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밤의 문이 열린다>, 다층의 결을 지나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질문들
2019-08-28
글 : 홍은미 (영화평론가)
위무의 밤들

유령이 되어서야 비로소 삶의 감각을 찾는 여자.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생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리는 여자. 말갛다 못해 텅 비어버린 얼굴을 지닌 여자. 누구의 얼굴과도 닮았고 누구와도 다른 이 여자의 이름은 혜정(한해인)이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유령처럼 살아가던 혜정이 의문의 사건으로 코마상태에 빠진 후, 극중 인물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진짜 유령이 되어 도심 외곽을 배회하는 밤의 시간을 담는다. 그리고 혜정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밤으로부터 하루하루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혜정의 삶을 생의 활기로 이끈다. 오래된 비유처럼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고 옆에 있어도 존재하는 것 같지 않은 유령처럼 살아가던 혜정이, 텅 빈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는 순간까지 영화는 끈질기게 그녀의 시간을 되돌려놓는다.

환상의 작동

이 밤의 시간들은 잔잔한 흐느낌을 머금고 있다. 간혹 명상에 잠긴 듯 고요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밤의 문이 열린다>를 세상 도처에 있는 혜정들의 헛헛한 마음을 헤아리는 감성적인 영화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면 호러와 미스터리 판타지의 장르적 요소를 차용하되 관습적인 영화의 길을 걷지 않는 이 영화의 혼종성에 매료될 수도 있다. 혹은, 익숙한 위무의 서사와 장르영화의 세부 형식들이 헐겁게 얽혀 있는 구조에 어느 순간 호기심은 잃을지라도 오히려 느슨한 형식 안에서 서정적인 무드를 유지해나가는 영화에 새로운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밤의 문이 열린다>는 <캐치볼>(2015), <밀실>(2016) 등의 단편영화에서부터 엿보이던 유은정 감독의 스릴러, 호러 장르에 대한 애착과, 현실 세계에서 체감하는 공포감과 인물들에게 갖는 공동체적인 연민의 감정이 얼기설기 엮여 있는 그물 같은 영화다. 이 그물 안에서 유영하며 인물들과 감정을 공유하든, 그물의 직조법을 찬찬히 살펴보든, 끝내 이 그물을 그냥 통과해 나오든, 그건 각자의 감응에 달려 있는 문제다. 그만큼 이 영화에선 다층적인 결이 일어난다.

그런데 <밤의 문이 열린다>는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진지한 태도 하나를 견지하고 있다. 그 진지한 태도는 여러 질문들을 파생시키며 마침내 궁극적인 질문 하나를 뱉어놓는다. 가라앉은 정조와 복합적인 장르의 형식을 통과해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질문. 바로 ‘인간됨’은 무엇이며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는 극적인 사건들이 도출해내는 윤리적인 선택에 대해 묻는 영화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질문이다. 또한 드물게 만날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많은 영화의 주인공들은 인간답게 살기를 욕망하지만, 인간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잘 묻지 않는다. 그 인물들은 제 앞의 문제들로 허덕이거나,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일쑤다. 스스로를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텅텅 비어 있고 무기력”하다고 표현하는 혜정 또한 이런 주인공들과 같은 선상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여정의 초반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혜정은 왜 유령이 되었을까? 여느 때처럼 공장에서의 노동을 마친 후 귀가한 혜정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기에 그녀는 방 안에서 칼에 찔려 의식을 잃게 된 걸일까.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치기는커녕 생활을 위해 최소한의 교류만을 유지하는 혜정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다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의 사건들은 인과론에 근거해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화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현실엔 개인의 삶을 위협하는 무수한 요소들이 잠재되어 있고 그 위협적인 요소들은 공동의 불안감을 조성한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이같은 현실의 불안감을 지지대 삼아 환상을 작동시킨다. 혜정은 상해를 입기 이틀 전 공장 동료인 민성(이승찬)으로부터 받은 사랑 고백을 단호히 거절한 바 있고, 재개발이 진행되는 외진 동네에 사는 데다 바로 전날엔 어린 소녀의 유령까지 보게 된다. 그러니깐 영화는 현실에 내재되어 있는 범죄의 가능성과 초현실적인 위해의 가능성을 하나로 엮어 사건의 전조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혜정이 왜 유령이 되어 자신이 지내온 시간을 되돌아보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

현실의 소외된 이를 상징하는 장치

판타지영화의 일차적인 욕망이 현실 세계에서 실현될 수 없는 세계를 스크린 위에 구현하는 것이라면, <밤의 문이 열린다>의 가장 큰 욕망은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다. “내일이 없는 유령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왔던 길을 반대로 걷는다”는 혜정의 시적인 내레이션은 실은 이 영화의 환상을 적극적으로 작동시키는 단초이며 소망이다. 영화 초반에 차용된 호러영화의 스타일이 혜정이 살고 있는 현실에 내재된 불안감을 효과적으로 현시하는 장치라면, 유령은 현실의 소외된 사람들을 비유하는 장치이자 동시에 감독 혹은 우리의 욕망이 투영된 환상이다. 이 영화의 전반전인 구조가 범죄수사극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음에도 결과적으로 절망감에 휘청거리지 않는 이유는, 범죄가 일어나기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려는 영화의 욕망이 판타지의 힘을 빌려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신의 무표정 하나를 깨워낼 여력조차 없던 혜정이 유령이 되어 지나간 사태를 총체적으로 관망하며 각성하고, 자신과 유대된 다른 인물들까지 죽음에서 삶으로 구출해내기 때문이다. 요컨대 혜정이 시간을 거슬러 구해낸 건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라 자신이 외면해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자책하던 수양(감소현)의 목숨이고, 평생 살인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을 효연(전소니)의 영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는 분명 자아 각성과 유대와 구원의 주제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고, 어느 때는 그 주제가 완고해서 영화가 편편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밤의 문이 열린다>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인간됨은 무엇이며 인간답게 사는 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영화가 끝내 놓지 않기 때문이다. 500만원이 없어 사채를 쓰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는 이 세상의 지독한 풍경 속에서 어떻게 서로를 위무할 수 있는지 방도를 찾아가고, 호러영화를 방불케 하는 서늘한 현실 속에서도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연대하는 것이, 공허함의 공포에 시달리며 유령처럼 살아가는 일보다 조금 더 나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은근히 피력하는 진지한 면모가 이 영화에 수줍고도 굳건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어 끌리는 것이다.

유은정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드는 데 영감을 준 여러 영화를 거론했는데, 그중에서 눈길을 끈 작품이 하나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1979)다. 누구보다 섬뜩하고 스산한 영화를 만드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이나 현실의 공포를 영화에 첨예하게 이입시키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라면 선뜻 이해가 가지만, 은밀한 소원을 실현시키는 힘이 있다는 비밀 구역을 찾아 험난한 여정을 떠나는 인물들의 이야기인 <스토커>와 이 영화는 언뜻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다르게 보면 <밤의 문이 열린다> 속 혜정의 여정은 <스토커>의 여정과 어딘가 닮아 있다. 자기 내부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않고서는, 확고한 믿음이 없이는 소망을 이룰 수조차 없는 <스토커>의 인물들과 혜정이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스토커>의 인물들이 은밀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거치듯 혜정은 하루하루의 시간을 거슬러가며 결국 밤의 문을 연다. 그곳에서 유령들의 밤은 끝이 나고, 혜정의 밤에 삶의 빛이 새어들기 시작한다. 언제나 존재했지만 가려져 있던 빛, 혜정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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