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이 된 여자는 하루하루 거꾸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놓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존재하게 된 여자는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살았던 자신의 지난날을 마주한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도시 외곽의 공장에서 일하던 혜정(한해인)이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유령으로 깨어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단편 <낮과 밤>(2012), <싫어>(2015), <캐치볼>(2015)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유은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호러, 스릴러 등 여러 장르적 장치를 끌어오면서도 하나의 장르로 수렴되지 않는 독특한 영화다. 동시에 두 극단의 여성 캐릭터를 통해 청년 세대의 이슈를 예리하게 짚어내는 영화다. 단편 <모모>(2016), <나와 당신>(2016), <증언>(2018) 등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 한해인이 관계를 단절한 채 살아가다 유령이 되는 혜정을 연기하고, 영화 <악질경찰>(2018), <죄 많은 소녀>(2017), 드라마 <남자친구>의 배우 전소니가 혜정의 셰어하우스에 유령처럼 숨어지내던 효연을 연기한다. 유은정 감독과 한해인, 전소니 배우와 함께 <밤의 문이 열린다>를 작업하며 차근차근 통과해온 시간들을 돌아봤다.
-영화가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고 1년여 만에 개봉하게 되었다. 배급사가 정해지고, 개봉일이 확정되고, 제작보고회를 하고, 이 모든 과정이 감독님에겐 처음이라 낯설기도 했겠다.
=유은정_단편 작업은 영화를 완성하고 영화제에 초청받아 상영을 하면 과정이 끝나는데, 장편의 경우 그다음 과정에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 프리 프로덕션이나 촬영 및 후반작업 과정에서도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지만 배급 단계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됐다.
=한해인_나 역시 <밤의 문이 열린다>가 첫 장편이라 이런 경험이 생소하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출연한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온다고? 진짜? 그저 믿기지 않는다. (웃음)
=전소니_꼭 영화제 상영일 그 하루가 아니어도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제일 기분 좋다. 첫 영화 개봉 땐 오히려 아무것도 몰라서 떨리지 않았는데, 개봉의 과정을 경험하면서 점점 더 떨리는 것 같다.
-한해인 배우는 오디션을 통해 합류했고 전소니 배우에겐 감독님이 먼저 효연 캐릭터를 제안했다고.
유은정_소니 배우님은 사진으로 처음 봤고, 프리 프로덕션 기간에 <여자들>이 개봉해서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에서의 인상은, 캐릭터는 캐릭터대로 배우는 배우대로 그 두개가 서로 잘 살아 있는 연기를 하는 배우구나 하는 거였다. 같이 작품을 준비하던 스탭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소니 배우님에게 효연을 제안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해인 배우님은 오디션을 보기 전 지인의 영화 촬영현장에서 처음 봤다. 문혜인, 한해인 배우가 나오는 <증언>이라는 단편 현장이었는데 이상하게 눈에 들어오더라.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오디션에 지원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퍽 반가웠다.
한해인_오디션을 보러 가면 감독에게서 벽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는데 감독님은 열려 있었고 따뜻했다. 오디션 보고서 ‘되겠다’까지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찝찝함이 없었다.
-혜정과 효연 모두 청년 세대의 좌절과 분노를 집약해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감독님은 이 두 캐릭터를 두고, 혜정이 ‘나는 안 될거야’라는 스타일이라면 효연은 ‘내가 왜 안 돼?’ 하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한 적 있다. 두 인물은 상반되지만 닮아 있는 서로의 거울 같다고도 했다.
유은정_혜정과 효연 모두 누구한테 보호받지 못하고 스스로 일어서야 하는 캐릭터다. 인물을 둘러싼 환경은 비슷하지만 무언가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때 보여주는 리액션은 다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놀리면 혜정은 그 사람을 묵묵히 무시하고 넘어가지만, 효연은 자신을 놀린 사람을 한대 때려줄 것 같은 인물이다. 그렇지만 혜정의 모습에 효연이 있고, 효연의 모습에 혜정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에겐 어느 한면만 있는게 아니니까.
전소니_이 인물이 어떤 사람이다, 어떤 성격이다라고 규정하는 건 복잡한 문제 같다. 감독님이 얘기한 것처럼 사람들은 하나의 성격만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효연과 혜정 모두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고, 극복해야 할 상황이 있다. 그런데 그걸 이겨내고자 하는 반응이 달라 두 인물이 다르다고 느껴지는 것 같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서 강하게 남은 것은, 혜정은 너무 보이는 게 없는 존재, 있는 데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반면 효연은 너무나 ‘있는’ 존재였다. 여기 있다고 막 소리치는 것 같은 느낌. 그게 효연인가 보다 싶었다.
한해인_감독님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혜정이 효연과 닮은 면도 있을 거라는 힌트를 주셨다. 그걸 찾아가는 작업을 하다보니, 유령이 되고 난 혜정은 효연을 닮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던 아이가 오히려 유령이 되고 나서 비로소 무언가를 시도한다. 비로소 존재감이 솟아나온다. 그렇게 혜정과 효연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비슷한, 다른, 그 사이의 어떤 감정들
-시나리오를 읽을 땐 어떤 인물의 감정, 어느 인물의 삶의 태도에 더 이입이 되던가.
한해인_영화를 찍을 당시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들이 있었다. 임금 체불과 같은 일을 겪으면서 분노가 쌓여 있을 때라 감독님한테 효연이 이해된다고 말했다. (웃음) 비록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시도하지만 효연이 끝까지 살아남았으면 좋겠다고. 평상시엔 혜정처럼 살지만 내 안에 효연과 같은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도 응축돼 있는 것 같다.
전소니_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난 정말 효연 같은 사람은 아냐. 나랑 닮진 않았어.’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내가 저 상황엔 놓여보지 않았잖아. 저렇게 억울하고 저렇게 발버둥쳐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을 겪어보진 않았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효연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 싶더라. 처음엔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쳤던 효연이 영화가 끝나고도 너무 불쌍하게 남겨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아는 언니가 그러더라. 살인의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효연은 영혼을 지킨 채, 마지막 희망을 뺏기지 않은 채 남은 삶을 살게 된 거라고. 자신을 벼랑으로 몰아붙인 사람을 죽인다는 게 표면적으로는 복수에 성공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다 틀려버린 것은 아니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령이 된 채 부유하는 연기라거나, 극도의 불안과 분노에 사로잡힌 상태를 연기하는 것이 쉽진 않았을 것 같다.
한해인_혜정은 스스로를 고립시킨 인물이라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해야 했다. 무미건조하게 대사를 했고 색을 많이 빼려 했다. 내가 보이기보다는 영화 안에서 유령처럼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로서 존재감이 드러나야 하지 않나 하는 고민의 지점도 있었지만, 혜정이 유령처럼 남아 있어야만 이 영화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이 인물이 조용하게 존재하면서도 영화를 끌고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게 참 어려웠고 또한 이 영화의 가장 큰 목표였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 유령의 시간을 번갈아가며 혜정의 감정 변화를 보일 듯 말 듯 섬세하게 연기해야 하는 것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현재의 시간과 거꾸로 가는 유령의 시간을 시간대별로 구상하며 연기해야 했다.
전소니_어떤 감정으로 똘똘 뭉쳐 있는 인물을 연기한 적은 처음이었다. 완전히 공감하고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다 버리고 ‘난 어쩔 수 없어!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이런 믿음을 끝까지 안고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어떤 작업을 할 땐, ‘이 신은 이랬으면 좋겠다, 이렇게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이번 영화에선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효연의 불안만 안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이렇게 숨어 지내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힘든 일인지 생각했고, 그 감정이 내 몸에 배어 있어야 했다.
-팍팍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청년 세대가, 혹은 내가, 혹은 또래 친구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나.
유은정_그 세대 안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서 다른 세대와 비교가 어려울 것 같다. 다만 희망이랄까, 이렇게 살다보면 빛을 보는 날이 있겠지라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미래가 밝을 거라는 기대가 없다는 것 자체가 가엽다면 가엽다고 해야 할까.
전소니_다른 세대와 비교해 우리 세대가 특별히 더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쨌든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들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다 보니 어둡고 힘든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 같다. 세대를 떠나서, 인생을 놓고 봤을 때 20대, 30대가 흔들리고 불안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흔들리다가 안정을 찾게 되는 시기도 오겠지 하는 생각도 한다.
한해인_우리 세대의 문제를 떠나서,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안타깝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지고 있는 것 같다.
-김희천 작가의 미디어아트 <바벨>에서 유령 모티브의 영감을 얻었는데, 살아 있지만 제대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상태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는지.
한해인_삶에 대한 본질적 문제 같은데, 내가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거지라는 질문 속에서 힘이 빠질 때가 있다. 그냥저냥, 그냥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순간들 앞에서 고민이 깊어지기도 한다.
유은정_유령이라는 단어를 쓸 때 또 다른 모티브가 됐던 건 EBS에서 봤던 청년 세대에 관한 프로그램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20대 초반 청년들의 인터뷰가 있었다. 어른들은 이들에게 젊은데 왜 이런 데서 일하느냐고 말한다. 20대 청년이라면 다들 대학 다니고 회사 다닐 것처럼 생각하니까. 정작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들은 만족하며 살고 있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자신이 세상에 없는 사람, 유령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20대의 모습이 마치 없는 풍경인 것 같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할 때 사무실을 치우고 정리하는 내가 있는데도 회사의 직원들은 내가 없는 듯 회의를 하고 자신들의 일을 한다. 그 공간에서 서로간에 눈 마주침 같은 건 없다. 그런 것 또한 유령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반부터 혜정을 고학력자가 아니라 몸을 쓰는 직업군의 인물로 생각했다. 물류창고든 공장이든. 그런 상황에서 EBS 다큐멘터리를 봤고 이 설정이 괜찮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전소니_공감한다. 사람들과 교류할 때 살아 있다고 느낄 때가 많은데, 감독님 얘기를 들으니 나를 유령으로 만드는 건 사회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보고 싶지 않은 건 보려 하지 않고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 말이다.
-"내일이 없는 유령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왔던 길을 반대로 걷는다. 잠들어 있던 모든 어제의 밤을 모두 지켜본 후에야 걸음을 멈출 수 있다. 멈춰선 끝에 유령은 문 하나를 만난다. 언제든 열 수 있었지만 열지 못했던 밤의 문을.” 이러한 문학적 내레이션이 혜정의 목소리로 영화에 얹힌다"
한해인_이렇게 길게 내레이션 녹음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엔 감을 잡기 어려웠다. 어떤 톤으로 해야 하는지. 무거운 톤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녹음 들어갔을 때 감독님은 좀더 가볍게 읊어주길 바랐다. 과거의 시간을 털어내는 느낌으로 가볍게 읽어야 하는 건가, 어떻게 그 미묘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나,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전소니_나는 부럽던데. (웃음) 감독님이 쓴 너무 멋진 글을 해인 배우님 목소리로 듣는데, 이 글을 읽을 수 있어 좋았겠다, 그런 마음이 들더라. 처음 시나리오 받았을 땐 이 내레이션이 없었고, 이후 감독님이 오랫동안 고민해서 쓴 글인 것으로 안다.
유은정_시나리오 단계에선 ‘이제 거꾸로 시간이 흐른다’는 걸 알려주는 간단한 문장만 있었다. 편집 단계에서 내레이션을 다시 썼다. 정보도 전달하고 정서도 같이 전달하는 내레이션을 쓰고 싶었다.
그냥 하지 뭐!
-연기를 하며, 영화를 만들며 나의 재능을 의심했던 시기가 있나.
한해인_지금 그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야 이 일을 사랑한다고 강렬하게 느꼈는데, 그걸 느끼고 나서부터 어려워진 것 같다. 애정이 커져서인지 내 연기의 아쉬운 점도 많이 보인다.
전소니_나 역시 안 그랬던 시기를 찾는 게 빠를 것 같다. (웃음) 이젠 그 생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게 된 것 같다. 예전엔 연기의 공식 같은 걸 세워두고 싶었다. 수학의 정석처럼, 연기의 루트를 찾아 그대로 실행하고 싶었다. 그런데 연기엔 답이 없다. 수학 공식을 외우고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잘하고 싶고 열심히 하고 싶은데 답이 없으니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이젠 그 생각이 바뀌었다. 방법과 답을 정해놓고 반복하기보다, 한 작품 한 작품 만날 때마다 많이 흔들렸으면 좋겠다. 그때그때 작품이 바라는 대로 유연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유은정_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재능이 없고 이 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어도 할 수 없다. 그런 사람도 영화를 찍을 수 있어야한다. 세상에 잘하는 사람만 하란 법은 없지 않나. (웃음)
한해인_맞다, 맞다. 늘 결론은 같다. ‘에이, 그냥 하지 뭐!’ (웃음)
-앞으로의 계획은.
유은정_<미망>이란 작품을 준비 중인데 아직은 아이템 단계다. 유령과 장르 이야기를 한번 더 해보고 싶다. 이야기가 많이 변할 것 같긴 한데, 언니를 너무 사랑하는 동생이 죽은 언니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언니의 유령을 저승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전소니, 한해인_와, 너무 재밌겠다! (웃음)
한해인_올 초에 윤수익 감독의 장편영화 <폭설>을 찍었다. 거기서 파도를 타는, 서핑을 하는 인물을 연기했는데 그 작품 때문에 머리도 짧게 잘랐다. 앞으로의 계획은 <밤의 문이 열린다> 개봉을 함께 잘하는 것. 그리고 잘 버텨내는 것? (웃음)
전소니_정해진 계획은 없다. 내 작업물에 대한 애정이 커서인지 영화가 개봉하는 시기에는 다른 생각을 하기가 싫다. 영화가 개봉하고 사람들이 보러 와주고 이걸 즐기고 좋아할 수 있는 시간이 요즘은 너무 짧기 때문에 그 과정을 더 즐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