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클로드 샤브롤 / 출연 상드린 보네르, 이자벨 위페르 / 제작연도 1995년
아주 어릴 적부터 무턱대고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모두가 흘려들었지만 스스로는 꿈을 찾았다고 뿌듯해했다. 문학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어머니와 서부영화와 팝송을 좋아하는 아버지 밑에서 취향의 중심추를 이리저리 옮기며 지내던 어느 날, 문득 영화가 마음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걸 다 할 수 있잖아!’ 인생을 뒤흔드는 걸작을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낭만적 수순이 아니라 나름대로 꾀를 내어 욕심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내가 영화를 하게 된 쑥스러운 계기다. 그때부터 단순무식하게 매일같이 비디오가게를 들락거렸는데, 마침 일어난 예술영화 붐으로 세기말 지방도시의 청소년이었던 나에게도 누벨바그영화들이 도착했다. 그 유명한 고다르와 트뤼포, 바르다와 로메르까지. 그때의 나에게 누벨바그의 영화적 권위는 무겁고 버거웠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무게를 잡고 있는 여드름쟁이 소녀에게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는 반칙처럼 여겨졌다. 맙소사. 누벨바그영화가 서스펜스를 다루다니.
30대에 들어서면서 나는 갈피를 못 잡고 휘청였다. 여전히 쉽게 찾아지지 않았던 것은 내가 왜 영화를 하고 싶은지에 대한 대답이었다. 어쩐지 영화와 나는 권태기에 접어든 것 같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도 더이상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클로드 샤브롤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묘한 상실감에 문득 그의 영화를 제대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0여년 만에 다시 보게 된 것이 바로 <의식>이다.
굳은 표정 아래 자신의 비밀을 꽁꽁 숨기고 있는 ‘소피’는 얼음 같은 여자다. 그녀는 자신이 하녀로 일하고 있는 상류층 가족들에게 비밀을 들킬까봐 전전긍긍하지만 무뚝뚝한 대처로 확실히 선을 긋는다. 마을 우체국에서 일하는 ‘잔느’는 불같은 여자다. 거침없이 생각을 말하고 움직이며 사람들의 위선을 위악적으로 깨부순다. 계급의 밑바닥, 그것도 범죄와 연루된 혐의가 있는 두 여자는 서로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 창백한 프랑스 시골의 겨울 풍경을 배경으로 드라이하게 신들을 펼쳐 보이는 영화는 두 여자의 위악적 발랄함과 부르주아 가정 구성원들의 위선이 드러나는 것을 점층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오페라를 감상하고 있는 가족과 장난치듯 엽총을 가지고 모종의 결단을 감행하는 장면부터 어두운 도로 위에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까지. 그야말로 영화가 펼칠 수 있는 서스펜스의 극단을 경험한 것 같았다. 그것도 이토록 우아하게. 클로드 샤브롤에게 경배를.
비슷하고도 다른 두 여성 캐릭터의 만남, 그리고 어디로 뻗어나갈지 모르는 전복적인 이야기. 치밀하게 짜인 대사와 장면들을 통해 내가 영화에서 그토록 다시 느끼고 싶었던 충격을 느꼈다. 내 취향의 서랍에 숨겨두었던 도발적이고 즉물적인 ‘매혹’을 이 영화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내가 그토록 찾아헤맨 ‘나는 왜 영화를 하고 싶은지’에 대한 대답의 마지막 퍼즐 하나를 발견한 것 같은 순간이었다. 예술적 의지로 스스로를 견고하게 만들고, 그걸 또다시 깨부수는 진정한 자유를 <의식>을 보며 배우고 깨달았다. 꽁꽁 싸매두었던 내 속의 판도라 상자가 열린 지금, 과연 나는 어떤 영화를 찍게 될까.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
●임오정 영화감독. 단편 <거짓말>(2009), <더도 말고 덜도 말고>(2013), <쉘터>(2015)로 주목받았고, 최근 옴니버스영화 <한낮의 피크닉>(2018) 중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를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