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언더 더 실버레이크>가 보여주는 우리의 초상
2019-09-25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그 얼굴이 서글픈 이유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추리영화로 받아들이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지는 영화다. 이 영화는 퍼즐을 맞춰가듯 단서를 하나하나 엮어서 답을 찾아내는 영화가 아니다. 샘(앤드루 가필드)이 사라(라일리 코프)를 찾아나서는 과정은 우연과 우연의 만남이 만들어낸 신비의 연속으로 메워져 있다. 샘은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 우연히 단서를 얻고 우연히 파티에 참여해 우연히 힌트를 찾는다. 음모론과 미스터리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샘의 의식의 흐름대로 영화는 자꾸만 새로운 음모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또 다른 미스터리를 뒤섞는다. 그 흐름을 좇아가다보면 샘이 마주친 인물과 사물과 공간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너무 복잡하고 질서가 없다’는 불평을 듣는다. 그런데 나는 그 불평 자체를 감독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이 의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를 쫓아가던 앨리스의 행로를 지켜보듯이, 샘의 행로를 쫓아가며 눈앞에 들이닥친 새로운 이미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 영화의 의도된 체험 방법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139분간 꿈과 환상과 무의식이 뒤섞인 샘의 여정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감각을 남기는가. 일단 우리는 왜곡된 샘의 시점에 스며들듯 이입하게 된다. 30대 백수 청년 샘은 월세를 내지 못해 관리인에게 닦달받고, 할부금을 내지 못해 차를 빼앗기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거나 돈을 구하려는 장면은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음모론과 미스터리에 천착하는 샘의 시간 속에서 ‘직업과 돈’이라는 세속적 요소들은 불청객처럼 가끔 등장할 뿐 그의 현실을 환기시키지 못한다. 현실로부터 도피한 채 꿈과 환상과 무의식의 경계 속에서 비틀거리며 폭주하는 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샘의 충만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에너지 자체에 집중하는 영화이며, 잉여의 이미지를 전부 끌어모은 과잉의 상태를 추구하는 영화다.

미스터리를 ‘생산’해내는 세상의 영화

에너지의 과잉은 영화에서 끊임없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된다. 이를테면 초반 시퀀스에서 길을 걷던 샘을 공격하듯 작은 동물의 사체가 갑작스럽게 떨어지는데, 다음 숏에서 카메라는 놀란 샘의 얼굴을 돌리 줌(돌리 아웃+줌인)으로 담아낸다. 사라진 여자를 찾아나선다는 설정을 공유하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겠지만, 그건 분명 클라이맥스에 어울릴 법한 다소 과격한 촬영기법이다. 대담하게 속도감을 조절하는 카메라워크와 갑작스러운 클로즈업숏, 인위적일 만큼 리드미컬한 컷의 연결 또한 영화의 과격함을 극대화한다. 영화 속 두 가지 괴담인 ‘개 도살자’와 ‘부엉이 가면 여인’의 상상 시퀀스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이미지 역시 과잉된 효과다.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지만 보여주고야 마는 토사물이나 대변 이미지의 잉여적 속성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다. 영화는 이처럼 무질서의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응시하며 그 이미지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를 끌어모은다. 그러니 영화를 본 뒤 혼돈이나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렇게 과잉된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영화는 샘의 현실과 꿈, 실제와 상상의 경계를 흩트려놓는다. 예컨대 코믹맨(패트릭 피슬러)을 죽인 것으로 추측되는 괴담 속 부엉이 가면 여인은 이후 시퀀스에서 샘의 실제 집에 침입한다. 노숙왕과의 기이한 만남에서 마주쳤던 코요테는 샘의 집 근처에 나타나 그를 교외의 저택으로 인도한다. 밀리센트(칼리 헤르난데스)의 죽어가는 모습은 샘이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플레이보이> 잡지의 표지와 놀랍도록 겹친다. 현실과 꿈, 실제와 상상 속에서 겹치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키워드들은 단지 샘의 혼돈이나 광기를 표현하기 위한 알레고리만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영화가 샘의 세상 아래(under)에 숨겨진 미스터리와 음모를 탐구하고 해독해내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샘의 세상 전부를 미스터리와 음모로 탈바꿈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는 것이다.

“몇 백년 전엔 숲을 거닐다가도 바위 뒤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지만, 지금은 아니지. 존재에 가치를 더하던 미스터리는 어디 있지? 요샌 미스터리가 없으니까 만들어내는 거야.” 샘의 친구(토퍼 그레이스)가 슈퍼 마리오 게임을 하다 내뱉은 말이다. 이제 세상은 미스터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해낸다. 영화 또한 적극적으로 꿈과 상상과 환상의 이미지를 샘의 현실로 끌고 들어와 미스터리를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복잡하게 꼬여버린 서사 앞에서 우리는 이제 다시는 샘의 ‘진짜 현실’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과잉된 이미지와 과격한 형식으로부터 느끼는 당혹감과 피로감은 존재의 가치를 위해 생산된 미스터리에 복무하는 현대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본능적 두려움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르겠다.

샘은 아스팔트 아래 거대한 지하공간에 스스로를 가둔 사라와 영상통화를 하며 울먹거린다. 사라는 그런 샘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이제 못 나가니까 여기서 잘 지내봐야죠”라고 말하며 밝은 표정으로 눈물을 닦는 사라의 얼굴 숏과 “여기도 마찬가지예요”라고 대답하는 일그러진 표정의 샘의 얼굴숏 사이로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 사인숏이 삽입된다. 사라가 말한 ‘여기’는 그녀가 갇혀 있는 지하공간이지만, 그 말을 듣는 샘에게 ‘여기’는 그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실버레이크로 대체된다. 사라는 자신이 저녁 담당이라 바쁘다며 통화를 끊는다. 그녀가 6개월 후 정말 제퍼슨 세븐스(크리스 간)와 함께 특권적이고 실제적인 곳으로 ‘승천’을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녀는 기지개를 켜고, 눈물을 닦고, 통화를 끊고, 저녁을 준비할 것이다. 샘은 그 사실을 받아들인 채로 집으로 돌아온다.

샘의 얼굴을 보라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강제 퇴거를 앞둔 샘은 앵무새의 울음소리에 홀린 듯 이웃집 벨을 누른다. 문을 열어준 이웃집 중년 여성과의 섹스 후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샘이 바라보는 것은 텅 빈 자신의 집이다. 영화 내내 자주 타인을 엿보던 샘은 처음으로 자신의 공간을 건너편에서 들여다본다. 존재의 가치를 위해 미스터리에 몰두하던 샘의 공간에 이제 더이상 샘이 없다. 텅 비어버린 그의 집은 유령의 공간처럼 공허하다. 지하공간 속 사라의 탈출을 걱정하던 샘이 오히려 실버레이크의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고, 불확실한 미래를 앞두고도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다던 사라와 달리 샘은 앞으로 남겨진 삶 속에서 잘 살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은 샘이라는 인물이 지닌 필연적인 아이러니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자신의 텅 빈 집을 응시하는 샘의 얼굴에서 직관적으로 감지되는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과 고독과 두려움이다. 개 도살자나 부엉이 가면 여인 같은 공포 괴담이나, 노래 속에 음험하게 메시지를 심어둔 채 사람들을 조종하는 작곡가나, 승천을 바라는 나이 든 부자와 젊은 여인들의 사이비 종교적 모임은 세상이 만들어낸 미스터리의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은 사라를 찾느라 미쳐버린 음모론자 샘의 꿈이나 상상이나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실버레이크 아래(under)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스스로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는 무의미하고 허무한 존재인 샘의 얼굴뿐이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의 마지막, 샘의 얼굴이 우리에게 서글프게 다가온다면 그건 어떠한 폭발적인 에너지와 스피드로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공허함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당연히도 우리의 초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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