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판소리 복서> 독특한 개그 코드와 판소리 음악의 결합이 주는 신선함
2019-10-09
글 : 이화정

“복싱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29살의 병구(엄태구)가 나지막이 소원을 말하자, 체육관 박 관장(김희원)은 이렇게 응수한다. “알았어. 복싱해. 전단지 다 돌리면.” 병구는 체육관 유망주 교환(최준영)과 달리 청소, 빨래같은 체육관의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처지다. 한때는 복싱 챔피언 유망주로 각광받았던 병구가 찬밥 신세가 된 데는 그에게 책임이 있다. 뇌세포가 손상되는 ‘펀치드렁크’ 판정을 받고 기억을 잃어가는 병구는, 여자친구와 함께 연마하던 ‘판소리 복싱’을 딱 한번만이라도 실현시키고 싶다. 체육관의 신입관원 민지(이혜리)는 이런 병구의 순수한 꿈을 응원한다.

세계 최초의 판소리 복싱을 꿈꾸는 병구는 과거에 발목잡히고 미래는 꽉 막혀버린 갑갑하고도 슬픈 상황에 놓여 있다. 고장난 가전제품과 연체료 고지서가 날아오는 체육관은 그런 병구와 꼭 닮은 공간이다. ‘시대가 변했다’고 바뀔 것을 종용하는 사회, 그곳에서 병구는 “고장나면 고치면 되잖아. 왜 버려!”라고 소리치지만, 그 소리는 안타깝게도 포효 대신 그저 ‘신음’에 그쳐버린다. 영화는 병구의 지금을 슬퍼만 하지 않도록 결심한 듯 경쾌하게 나아간다. 독특한 개그 코드와 판소리 음악의 결합이 주는 신선함. 더불어 병구가 실존하는 듯 복싱 자세부터 그 속내까지, 어눌한 말투까지 체화한 엄태구의 연기가 영화를 사랑스럽고도 아름답게 만든다. 단편 <뎀프시롤: 참회록>(2014)을 발전시킨, 오래 기다린 보람이 느껴지는 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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