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와 허스키 보이스로 유명한 배우 엄태구. 그가 신박한 조합의 <판소리 복서>로 돌아왔다. 단편을 장편으로 발전시킨 작품으로, 전직 프로복서 병구(엄태구)가 판소리를 하는 민지(이혜리)와 만나 재기를 꿈꾸는 이야기다. 강렬한 눈빛은 여전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엄태구는 코믹 연기까지 섞어 캐릭터를 소화했다. 점차 비중과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가며 대세 배우로 자리매김한 엄태구. <판소리 복서> 개봉과 함께 그의 이모저모를 알아봤다.
형은 엄태화 감독
엄태구의 형은 영화감독 엄태화다. 엄태구의 초창기 단역 출연작인 <친절한 금자씨>, <기담>도 엄태화 감독이 연출부로 일했던 작품들이다. 엄태화 감독은 동생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단편영화 <선인장>, <사랑니 구멍을 메워줘> 등을 연출하고 여러 상업영화 스태프로 일하며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2010년 형제는 단편영화 <유숙자>로 드디어 한 영화에서 연출, 주연으로 함께 했다. 사실 다른 배우가 엄태구의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삭발이 필요한 역할이라 하차, 엄태구가 대신 투입됐다. 이를 계기로 여러 단편, 장편 영화에서 협업했다. 덕분에 제2의 류승완, 류승범 형제로 불리기도 했다. 청춘을 소재로 한 B급 코미디 영화 <잉투기>는 아직까지 두 사람 모두의 초창기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엄태화 감독은 2016년 강동원 주연의 <가려진 시간>이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수상, 호평을 받으며 동생과 함께 상승가도에 오르고 있다.
허스키 보이스는 언제부터?
엄태구의 ‘아이덴티티’라 할 수 있는 걸걸한 목소리는 과연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10대 시절 변성기가 오면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의 허스키 보이스는 20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어른도감> 개봉 당시 SBS 라디오 프로그램 <박선영의 씨네타운>에 출연한 엄태구는 목소리 관련 질문에 “갑자기는 아니고 20대 중반부터 서서히 변했다. 소리가 답답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전화를 받으면 자다 일어난 줄 아시는 분들도 많았다”고 전했다. 최근 인터뷰에서는 이에 대한 스트레스도 털어놨다. “독특한 목소리 때문에 대사 전달이 잘 안될 경우도 있다. 지금도 계속 고쳐나는 중”이라고 말했다.
단역에서 조연으로
엄태구는 여러 작품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며 오랜 시간 무명 배우로 활동했다. 그중 정식, 정범식 감독의 <기담>에서는 일분 군인으로 등장해 처음으로 대사를 뱉었다. 그러나 너무 긴장해서 였을까. 밤새 대사를 연습했지만 계속 단어를 까먹어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엄태구는 다른 이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의상을 벗지 않고 산에서 끊임없이 대사를 외워 촬영을 완료했다. 연습을 하고 있는 엄태구를 본 등산객이 무장공비인 줄 착각해 비명을 지르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후 엄태구는 <인사동 스캔들>, <방자전>, <악마를 보았다>, <옥희의 영화>, <오싹한 연애> 등 수많은 영화들에서 단역으로 활동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경력을 쌓으며 <무서운 이야기>,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창생> 등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맡게 됐다.
본격적으로 관객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2015년 개봉한 두 영화에 연달아 등장하며.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에서는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 역할이 아니었음에도 거친 분위기를 자랑하며 눈도장을 찍었다. “늑대 다큐멘터리를 보며 캐릭터를 연구했다”고 한다. 천만영화에 등극한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에서는 조태오(유아인)의 경호원으로 등장, 사건을 뒤집는 중요한 단서로 작용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외에도 엄태구는 틈틈이 여러 단편, 독립영화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며 연기력을 다졌다.
<밀정>으로 신 스틸러 등극, 충무로 블루칩으로
그런 엄태구의 ‘포텐’이 터진 것은 역시 김지운 감독의 <밀정>. 그는 독립군을 잡아들이는 조선인 일본 경찰 하시모토를 맡아 무시무시한 카리스마를 자랑했다. 조연이었지만 특유의 목소리, 눈빛은 등장만으로도 긴장감을 자아냈다. <밀정>의 명장면 중 하나인 ‘폭풍 싸다구’는 보는 내가 다 아프고 무서울 정도. 김지운 감독은 그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섬뜩한 전율을 느끼게 하는 배우”라 극찬했으며, JTBC 예능 프로그램 <방구석 1열>에서 변영주 감독은 그의 악역 포스를 칭찬하며 “물속에서 아이를 구해내도 나쁜 생각 때문일 것 같아 보이는 배우(그만큼 대단했다는 의미)”라 말하기도 했다.
<밀정>을 계기로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 엄태구는 본격적인 충무로 블루칩으로 활동했다. 형인 엄태화 감독의 <가려진 시간>에 조연으로 출연, <택시운전사>에서는 딱 한 장면에 등장했지만 “보내드려” 한 마디로 안도와 뭉클함을 자아냈다. 이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넷펙상을 수상한 <어른도감>에서 철없는 어른 재민을 맡아 색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이외에도 2018년 추석 극장 대전의 승자였던 <안시성>, OCN 드라마 <구해줘2> 등으로 관객, 시청자들을 만났다.
소심한 성격, 바른 생활의 표본
<밀정>의 여파일까. 왠지 모르게 다가가기 어렵고 무서운 엄태구. 그러나 실제 엄태구는 오히려 그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소심한 배우다. <안시성>에 함께 출연한 조인성, 배성우는 MBC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서 이런 엄태구의 성격에 대한 재밌는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분장실에서 집으로 갈 때, 혹시 방해가 될까 봐 일일이 주위 배우들을 찾아가 귓속말로 인사를 했다고. 덕분에 오히려 놀랐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조인성은 “태구는 예능에 나온다고 하면 이틀 전부터 땀을 흘릴 것이다. 구급차를 대기시켜야 한다”고 말하며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밀정> 네이버 V LIVE에서는 노래 요청이 들어오자 마이크는 잡았으나 30초 넘게 머뭇거리기를 반복하다 결국 한 소절을 채 부르지 못했다. 워낙 부끄러움이 많아 나서서 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고. 또한 독실한 크리스천에 술도 아예 마시지 않는다. 롤 모델은 배우 김혜자 선생님이며 아직까지도 2G 폰을 사용하고 있는 초식남이다.
차기작
마지막은 엄태구의 차기작이다. 그는 현재 <신세계>, <마녀> 등을 연출한 박훈정 감독의 신작 <낙원의 밤>의 촬영에 임하고 있다. 남대문에서 활동하는 폭력배의 이야기를 그린 누아르 영화로, 엄태구는 주인공 폭력배를 맡았다. 그와 함께 <죄 많은 소녀>, <멜로가 체질> 등으로 단숨에 기대주가 된 전여빈이 주연을 맡았다. 이외에도 박호산이 엄태구가 밑은 캐릭터의 보스로 등장, 차승원이 특별 출연한다. <낙원의 밤>은 남대문 일대와 제주도를 배경으로 촬영이 진행 중이며 2020년 개봉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