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나서 생각하면 지워버리고 싶은 자신의 행동이나 모습,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 빨개지는 과거, 이런 일은 꼭 자기 전 가장 평온한 시간에 침실로 슬며시 침입한다. 그냥 당할 수만은 없어 발차기를 해본다.
하나, 둘! 이걸로 잠깐은 괜찮겠지만 마음에 남은 찜찜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도 이불킥을 하지 않는 밤은 없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 삼기도 하지만 그 기억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홀로 견디는 쪽이 낫다. 자신의 어떤 발자국은 공동의 자취라 시간이 지나 아무리 홀로 빗자루로 쓸어본들 그 흔적을 덮을 수가 없다.
함께 만든 창작물은 혼자 일방적으로 부끄러워하기도 뭣하다. 공동의 결과물은 어떤 이에게는 흑역사지만, 누군가에게는 뿌듯한 추억으로 남기도 하니까. 언젠가 배우 콜린 퍼스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과거에 출연했던 어느 영화를 두고 완전히 망했다고 자조하는 게 솔직하고 쿨하다 여긴 적도 있지만 이제는 영화는 혼자 만드는 작업이 아님을 깨닫고 그렇게 말했던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당신의 부끄러움을 초청한다는 부산청년영화제 작품 공모 요강을 보았다. “어디서도 상영되지 않았고 상영할 일도 없(다고 생각되)는 작품, 돈이 없어서 촬영하다 만 작품, 힘이 없어서 편집하다 만 작품, 용량이 없어서 곧 하드에서 삭제될 작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는 작품, 이외 평생 자신의 흑역사로 남을 법한 모든 작품.” 이 자격 중 하나라도 부합해야 한다는 안내였다. 그래서 부문 이름도 ‘흑역사의 밤’. 작품이 선정되면 감독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객과의 대화가 필수로 진행될 예정이라니, 말 그대로 청년 감독들의 부끄러운 작품을 함께 보고 민망함을 나누는 자리다. 영화제측은 “부끄러움은 나누면 배가되고, 소외당한 흑역사를 공개해 더욱 부끄러우면 다음에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이 행사의 취지이자 응원이라고 덧붙였다.
하드 깊숙이 잠자고 있던 오랜 흑역사 하나를 꺼냈다. 여러모로 관심을 받는 데 실패한 실험적 성격의 단편영화. 잠깐 보는 데도 ‘항마력’이 버텨내질 못할 정도인데, 지금도 어딘가 이 작품 DVD가 누군가에게 있는 걸 생각하면 이마에 작은 땀 한 방울이 맺힌다. 구교환 감독은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라고 했지만, 이 단편은 절대적으로 나만 갖고 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영화제측에서 ‘흑역사의 밤’ 부문에 초청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취소해달라고 메일을 보낼까? 아니, 흑역사를 흑역사로 인정받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흑역사를 보는 흑역사를 또 새로이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이상한 걱정에 휩싸였다. 하나, 둘! 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