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7일 폐막한 제72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송강호가 아시아 배우로는 최초로 엑설런스 어워드를 수상했다. 독창적이고 뛰어난 재능으로 영화 세계를 풍성하게 한 배우에게 헌정하는 상으로 수잔 서랜던, 이자벨 위페르, 존 말코비치, 줄리엣 비노쉬, 에단 호크 등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더불어 영화제는 송강호의 출연작 중 <기생충>을 비롯해 <반칙왕>(2000), <복수는 나의 것>(2002), <살인의 추억>(2003)을 상영했다. <살인의 추억>을 보고 벼락을 맞은 듯 놀라 이후 <괴물>(2006)을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했던, 그러면서 “<괴물>이 그해 칸 경쟁부문에 초청받지 못한 것은 걸작을 알아보지 못하는 얼간이들이 많아서”라고 말했던 올리비에 페르가 올해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배우 송강호, 봉준호 감독과 대담을 가졌고, 이를 정리해보았다. 지난 2011년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 있는 올리비에페르는 파리1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현재 <아르테TV>의 시네마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올리비에 페르_위대한 배우이며 동시에 대형 스타인 당신은 한국의 훌륭한 감독들의 작품에 늘 등장한다. 경이로울 만큼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연기와 스크린을 꽉 채우는 존재감을 보여주는 당신은 영화 이전에 연극무대에서 활동했다.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고 배우가 되었나? 연극무대에서의 경험이 당신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송강호_시골 출신이라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기회가 적었다. 초등학생 때였나, 영화를 접했고 지금은 작고한 배우 스티브 매퀸의 연기를 보고 배우를 꿈꾸기 시작했다.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연기라는 큰 틀은 같지만 무대예술인 연극에서는 편집이 없고, 매 순간 관객과 호흡한다는 점이 다르다.
-올리비에 페르_어떻게 캐릭터를 준비하나? 의상과 연기 등 구체적으로 어떤 심리적, 육체적, 외부적 준비를 하는지 궁금하다.
송강호_봉준호 감독과 함께할 때에는 그 어떤 준비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그의 머릿속에 캐릭터의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들어 있다. (웃음) 다른 감독들과 할 때에는 대화를 많이 나눈다. 기본적으로 작품을 할 때 본능적으로 인물을 내 안에 흡수하는 식이다. 인물을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하기보다 본능과 직관으로 작품에 다가간다.
-올리비에 페르_영화 데뷔작이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다. 어떻게 함께하게 되었나.
송강호_홍상수 감독과는 서로 알고 만난 것이 아니라 경력 초반에 우연히 만났다. 당시 영화계 전반에 굉장히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작품이었지만, 솔직히 나는 무척 작은 역할에 불과했다.
-올리비에 페르_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된 <반칙왕>은 지금 보아도 무척 놀라운 작품이다. 당신의 커리어에서도 무척 중요할 뿐 아니라 한국영화로 일터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 등 한국 사회의 다양한 면면이 담겨 있다. 액션도 무척 놀랍다. 스턴트 장면까지 거의 다 소화했다고 알고 있다. 감독의 요구였는지 스스로의 선택이었는지 궁금하다. 육체적으로 엄청난 도전이었을 것 같다. 혹은 아예 선택의 여지가 없었나? (웃음)
송강호_<반칙왕>은 레슬링이라는 종목을 보여주는 스포츠영화가 아니다. 레슬링을 통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의 희망과 그들의 용기를 다룬 영화다. 주인공이 선보이는 레슬링이 기술적으로 좀 떨어지더라도, 직접 하는 것이 그 영화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감독의 요구도 아니었고, 또 내가 나서서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지만(웃음) 서로 무언의 동의가 있었다.
-올리비에 페르_<쉬리>(1999)는 한국영화 최초의 블록버스터 중 하나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홍콩영화나 미국영화의 영향이 느껴지는 액션 스릴러지만 분단 현실을 다뤘다는 점에서 한국적이다. 그만큼 야심찬 작품으로 세계적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송강호_맞는 이야기다. <쉬리>는 당시 상업적인 성공으로 한국영화의 양적인 실험 무대의 척도가 되었다. <쉬리>의 성공으로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영화의 효용가치랄까,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고 그 이후로도 비슷한 장르적 답습은 아니지만 용감하고 새로운 작품들이 시도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올리비에 페르_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영화계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더 설명해줄 수 있나? 그 이전까지 한국영화는 임권택 감독 등을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갑자기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걸쳐 박찬욱, 봉준호를 비롯한 감독들에게서 놀라운 작품들이 쏟아져나왔다. 아시아에서도 영화적으로 가장 주목할 나라가 되었고 상업영화와 작가주의 예술영화 모두 급성장했다. 당신처럼 상업영화이면서 작가주의적 영화를 연출한 경우도 있지만(웃음),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나.
송강호_사실 우리도 모른다. 갑자기 훌륭한 감독들과 배우들이 90년대 말에 나타났다. 여러 요인이 있기 때문에 무작정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1980년대 말까지 검열이 존재했다. 90년대 초 군사정권이 끝나면서 비로소 검열이 사라졌다. 당시 나는 조감독으로 일하고 있었고 박찬욱, 이창동 감독님도 이때 영화계에 등장했다. 굳이 역사적으로 끼워맞춘다면 사라진 검열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올리비에 페르_놀라운 배우와 감독들도 등장했지만 영화 자체를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새로운 제작자들도 등장하지 않았나.
=봉준호_비슷한 시기에 제작자들도 새롭고 모험적인 세대가 등장했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때 국가에서 갑자기 영화에 미치게 만드는 약을 수돗물에 탄 건지는 모르겠지만(웃음) 갑자기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너무 일반화시키는 것 같기는 한데, 널리 알려진 거장인 임권택 감독님이 도제식으로 영화를 만들며 산업 안에서 성장해 나갔다면, 새로 등장한 세대들은 시네필에서 출발한 면이 있다. 나뿐만 아니라 박찬욱, 김지운, 류승완 감독 모두 영화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고 미친 듯이 DVD를 사모았다. 우리 세대는 그랬다.
-올리비에 페르_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둘의 첫 만남은 <살인의 추억>이었고, 이때는 송강호가 이미 배우로 주목받은 후였다. 감독으로서 어떤 작품을 보고 이 배우와 함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나? 작품을 보고 반한 건지, 이미 그전에 서로 알고 지냈는지, 캐스팅을 결정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봉준호_송강호라는 배우는 이창동 감독님의 <초록물고기>(1997)를 통해 알게 되었다. 조연이었지만 매우 인상적인 깡패 역할이었다. 그야말로 극사실적인 연기에 모두가 놀랐다. 도대체 저 배우는 어디서 튀어나왔나, 싶었다. 조감독으로 일하던 시절, 그 영화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전까지 볼 수 없던 새로운 경지의 연기였다. 꼭 작품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마음속에 송강호라는 배우로 정해놓았는데, 혹시 캐스팅이 안 되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이후 그는 <반칙왕>은 물론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통해 스타가 되었고, 같은 해 개봉한 내 첫 영화 <플란다스의 개>(2000)는 박스오피스에서 처참하게 망했다. 시나리오를 건넬 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송강호_지금 데뷔작이 흥행에 실패했고, 자신이 망한 감독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당시 <플란다스의 개>는 놀라운 영화였다. 비록 관객은 외면했지만 참신하고 감각적이며 새로운 영화였다. 이런 감독이라면 꼭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살인의 추억>의 빼어난 시나리오가 나에게 왔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올리비에 페르_배우로서 정말 다양한 캐릭터를 능수능란하게 소화해왔다. 당신이 연기한 인물들간에 공통점과 연속성을 찾는다면, 서민 계층이면서 거친 성품의 소유자라는 거다. <괴물>, <설국열차>(2013)처럼 약간 제정신이 아니고 극단적인 상황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역할이다. 그게 한국 남자의 이미지 혹은 한국 사회가 남성에게 부여하고 기대하는 이미지인지 모르겠다.
봉준호_내 영화에서는 항상 주인공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 같은데 결국은 독특하고, 해결하기 힘든 미션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으로 흘러간다. 평범한 사람이 예기치 않게 독특한 상황에 휘말려드는 상황에서, 그 세계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바로 송강호다. 이웃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인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임무나 어떤 상황에 처해 발버둥치는 상황이 내 영화 속에 꼭 등장한다. 그 발버둥이 때론 코미디가 되고 때론 비극도 된다. 그처럼 희비극이 엇갈리는 와중에 송강호라는 배우를 떠올리면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로 인해 더 용감하고 과감하게 시나리오를 쓰게 된다.
송강호_정말 감사한 얘기다. 하지만 연기를 그렇게 했을 뿐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