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버티고> 전계수 감독, "흔들린 만큼 단단해지길"
2019-10-17
글 : 송경원
사진 : 백종헌

전계수 감독이 7년 만에 <버티고>로 돌아왔다. 두 번째 장편 <러브픽션>(2011)도 <삼거리극장>(2006)을 연출한 뒤 6년 만이었으니 이번에도 꽤 시간이 걸린 셈이다. 전계수 감독의 영화들은 하나 겹치는 것 없이 제각각이다. 도전적인 뮤지컬영화, 범상치 않은 솔직 코미디, 그리고 이번에는 경계에서 흔들리는 30대 초반 직장여성의 이야기다. 현기증 나는 고층 건물에서 일하는 30대 직장인 서영(천우희)은 위태롭다. 불안정한 비정규직, 비밀연애, 그리고 짐이 되는 가족까지 더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될 때 불현듯 창밖 로프에 매달린 남자와 마주한다. 믿고 있던 관계들이 붕괴하며 일어나는 마음속 파장을 그린 <버티고>는 자전적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계수 감독의 과거와 현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니, 이건 우리 모두가 한번쯤 겪어봤을 불안과 고독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다. 한번도 같은 스타일의 영화를 만든 적이 없는 전계수 감독은 새삼 처음으로 돌아가 영화와의 관계를 다시 설정한다. 우리는 <버티고>에 이르러서야 문득 깨닫는다. 그의 영화가 언제나 관객을 향해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있었음을. “<삼거리극장>은 ‘이건 뭐야?’ 하며 황당해했으면 하는 상상으로 만든 영화였고, <러브픽션>은 키득거리며 연애의 닭살을 함께 관람하는 영화였다.”(전계수 감독) 그 연장선에서 말하자면 <버티고>는 고독과 외로움에 흔들리는 당신을 상상하며 나도 몰랐던 내 마음속 소리를 들려주는 영화다. 그는 항상 관객의 마음을 상상한다는 면에서 대중상업영화 감독이다. 동시에 한번도 같은 스타일의 영화를 찍지 않고 모험을 즐긴다는 점에서 호락호락하지 않은 작가이기도 하다.

-<버티고>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다.

=너무 오랜만에 개봉작을 들고 와서 약간 얼떨떨하다. 부산에서 두 차례 상영했는데 한번은 사운드가 조금 아쉬웠다. 워낙에 사운드로 표현되는 것들이 중요한 영화라서. 배우들은 영화를 처음 봤는데 중간에 울기도 했다. 보통 자기 캐릭터의 시점으로 보기 마련인데 유태오, 정재광 배우가 서영의 시점으로 보게 된다고 해줘서 기뻤다. 관객의 질문도 좋았다. 마지막 장면에 대한 질문이 꽤 있었는데 뒤돌아보니 나도 시나리오 쓸 때부터 그 장면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 자문하다가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든다. 초고를 쓴 지는 오래됐지만 촬영하는 동안, 심지어 편집할 때도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었던 과정이었던 것 같다.

-<러브픽션> 이후 무려 7년 만에 돌아왔다.

=중간에 영화가 몇번 무산되기도 하면서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러브픽션> 뒤로 로맨틱 코미디가 꽤 많이 들어왔고 캐스팅까지 간 적도 있지만 그걸로 차기작을 하고 싶진 않았다. 딱 하나 원칙이 있다면 무조건 다른 방식, 다른 소재, 다른 감정을 다루겠다는 거였다. 여러 시도들이 계속 좌절되면서 우울해진 시기에 문득 예전에 썼던 <버티고> 시나리오가 생각났다. 18년 전 내가 딱 서영의 나이 무렵 일본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 쓴 시나리오다. 마침 당시의 내가 처해 있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이때까지 내가 만든 영화 중에서 가장 나와 닮은 이야기다. 영화가 되려다보니, 어떻게 보면 소품처럼 보일 수 있는 소재임에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기획부터 완성까지 1년 반 정도 걸렸다. 영화를 처음 하고 싶었을 때의 기분으로 돌아가서 기운을 차리라는 건가 싶었다.

-그 말처럼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색, 다른 감정의 영화다.

=<삼거리극장>도 코미디 기반, <러브픽션>도 장르적으론 코미디인데 이번에는 슬픔과 고독이 중심에 있는 이야기다. 오래전 박찬욱 감독님이 잡지 <키노>에서 “먼 훗날 내 지난 작품들을 쭉 보면서, 이걸 한 사람이 만들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한 필모그래피를 꾸리고 싶다”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말이 크게 와닿았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기보다는 같은 스타일의 영화는 내가 지겹고 재미없어서 못할 것 같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감정의 결이 있는데 가능하면 그걸 다 다뤄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7년마다 한편씩 해서 언제 다 다룰 수 있을까 걱정이긴 하지만. (웃음)

-2000년 초반 쓴 시나리오라고 하지만 시대가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은 이야기다. 동시대성보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타당한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여러모로 경계에 서 있는 시기에 쓴 시나리오였다. 20대를 지나 30대에 접어들 무렵이었고 2000년 밀레니엄을 맞이했으며 홀로 일본에서 이방인처럼 직장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당시 나도 고층건물 42층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벽 안에 갇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영화를 시작하자고 막 결심하던 시기의 두려움과 고민이 자연스럽게 묻어난 이야기다. 당시 제목은 ‘요코하마 러브 스토리’였고 직장여성과 창밖에서 유리를 닦는 불법체류 노동자의 사랑이 핵심이었다. 각색을 거치며 초점이 여자주인공쪽으로 좀더 옮겨왔고 사건보다는 인물의 마음속 풍경을 들여다보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설정에 기대어서 ‘그럴 수도 있지’라고 납득시키는 게 아니라 마음이 흔들리는 상태 자체를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초고 버전은 훨씬 강하고 거칠고 폭력적이고 건조하다. 감정적으로 비유하자면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 같은 이야기였는데 지금은 이와이 슌지 감독쪽에 가까운 것 같다. 공간도 인천 송도로 바뀌었다. 원래 배경을 부산으로 하고 싶었는데 제작 여건상 인천을 선택했다.

-<버티고>라는 제목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읽힌다.

=1차적으론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1958년작 <현기증>(Vertigo)에서 따왔다. 고통의 증상과 그걸 견디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를 만들고 제목을 붙인 게 아니라 제목으로부터 이야기가 뽑아져나온 경우라고 봐도 될 거다. 우리말로 ‘버틴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한국어와 영어가 결국 같은 감성을 담아내고 있는 재미있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극중 서영은 청각기관에 이상이 생겨 이명과 현기증에 시달린다. 그걸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건 큰 재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명을 통해 인물이 싸우고 있는 대상, 고통, 인식하고 있는 감각 세계 전체를 그리고 싶었다. 감각 혹은 세상이 통째로 무너지는 느낌을 표현한다고 해도 좋겠다. 솔직히 장면의 비주얼을 통해 전달하는 건 그다지 자신이 없어서 대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영화는 사운드디자인이 무척 중요하다. 시나리오상에서도 대사는 별로 없지만 지문이 무척 길었는데 대부분은 앰비언스 사운드에 대한 설명이었다. 사운드를 통해 건물 전체가 거대하고 수족관처럼 느껴지게 하고 싶었다.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이라고 해야 할까.

-서영이 이명과 어지럼증을 겪는 시퀀스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질감과 강도가 다르다.

=크게 세번의 이명 시퀀스가 나오는데 증상이 점점 심해진다. 시퀀스마다 다른 비주얼과 사운드디자인을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엔 공간의 이질적인 감각에 집중하고 두 번째 시퀀스에서는 앰비언스 사운드의 근원을 찾아가는 식으로 카메라를 배치했다. 마지막에 서영이 물을 뜨러 가는 장면에서 나오는 이명이 가장 강도가 심하다. 전체가 일그러지는 감각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었고 렌즈를 바꿔가며 왜곡된 상태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 장면은 마치 <러브레터>(1995)에서 공간이 왜곡되는 장면처럼 순수하게 카메라 기법으로 어지러움을 유발한다.

=CG를 쓸 형편이 안 되기도 했고. (웃음) 눈으로 보이는 걸 재현하는 게 아니라 감각을 전달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고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장치들을 더 주의 깊게 사용했다. 기본이랄 수 있는 미장센, 소품 등에서 시작해서 여러 앵글이나 촬영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가령 <버티고>에는 마스터숏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클로즈업과 와이드숏뿐이다. 그 급격한 앵글의 격차에서 오는 어지러운 느낌도 있다.

-유난히 배우의, 정확히는 서영의 클로즈업이 많은 영화다. 특히 천우희 배우의 옆얼굴이 인상적으로 자주 나온다.

=클로즈업은 사실 일종의 모험이다. 배우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숏이기 때문에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천우희 배우는 특히 얼굴이 작은 편이라 그걸 담으려면 더 깊게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클로즈업된 얼굴에 지루함이 없다. 클로즈업이 줄 수 있는 스펙터클을 다 받아내주는 배우다. 영화감독은 축구감독과 닮았다는 말을 종종 한다. 베스트 일레븐을 짜고 적절한 위치에 선수들을 배치하는 게 중요하다. 영화도 캐스팅이 전부다. 솔직히 천우희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싱크로율이 잘 맞아떨어질지는 몰랐다. 말하는 방식, 걸음걸이, 심지어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까지, 시나리오를 쓰면서 내가 머릿속에 그렸던 그림 딱 그대로였다. 옆얼굴을 자주 담은건 그게 경계에 선 표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른쪽과 왼쪽의 경계를 담아내는 상태랄까. 이번 영화에서는 거울의 너머와 안쪽, 창문의 안쪽과 바깥쪽 등 여러 방식으로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상태에 집중한다.

-각 캐릭터의 전사(前史)가 구체적으로 나오진 않는다. 관객이 한편으론 다소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시나리오상엔 모두 사연이 있었지만 창문을 닦은 관우(정재광)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전사를 생략했다. 서영의 현재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런 사연을 가져서 저렇게 되는구나 하는 식으로 변명을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조금 덜 친절해도 모두의 이야기로 다가가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서영이 넓은 빌딩을 헤매며 울 공간을 찾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복도 구석에서 혼자 쭈그려앉아 오열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전달한다.

=나도 좋아하는 장면이다. 티저 포스터에도 사용했다. 어울리는 공간을 찾기 위해 꽤 공을 들였다. 홀로 있을 곳을 찾아보지만 결국 햇살이 환하게 내리쬐는 복도 한구석에서 우는 장면을 롱숏으로 잡았다. 꺾어진 복도 한쪽에는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 사실상 노출된 공간이다. 그게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는 순간이라고 본다. 영화에는 9월 16일부터 11월 10일까지 날짜와 날씨를 알려주는 자막이 계속 들어가는데 이때 날씨가 매우 중요한 정보다. 맑음도 그냥 맑음이 아니라 화창, 청명, 쾌청 등 표현마다 톤이 다르다. 날씨는 서영의 마음속 풍경이자 그날 벌어질 일들에 대한 예고다. 서영이 복도 구석에서 우는 장면의 날씨는 ‘자외선주의보’였다. 개방된 복도에서 쨍한 햇살에 완전히 노출되는 것. 그게 핵심이다. 회차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적절한 날씨에 맞추기 위해 재활영한 적도 있다.

-차기작은 정해졌나.

=아직 정해진 바는 없지만 또 다른 스타일, 다른 소재가 될 건 분명하다. 이번엔 8년까진 걸리지 않을 거다. (웃음) <버티고>는 가을에 어울리는 영화다. 하지만 전형적인 멜로는 아니다. 시사 때 한 관객이 ‘둘이 함께 가서 따로 앉아서 봐야 하는 영화’라고 이야기해주셨는데 그 표현이 참 좋다. 솔직히 진정성이라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이 영화도 감정적으로 너무 파고들지 않았으면 한다. 지나고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좋은 농담처럼 기억되면 좋겠다. 내게 영화는 농담같은 일이다. 매번 최선을 다해 농담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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