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영상창작집단 바리터가 30주년을 맞았다. 여성주의의 영화적 실천을 표방하며 1989년부터 1992년까지 활동한 바리터는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1990), <우리네 아이들>(1990) 같은 작품을 통해 여성 노동자의 삶을 기록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이자 <거류>(2000), <경>(2009),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2017) 등을 만든 김소영 감독, <낮은 목소리> 시리즈와 <밀애>(2002), <화차>(2012) 등을 만든 변영주 감독 등이 주축 멤버였다. 지난 9월 1일,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 상영 이후 ‘바리터 30주년의 의미를 말하다’ 스페셜 토크 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를 연출한 김소영 감독, 촬영을 맡은 변영주 감독, 시나리오를 쓴 서선영 작가, 도성희 베이징연예전수학원 교수, 권은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김소연·김영 프로듀서가 참석해 바리터의 활동과 그 의미를 들려주었다.
=권은선_30년 만에 이 영화를 보니 격세지감이 이런 뜻이구나 싶다. 우선 바리터가 어떻게 창립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변영주_당시 나와 서선영 작가는 <오! 꿈의 나라>(1988), <파업전야>(1990)를 만든 영화창작집단 장산곶매 회원이었다. <파업전야>를 준비하며 취재를 다닐 때 우리는 경인지역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하고 싶었는데 내부에서 안 먹혔다. 장산곶매 대표이자 영화아카데미 1기였던 이용배 감독이 “그러면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동기 중에 김소영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를 만나봐라. 이 친구가 바로 그 유명한 페미니스트다”라며 김소영 감독을 소개해줬다. 그렇게 김소영 감독을 만나 무언가 같이 도모해보자는 얘기를 했고, 당시 충무로에 있던 칸느라는 카페에서 의기투합했던 기억이 있다.
‘바리터’라는 이름에 대하여
=김소영_바리터라는 이름은 여성의 고난을 상징하는 ‘바리데기’ 서사와 여성들이 모이는 장소로서의 ‘터’를 합해서 지었다. 발음이 베리테(v rit , 진실)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부 남성 영화인들은 빨래터라 부르기도 했다.
=서선영_빨래터뿐만 아니라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파리떼라고도 불렀다. 당시 영화 하는 여자들이 많지 않아서 영화 하는 남자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많이 가졌다. 파리떼를 만나기 위해 빨래터에 많이들 왔던 기억이 난다. (웃음)
=도성희_영화 연출을 하겠다고 했을 때 집에서 찬성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을 거다.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했겠지. 그때 은사님이 충무로 영화사에 나를 소개해줬을 때 “양갓집 규수 같은데 왜 이런 데 오셨어요?” 라는 말도 들어봤다. 바리터는 남이 하지 말라는 거 안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남이 하지 말라고 해도 저지르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권은선_<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는 바리터의 창립작품이자 한국여성민우회(이하 민우회)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어떻게 이 작품이 시작되었나.
변영주_당시 유명한 남성 독립영화인이 서선영 작가에게 그런 말을 했다. “바리터에서 연구 사업이라도 하려면 재정적 문제가 해결돼야 하지 않냐. 여자들이 모였으니 술집 같은 걸 해보면 어떻겠냐.” 그 말에 분노한 서선영 작가가 울면서 흑석동에서 이대 앞까지 걸어왔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좀더 독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민우회가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의 교육용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고, 600만원의 제작비를 지원했다. 분노 게이지가 상승한 상태에서 민우회의 제작비 600만원이 결합되면서 첫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김소영_<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의 촬영은 애초 장산곶매의 이용배 감독이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마침 <파업전야>(1990) 제작을 하러 가게 되면서 공백이 생겼다. 갑자기 촬영감독이 없어진 상태에서 변영주를 보았는데, 16mm 카메라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은 촬영감독의 포스가 느껴졌다. 그렇게 변영주 감독의 촬영감독 데뷔가 이루어졌다. 당시 나는 샹탈 애커만 감독에 빠져 있었는데, 샹탈 애커만의 페미니즘 미학을 이어받아서 모든 여성들이 스탭으로 참여하는 여성주의 영화를 만들자고 목표를 세웠다.
변영주_이 영화 전까지는 스틸카메라 한번 찍은 적 없었다. (웃음)
서선영_30년 만에 영화 보고 감동받았지만 당시엔 부끄럽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민우회가 앞서 나갔다 생각하고 사무직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가 충분히 와닿지만 당시 노동운동 환경에선 이런 이야기기를 만드는 우리가 아웃사이더가 된 느낌이었다. 많은 남자 선배들이 우리에게 ‘뭘 그런 걸 찍냐’ 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왠지 모르게 위축되곤 했다.
김소영_당시 노동운동은 곧 생산직 현장 노동자의 치열한 운동을 뜻했다. 그래서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를 찍는 동안 여러 층의 압박을 받았다. 노동운동에 복무하지 왜 여성 문제를 들먹이느냐. 왜 사무직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찍느냐. 그게 이유였다.
변영주_페미니스트라는 말에 거부감이 없던 시대였다. 페미니즘이 뭔지 모르던 시기였으니까. 돌이켜보면 후회가 된다. 우리가 페미니스트이기 위해 세상 왼쪽에 있는 좌파임을 증명해야 했고, 세상 가장 독립적인 독립영화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는 사실이.
권은선_<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는 1990년 4월 민우회에서 처음 시사회를 가졌다. 그때 기사를 보면 사무직 여성이 영화를 보고 감동해서 울었다는 내용도 있다.
서선영_우리가 체감한 반응은 그것과 좀 다르긴 했다. 영화 상영은 주로 영화제나 대학 축제에서 이루어졌다. 직접 영사기와 필름을 들고 전국의 대학 축제장을 찾아다녔다. 당시 <파업전야> 같은 경우는 상영하면 늘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이슈가 되고 상영이 끝나면 단결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이 영화의 주제에 반응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땐 정말 쓸쓸했다. 오늘도 이렇게 많은 관객이 오실 줄 몰랐다. 관객이 많아서 당황했고, 호응에 또 놀랐다.
변영주_<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 이후엔 도성희 감독이 도시 빈민 여성의 현실을 고발한 <우리네 아이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부모들이 일하러 간 사이에 죽음을 맞은 혜영, 용철 남매 사건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였다. 그게 바리터의 두 번째 작품이었고, 이후 여성단체와 노동단체의 영상물을 만들고 편집하는 프로덕션 일도 했고, 새로운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고민하며 나를 비롯한 도성희, 홍형숙, 홍효숙 등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전열>(1991)에도 참여했다. 그즈음 정치적 분위기를 살펴보면, 김영삼의 3당 합당으로 정국이 경색됐고, 도성희 감독에게도 안기부가 따라붙었다. 정치적 위험을 느끼던 때 마침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도성희 감독은 중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가게 되고, 김소영 감독은 유학 가고, 나는 다큐멘터리를 계속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바리터가 ‘다시 만나요’의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도성희_혼란스러운 나날들이 이어졌고 위기의식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지쳤다. 금전적 문제도 컸다. 오랜만에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나보고 메뚜기라 그랬다. 냉장고의 음식을 쓸어간다고. 돈도 없지, 직장도 없지,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한 상황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지쳐 있는 게 보였다. 그럼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까. 그렇게 각자 다음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김소영_<전열> 이후 변영주 감독은 영화사 보임을 만들어 <낮은 목소리> 3부작을 만들었고, 김영 PD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생기기도 전인 1993년에 ‘페미니즘영화제’를 만들었다. 그 바통을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는데, 바리터는 해체됐지만 1997년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만들어지면서 프로그램 디렉터로, 감독으로 다시 모일 수 있었다.
변영주_지금의 여성영화인단체와 비교하면 우리는 훨씬 결기가 없었던 것 같다. 난 이런 영화를 좋아해. 넌 이 영화 봤니? 이런 영화 만들고 싶지 않아? 이런 이야기를 어떤 편견도 없이 공유할 수 있던 공간이 바리터였고 그 때문에 우리가 바리터를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굳이 말하자면 ‘우정과 신뢰’.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며 영화를 찍었지만 단 한번도 누구 탓을 하거나 투덜대지 않았다. 우리의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무거운 16mm 카메라도 들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엉망이었겠나. 그런데도 김소영 감독은 화 한번 안 냈다. 대신 콘티를 더 단순하고 명확하게 고쳤다. (웃음) 아직도 김소영 감독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영주야, 혹시 팬(panning shot) 같은 거 할 수 있겠니?” “그렇게 찍기는 힘들 텐데.” “그렇겠지?” 이런 게 일종의 우정이 아니었겠나. 그렇게 영화를 만들고 버티는 게 우리의 일이라 생각했다. 1980년대 말,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는 대한민국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얘기되던 그때.모든 단체에서 ‘딸들아 일어나라’라는 노래를 페미니즘 노래처럼 불러젖히던 그때. ‘우리도 정말 왼쪽이에요’라면서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던 그때. 사실 우리는 누구보다 자유로웠고 누구보다 래디컬했다. 그게 바리터였다.
다시 만난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
서선영_우리는 많이 즐겼다. 행복했고 자유로웠다.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곳에서 굳이 참으며 있을 필요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곳,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바란다. 우리도 모여 있을 때 힘이 생겼다. 나에게 힘을 주는 사람들과 즐겁게 영화를 만들고 무언가를 도모하길 기대한다.
도성희_<귀부인과 승무원>(1974)을 보면서 계급과 성의 갈등을 생각하던 우리였고, 여러 이데올로기에 열려 있던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시대가 규정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시대를 깨고 나갈 수 있는 역량이 있는 경우가 있고 생각과 달리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이라고 해서 모든 생각과 다양한 미학을 영화로 다 표현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차이라면 지금은 핸드폰으로도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라는 거다.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면 그 생각이 굳건하다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본 그대로를 이야기하면 된다.
김소영_30년 만에 이 영화를 처음 봤다. 사실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를 작품으로 생각한 적 없다. 우리의 워크숍 작품이라 생각했다.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라는 영화가 내게 상기시키는 것, 바리터를 생각할 때 내 눈에 선명히 잡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변영주 감독이 현장을 누비며 <낮은 목소리>를 찍고, 도성희 감독이 중국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김영 PD가 영화를 만드는 모습들. 우리는 영화를 향해 가는 하나의 코뮌이었고, 페미니스트 코뮌이었다. 계급운동, 노동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여성주의 코뮌을 만들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살았다. 우리의 정신 혹은 유산을 이 자리를 통해 함께 나눌 수 있어 기쁘고, 우리의 시간을 기억해준다면 고맙겠다.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는 여성영상집단 바리터의 첫 작품이자 한국여성민우회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제작한 영화다. 사무직 여성 노동자 문제를 다룬 38분의 중편으로,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에선 기혼 여성 노동자의 삶을, 2부에선 미혼 여성 노동자의 삶을 그린다. 결혼 전에는 가사분담에 적극적일 것같던 남편은 결혼 뒤 그 말이 공수표였음을 증명하고, 시어머니에겐 불편한 마음으로 아픈 아이를 맡기거나 가사일을 부탁해야 하고, 회사에선 이름 대신 ‘미쓰 리’로 불리며 커피를 타고 복사를 하는 ‘커피 카피 아가씨’가 되기 일쑤다. 슈퍼우먼도 버거울 듯한 기혼 여성 노동자의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2부는 여상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 정애가 노동조합 활동으로 각성하는 이야기로, 만연한 직장 내 성희롱과 성차별에 반기를 들고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싸워온 30년 전 ‘선배’ 여성 노동자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김소영, 변영주 등 여성감독들의 초창기 활동을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자,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들이 사고를 자극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