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한국영화계를 이끌어갈 신예의 탄생을 보고 있다. 해외 영화제에서 무려 25관왕을 차지한 <벌새>. 김보라 감독의 번뜩이는 연출도 있겠지만 그 속에는 김새벽과 함께 극을 이끌어간 신예 배우 박지후가 있었다. 그녀는 <벌새>에서 15살 소녀 은희를 연기하며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수많은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박지후가 이제 첫발을 내디딘 배우라면, 이미 충무로의 대세로 자리매김한 여러 선배 배우들 역시 독립영화로 이름을 알렸다. 박지후가 그 뒤를 이어가길 바라보며 화제의 독립영화에 출연, ‘포텐’을 터트린 배우들을 알아봤다.
이제훈, 박정민 <파수꾼> 기태, 베키
첫 번째는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 속 이제훈, 박정민이다. <파수꾼>은 학교폭력을 소재로 삼았지만 단편적으로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대신 촘촘히 얽힌 인물들의 심리에 집중하며 입체적인 캐릭터, 이야기를 완성했다. 소년들의 미성숙함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그들의 생태계를 시리게 담아냈다.
편집을 통해 미스터리를, 촬영을 통해 심리를 대변한 연출력도 있지만 역시 <파수꾼>을 완성한 1등 공신은 배우들. 결핍으로 인해 삐뚤어져가는 기태(이제훈)와 그로 인해 상처받는 베키(박정민 / 캐릭터 이름은 백희준이지만 극 중 대부분 별명인 베키로 불렸다)는 위태로운 긴장관계를 보여줬다. 기태가 사과를, 베키가 이를 거절하는 장면은 숨이 멎는 느낌. 이제훈은 청룡영화제 신인남우상을 수상, 박정민은 ‘제2의 송강호’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단번에 관객과 평단에게 각인됐다.
최우식 <거인> 영재
<기생충>의 주역 최우식도 화제의 독립영화 <거인> 속 소년이었다. <파수꾼>의 기태와 베키가 단단하지만 쉽게 부서지는 유리였다면, <거인>의 영재(최우식)는 이미 무너지고 있는 모래성. 책임감 없는 부모, 눈치를 주는 보호시설 원장, 어린 동생 등 영재의 주위에는 힘겨운 상황들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그러나 영재는 이를 모두 이겨낼 수 없는 마음 여린 소년. 크게 엇나가지도 못한 채 울며 기도하는 그의 모습은 탄식을 절로 불렀다. 자칫하면 신파로 빠질 수 있었지만 김태용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한 <거인>은 넘치는 것 없이 상황과 감정 등을 담아냈다. 최우식은 말간 얼굴로 벼랑 끝의 영재를 연기, 진정성 있는 캐릭터를 충실히 표현했다.
천우희 <한공주> 한공주
이미 <써니>의 신 스틸러로 상미를 연기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천우희. 그녀는 2년 뒤 첫 장편 주연작인 <한공주>를 통해 독립영화로 회귀했다. <한공주>는 여중생 집단 성폭행이라는 참담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그 진정성을 잃었다면 혹평을 넘은 비난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수진 감독은 조심스럽지만 날카롭게 이야기를 그려내며 큰 호평을 받았다. 이에 맞춰 주인공 한공주를 연기한 천우희 역시 짓누른 듯한 절제된 연기로 관객들을 마주했다. 오열하기보다는 있는 힘껏 울음을 삼키는 모습으로 강한 여운을 남겼다. 그렇게 <한공주>는 수많은 국제영화제를 휩쓸었으며, 천우희는 전도연, 손예진, 김희애 등 쟁쟁한 배우들을 제치고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눈물을 쏟으며 차근차근 전달한 수상소감에 많은 이들이 함께 눈시울을 붉히기도.
변요한 <소셜포비아> 지웅
드라마 <미생>의 감초 캐릭터 한석율을 통해 단번에 입지를 굳힌 변요한. 그가 <미생> 직후 출연한 작품이 <소셜포비아>다. 박정민과 함께한 <들개>로 이미 차세대 독립영화 스타가 된 그는 <소셜포비아>로 쐐기를 박았다. SNS 마녀사냥을 소재로 인터넷의 부정적인 단면을 낱낱이 파헤친 <소셜포비아>. 변요한은 친구 용민(이주승)과 함께 살인범을 쫓는 경찰 지망생 지웅을 연기했다. 대중의 화살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상황 속에서 이기심과 도덕심이 뒤엉키는 인물이다. 변요한은 지웅의 불안하면서도 붕 떠있는 모습을 안정적으로 그려냈다. 덕분에 결국 스스로에게 쫓기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반듯한 이미지를 자랑하지만 반전이 밝혀진 시점에는 특유의 폭발적인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전여빈 <죄 많은 소녀> 영희
소개하는 작품들 중 가장 최근의 영화다. 2018년 하반기 개봉한 <죄 많은 소녀>다. 같은 반 친구 경민(전소니)의 실종에 용의자로 지목된 영희(전여빈)의 이야기다. 영희의 특이점은 억울함에 북받쳐 다급해하지 않는다는 것. 그녀는 적극적으로 죄를 해명하지도, 그렇다고 받아들이지도 않은 채 관객들을 아리송하게 만들었다. 초점을 상실한 눈동자, 무덤덤한 표정, 이와 상반되는 극단적인 행동들까지. 전여빈은 충격적인 반전에 어울리도록 캐릭터의 디테일을 구축하며 ‘괴물 신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전여빈은 <죄 많은 소녀> 이후 아직 스크린으로 관객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준 만큼 차기작이 기대된다. 첫 상업영화 주연작인 <해치지않아>와 최민식, 한석규와 호흡을 맞춘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제)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안재홍 <족구왕> 만섭
분위기를 반전시켜보자. 마지막은 독립영화제작사 광화문시네마의 코미디 영화 <족구왕>이다. 진중하고 우울한 톤이 주가 됐던 여러 독립영화들에 비해 시종일관 발랄한 유머를 잃지 않는 작품. 답 없는 스펙의 복학생 만섭(안재홍)이 그 텐션을 그대로 유지해 학교 측에 “족구장을 만들어달라”고 외치는 내용이다. 만섭은 확실히 이전까지는 듣도 보도 못한 개성 넘치는 캐릭터. 광화문시네마는 첫 제작 영화인 <1999, 면회>의 주역이었던 안재홍을 이 매력(?) 넘치는 인물로 낙점했다. 결과는 대성공. 안재홍은 눈치 없고 찌질한 만섭을 결코 미워할 수 없게 연기하며 광화문시네마와 스스로를 단번에 급부상시켰다. 이후 그는 <족구왕>의 캐릭터성을 그대로 이어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출연하며 ‘볼매(볼수록 매력적인) 배우’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