을 때는 20대였다. 당시에는 젊은이들의 감성을 대변하는 역할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로부터 10년 이상 흘렀고 지난해에 마흔이 되었다. 이제 젊은이들을 지원하는 쪽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 사회는 정치 분야에서도, 경제 분야에서도 젊은이들을 방치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보장제도도 젊은이들에게 매우 불리하고, 내가 주목하고 있는 대중문화를 포함하여 젊은이들이 저출산,고령화사회로 인해서 마케팅 대상으로서도 경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상상력이 미래를 만들어간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젊은이들과 연계(commit)하는 역할을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데뷔한 이래 10년 동안 많은 동업자가 젊은이들과 관계하는 걸 그만두었다. 그 이유는 사회적인 영향력도 안 되고 돈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서 도망치면 안 된다고 본다. 내 나이를 전후로 한 비평가들은 일본에서 인구분포도가 높은 40대 중반부터 70대까지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내 독자들은 거의 나보다 젊다. 대학생과 젊은 샐러리맨들이 많다. 나는 내 독자들이 소중하다.

-당신의 ‘젊음’과 당신 독자들의 ‘젊음’은 어떻게 다른가.

=내가 청년이었을 때는 일본에서 IT 산업이 성장하는 중이었다. 익명 게시판 사이트 2채널(2ch)의 창립자 니시무라 히로유키나 라이브 도어 대표였던 호리에 다카후미와 같은 기업가 스타가 있었다. 글로벌한 IT 산업과 연계함으로써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공기가 주류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국내적인(domestic) 것, 한정된 것에 얽매여 일했고 사회를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젊은이들을 내 관점으로 보면 보수화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우리 세대는 지금 젊은이들에게 “현재로서는 사회변혁에 실패했지만, 너희들은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지금 일본 젊은이들은 대기업이나 공무원으로 취업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하다. 창업을 하거나 해외로 나가서 글로벌한 업무를 하는 도전정신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이런 상황이 상당히 우려스럽다.

-사회를 바꾼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

=첫째, 정치적으로 의회 민주주의의 성숙이다. 둘째, 글로벌한 정보산업에 적응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변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본의 낡은 사회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일본은 젠더적으로도 매우 후진국이다. 아울러 아시아태평양전쟁 이전부터 이어지고 있는 집단주의, 옛 일본군에 있던 집단주의가 만연해 있다. 개인의 크리에이티브한 능력을 경시하는 경향도 있다. 이러한 낡은 사회의 체질을 바꿀 필요가 있다.

-‘전전(戰前)/전후(戰後)’는 일본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척도다. 당신이 비판하는 낡은 사회라는 건 어디까지인가.

=거품경제 시기를 말한다. 일본인은 전후 기적적인 부흥을 이뤄서 1990년대에 미국에 필적할 경제대국이 되었다. 이 사실에 자긍심을 지닌 이들이 많다. 주로 40대 후반부터 70대다. 그들이 20세기 후반에 성공했던 체험을 잊지 못하고 시대에 뒤처진 사회구조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낡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후’이다. 20세기 후반 50년간을 말한다.

-자유민주당 의원과 함께 펴낸 2012년 공저 <이런 일본을 만들고 싶다>에서 ‘국가가 폭력장치라는 걸 받아들이고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국가라는 틀을 벗어나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는가.

=자유민주당 내부 개혁파인 이시바 시게루씨와 대담하면서 한 발언에 관해서 설명하자면, 전후 일본이 국방, 안전보장에 대한 관심이 낮았기 때문에 폭력장치로서의 국가를 주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지난 7월21일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는 헌법 9조 개정을 쟁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 관심은 경기와 고용, 사회보장에 집중되어 있다. 이렇듯 국민적으로 군사와 외교를 경시하는 것이 나는 매우 우려스럽다. 개인과 공동체를 잇는 아이디어는 없다. 오히려 앞으로는 개인의 힘이 정보기술의 지원으로 여러 커뮤니티와 신중하게 거리를 두면서 관계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국가 이외의 공동체는 이미 세계에 넘치고 있지 않나. 글로벌한 정보산업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국경을 넘어서 활약하고 있다. 국적이나 소속된 기업도 자기에게 붙어 있는 태그 정도로밖에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여러 기업을 전전하면서 경력을 쌓는다. 소속된 기업이 어느 나라의 기업인지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사상은 이러한 새로운 경제 현실에 대응해야 한다.

-우익 만화가로 알려진 고바야시 요시노리와도 책을 함께 펴냈다.

=일본인은 ‘시시비비’(是是非非)라는 말을 무척 좋아한다. 아무리 입장이 달라도 각론에서 의견이 맞으면 거기에 협력한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정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개혁이 필요하다면 자유민주당이든 공산당이든 관계없다. 내셔널리스트이든 글로벌리스트든 마찬가지다. 아울러 나는 비평가인 동시에 미디어의 주최자다. 미디어는 많은 의견이 오가는 대화의 장으로서 의미가 있다. 나는 정치적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시시비비로, 필요하다면 누구와도 의견을 주고받을 것이다. <제로연대의 상상력>에서 나는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보수화를 비판했었다. 그러나 요즘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리버럴한 입장에 가까워져서 아베 신조 정권과 넷우익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반성을 나는 평가한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보나.

=전후 일본에서 보수와 리버럴은 서로 대립하는 척하면서 실은 공범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컨대 1955년부터 1993년경까지 여당인 자유민주당과 야당인 일본사회당이 양대 정당 구조를 형성했던 ‘55년 체제’ 아래서 자유민주당과 일본사회당은 표면적으로 대립했지만 실제로 일본사회당은 자유민주당이 운영하는 정부로부터 자금 원조를 받아 운영된 측면이 있다. 보수주의 여당은 ‘혼네‘(本音)를, 야당인 일본사회당은 ‘다테마에’(建前)를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유민주당은 미국의 핵우산에 숨어서 경제발전을 도모하려는 본심을 담당했고, 일본사회당은 평화주의를 주장하고 미국을 비판함으로써 국민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양쪽 모두 ‘둔감한 척하면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어른의 성숙한 태도라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있다. 나는 이러한 전후적인 입장(stance)을 비판하고 있다.

-<제로연대의 상상력>에서 ‘이야기의 회귀’를 말했다.

=인터넷이 발달해서 사람들이 데이터베이스적인 동물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하는 이야기를 믿게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게 <제로연대의 상상력>에서 내가 주장한 논지다. 이야기가 없어지거나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해서 좋아하는 이야기를 믿게 된 것에 나는 주목했다. 당시 나는 부정적인 미래로서 그렇게 썼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누구나 인터넷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발견해서 그걸 믿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야기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요시모토 다카아키(1924~2012, 일본의 문예평론가이자 사상가, 일본 전쟁 책임을 촉구하는 진보적인 글을 쓰기도 했으며, 개인과 세계의 관계, 미디어 비평과 언어론에 대한 저서를 여러 권 발간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편집자)라는 일본의 사상가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실패했지만 같은 테마에 도전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쓰카 에이지, 아즈마 히로키 같은 앞 세대 비평가들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그들과 차별되는 존재로 언급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세 가지 점에서 앞 세대와 유사하다. 첫째 대중문화를 통해 일본을 언급하는 점, 둘째 일본의 변화를 촉구하는 점, 셋째 대중문화 비평에서 출발해 사회 전체로 논의를 확대하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메이지(明治)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문학가와 문예평론가의 역할이 매우 강하게 작용했다. 급속한 근대화를 메이지 시대에 시행하는 과정에서 문학자들이 서양의 근대적인 개념, 말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를 수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경위로 문학과 문예비평의 역할이 전통적으로 강했다. 나와 같은 서브컬처, 문화비평을 하는 인간에게 사회 전체에 대해 의견을 구하는 문화가 출판사와 신문사에 있다. 그래서 내 업무 영역도 넓어졌다고 본다. 한편으로 나는 글 쓰는 입장에서는 문화비평 전문가지만, 편집자로서는 사회 전반적인 주제를 광범위하게 다루어왔다. 내 사상과 이론은 서브컬처 비평과 연구에서 생겼지만, 그걸 사회와 테크놀로지 문제로 응용함으로써 여러 문제를 다루었다. 이런 스타일은 상당히 근대 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내가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싶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비평 자체가 사회 전체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SNS의 등장이다. 아울러 소비자들이 내용은 세련되지 않을지 몰라도 비평적인 글을 쓰게 되었다. 그로 인해 상업적으로 성립하지 않게 된 것이다. 때문에 내가 일본 근대에 형성된 전통적인 비평가 스타일의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싶다. 사실 내가 데뷔했을 때부터 이미 많은 비평가들이 대학교수였고 그때도 이미 비평은 쇠퇴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비평가들은 말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했다. 서브컬처 영역에서 이 사실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서양의 말과 개념을 수입했던 일본은 20세기 후반에 서브컬처 영역에서 자국의 말을 그대로 세계에 수출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서브컬처는 일종의 문화적 역전이 일어난 장이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 말을 만들어내고 또 발신하고 있나.

=언어 전문가(言葉のプロ)로서 수용자들에게 읽고 쓰는 능력(literacy)을 제공하려고 한다. 말을 제공함으로써 창작에 자극을 주고 싶다. 개인적인 능력을 쌓은 일부 아마추어들이 SNS를 통해서 발신하지만, 언어 전문가는 말을 감정적으로 내뱉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읽고 쓰는 능력을 제공한다. 커뮤니티를 매개하고 정보를 발신한다. 공통된 것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정보를 수신하고 발신하는 리터러시다. 잠재적인 저술가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 일본 서브컬처의 가치는 뭐라고 보나.

=확장 현실적 상상력과 비판적 기술주의 정신이다.

-테크놀로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관점에서 테크놀로지에 접근하는가.

=테크놀로지는 매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사회를 바꾼다. 좋게도 나쁘게도 바꾸기 때문에 그 테크놀로지와 진지하게 마주해야 한다. 예를 들면 테크놀로지와 시장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이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최근 10년 동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테크놀로지가 무조건 세상을 좋게 한다고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많은 올드 타입의 인문학자들은 자본주의를 적으로 돌리는 데 치중해서, 지금의 테크노 캐피털리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글과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은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 사회를 결정적으로 바꾸고 있음에도 이를 과소평가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도 잘못되었다. 나는 그들이 테크노 포비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페이팔 창립자 피터 틸과 같은 가속주의도 아니고 올드 타입의 인문학 자식인과 같은 테크노 포비아도 아닌 비판적 기술주의자로 있고 싶다. 테크놀로지는 사회를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걸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게 중요하고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최근 한일 관계를 어떻게 보나.

=음. 글쎄. 다른 나라에 대해 뭐라고 말할 용기는 없고, 일본의 치졸한 내셔널리즘이 사정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일본의 유치한 내셔널리즘이 대화의 여지를 스스로 닫고 있다. 예컨대 일본 TV에서는 실제 일어나고 있는 경제 말살과 외교상 대립 문제를 제쳐두고 일본이 얼마나 훌륭한 국가이며 한국보다 뛰어난지에 대해서만 다소 확장해서 매일같이 보도한다. 거기에 넷우익, 인터넷 혐오 발화자,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기뻐하면서 코멘트를 단다. 그러나 한일 관계가 산업적인 파트너십을 잃게 되면 좋아하는 건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다. 현실적인 사고를 도외시하고 채워지지 않는 자기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옆 나라를 비난하는 움직임이 일본의 인터넷 상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은 실제 일어나고 있는 경제 말살에는 관심이 없다고 본다. 무언가 이유를 만들어서 한국을 공격하고 싶은 것이 일본 넷우익의 대부분이며, 이에 대해서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 우노 쓰네히로의 저서들

2008년 출판된 <제로연대의 상상력>은 우노 쓰네히로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지만 한국에는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 그는 2000년대를 ‘제로연대’로 명명하고, ‘제로연대적인 사회상’을 동원게임으로 규정했다. 작은 이야기들이 난립하는 형태로 사회상이 재구성되고 있다는 관점이다. 사회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서바이벌 의식을 전면에 내세운 상상력이 2000년대에 등장했고, 이러한 상상력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해도 특정 입장을 선택해야 한다는 결단주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노 쓰네히로는 이러한 결단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야기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 영역은 서브컬처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테크놀로지, 문화 등을 망라한다. 한국에는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이 발행되었다. 그 밖에 주목할 저서로 <리틀 피플의 시대> <모성의 디스토피아> 등이 꼽힌다. 테크놀로지와 상상력에 초점을 맞추어 업계의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기획서 또한 발행하고 있다. <모노즈쿠리 2.0> <앞으로의 멋을 생각해보자> 등이 그러하다. 현재 PLANETS라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동명의 잡지 <PLANETS>를 부정기적으로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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