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0일 목요일 밤, 마감을 끝낸 뒤 퇴근하는 길에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가 재개봉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보고 막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다시 봐도 재미있고 훌륭하며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고 밝았다. 이 통화가 발단이 되어 주말 내내 강혜정 대표와 함께 20년 만에 재개봉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기념할 만한 사람들을 모았다. 영화를 제작하고, 3년 전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진행한 김정호 꿈길제작소 대표, 당시 영화의 프로듀서였던 김성제 감독, 조용규 촬영감독과 함께 이 영화를 찍은 최영환 촬영감독, 주인공 성빈을 연기한 배우 박성빈이 그들이다. 세기말, 혜성처럼 등장해 한국영화에 신선한 바람과 기운을 불어넣었고, 류승완 감독과 배우 류승범의 등장을 알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그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참, 신작 촬영 때문에 해외에 있는 류승완 감독과 주인공 상환을 연기한 배우 류승범은 함께하지 못했다.
-얼마 만에 모인 건가.
=강혜정_각각 따로 만났지 이렇게 다 같이 만난 건 처음이다. (박)성빈씨도 20년 만에 얼굴 보는 거고.
=박성빈_2008년 출연했던 MBC 12부작 드라마 <라이프 특별조사팀>의 9화, 10화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를 끝으로 연기를 그만두었다. 한동안 방황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자영업을 하게 됐다. 머리나 식히자 싶어 시작했는데 10년 넘게 사업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웃음) 중간중간 영화인들로부터 연락이 왔지만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지 않기 위해 2년 동안 휴대폰을 없앤 적도 있다. 사업하는 동안 매일 영화 한편씩, 일주일 동안 7편을 챙겨봤다. 밤 12시에 일 끝내고 집에 오면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하루도 영화를 잊은 적이 없다.
=김성제_신작 <보고타>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최영환 촬영감독이 오늘밖에 일정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나왔다. (웃음)
=최영환_최근 <인질>을 끝내고, 류승완 감독의 신작 <모가디슈>를 촬영하러 내일 모로코로 떠난다. 류승완 감독은 촬영 준비 때문에 모로코에 먼저 가 있다.
현장의 숨겨진 이야기들
-2016년 KU시네마테크를 이끌었던 김정호 꿈길제작소 대표가 류승완 감독에게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제안하면서 시작된 재개봉인데.
=김정호_<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16mm 원본 필름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명세 감독님의 1993년작 <첫사랑>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도와드리다가 류승완 감독이 <주먹이 운다> 블루레이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참여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도 지금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름은 아무리 보관을 잘해도 시간이 지나면 훼손되는 매체이지 않나. KU시네마테크에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필름으로 상영한 적이 몇 차례 있다. 그때마다 류승완 감독과 복원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마침 한국영상자료원이 네거필름을 보관하고 있었다. 필름 한장씩 일일이 디지털로 스캔을 받았다. 사운드 복원이 큰 문제였다. 라이브톤이 보관 중이던 녹음 자료를 확보하긴 했지만 다 보관하지 않은 탓에 나머지는 새로 믹싱했다. 2015년 말 리마스터링 작업을 시작해 4K, 입체음향으로 완성하기까지 반년가량 걸렸다. 그다음 해인 2016년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돼 첫 공개됐다.
-그렇게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지난 10월 10일 재개봉했는데 봤나.
강혜정_다시 봐도 정말 훌륭하더라. 11번째 영화가 개봉한 지금,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오프닝 크레딧에 외유내강 로고가 나오는 순간 심장에 쿵 소리가 났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의 전설이자 류승완 감독에게 큰 영광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김정호_(<패싸움> VHS비디오테이프를 테이블에 올려두며) 이것이 류승완 감독이 단편 <패싸움>을 만든 뒤 배낭을 멘 채 사무실에 찾아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기획서와 함께 건네준 테이프다. (일동 우와!) 혼자서 <패싸움>을 보았다. 이 영화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만든 작품이라 강렬했다. 당시 류 감독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김성제_그때 류승완 감독은 용기백배했다. 이 자리에는 없지만 최영환 촬영감독과 함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찍은 (조)용규 형과 함께 <패싸움>을 본 기억이 난다. 당시 용규 형이 류승완 감독에게 “(<패싸움>은) 다소 뻣뻣해서 실망했다. 남은 단편들은 좀더 자유롭게 찍었으면 좋겠다”고 조언해준 것으로 알고 있다. 류승완 감독이 속이 뜨거운 사람인데 그 조언을 잘 체화해 만든 작품이 <현대인>이다. 그때 류승완이라는 사람이 너무 좋았다. 에너지가 많고 열망이 강한 모습이 내게 큰 자극을 주었다. 많은 동료들이 이 영화에 참여한 것도 그런 그의 인간적인 매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항상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대로 찍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체화해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냈다.
박성빈_이 자리에 나오기 전 강(혜정) 대표님의 전화를 받고 가족과 함께 극장에 가서 20년 만에 영화를 다시 보았다. 정말 보고 싶었는데 그동안 볼 자신이 없었다. 다시 보니 요즘 영화 못지않게 세련돼 깜짝 놀랐다.
-당시 촬영현장에서 있었던 추억 중에서 가장 먼저 뭐가 떠올랐나.
박성빈_영화 한편이 내 인생을 바꾸고, 그만큼 행복했던 시간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었다. 촬영날 오른팔에 깁스한 채 나타나 감독님에게 무척 죄송했던 기억이 난다. 촬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습하다가 오른 손등이 골절됐다.
김성제_그때 류승완 감독이 너무 속상해했다. 배우가 다쳐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하고 싶은 것도 밀어붙여야 할 것도 너무 많은데 마음처럼 안 따라주니까. 자학도 많이 했다. 물론 현장에서는 그런 마음을 철저하게 감추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는 마음으로 참여하지 않았나. 고마운 일인데 한편으로는 일을 하는 데 오히려 주춤하게 되기도 한다. 류승완 감독 뿐만 아니라 모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작업하지 않았을까. 감독으로서 하고 싶은 욕구와 실제 현장에서 할 수 있는 현실의 간극이 이 영화를 만들어낸 것 같다. 가장 기억나는 추억은 (류)승범이가 죽는 4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마지막 시퀀스에서 예기치 않은 눈이 펑펑 내렸던 일이다. 촬영장인 인덕원에서 류승완 감독이 “갑자기 눈이 내리는데 어떻게 해야 되나”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포스코 사거리에 있던 나는 앞 장면과 연결이 맞지 않음에도 “눈이 내리기 때문에 오히려 촬영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진행을 강행했다. 그때 눈이 500원짜리로 보이더라. (일동 폭소)
최영환_그때 현장에서 돈이 없다고 아주 난리났다. 원래 4부는 용규 형이 찍기로 했었는데.
김성제_맞아.
강혜정_이제는 말할 수 있다. (웃음)
최영환_1부 <패싸움>과 3부 <현대인>에서 촬영부로 참여했다. 용규 형이 4부를 찍기로 했는데 촬영 하루 전날, 류승완 감독이 전화를 걸어와 “내일 4부 촬영인데 조용규 촬영감독이 일이 생겨서 못 찍는대”라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듣고 바로 “무슨 소리야, 나는 시나리오도 안 읽었어”라고 말했다. 용규 형이 곧바로 전화를 걸어와 “네가 찍어”라고 해서 “내일 콜타임이 몇신데? 새벽? 우이씨” 하고 나갔다. (웃음)
김성제_그때 내린 눈이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이후 여러 영화를 만들면서 작은 설정들 때문에 진행하는 데 거치적댈 때가 많았는데 잘 찍으면 장면에서 그런 디테일들이 안 보인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찍으면서 그것을 처음 느끼고 배웠다. 예측하지 못한 촬영 당일의 컨디션이 영화의 완성도나 기운을 좌우하고, 행운이 깃드는 상황을 포착하는 순간이 되게 좋다. 건달 태훈(배중식)과 형사 석환(류승완)의 인터뷰를 교차로 보여주는 <현대인> 오프닝 시퀀스도 공개되지 않은 일화가 있다. 원래 박성일 프로듀서(<또 하나의 약속> 제작자)가 당시 아는 형과 함께 운영하는 노래방을 룸살롱처럼 꾸며서 찍을 계획이었다. 촬영 전날, 박성일이 아버지에게 걸려서 못 찍게 됐다고 전화가 왔다. <닥터K>(감독 곽경택, 1998) 때 프로듀서였던 서우식(<마더>(2009) 프로듀서, <옥자>(2017) 제작. 류승완 감독이 <닥터K> 연출부로 일하면서 알게 됐다.-편집자) 선배가 그의 영화과 동기들과 함께 논현동에 지하 실내 포장마차를 낸 사실이 떠올라 낮에만 촬영하기로 허락받았다. 동네 당구장 정도를 운영하는 건달 캐릭터 설정이 실내 포장마차로 바뀌면서 의상도 건달의 클리셰였던 검은색 정장에서 현실감 있는 컨셉의 의상으로 바뀌었다. 첫 촬영이던 그 장면이 영화 전체의 톤 앤드 매너가 되었다.
-그런 시도가 새로운 스타일을 만든 셈이다.
김성제_시도가 아니다. (일동 폭소) 현장에서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겼을 때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다. 최영환 촬영감독, 신재명 무술감독 등 각기 다른 욕망을 가진 에너지들이 보이지 않는 교집합을 만들어내며 좋은 영화를 찍는 걸 보면서 류승완 감독이 정말 대단하다 싶었다.
박성빈_1부 <패싸움>에서 당구장 액션 신은 액션에 대한 디렉팅이 명확하지 않고 상황을 봐가면서 만들어갔다. 반면, 4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류승완 감독님과 맞붙는 신을 찍을 때는 감독님의 디렉팅이 명확했는데 내가 따라가지 못해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김성제_충무로에서 전설처럼 떠돌던 얘기인데, 그날 촬영이 되게 힘들었다고. 그 장면을 찍을 때 분위기가 살벌했는데 조명하던 후배가 현장에서 “(류)승완 형, 이 정도 싸웠으면 그만 화해하시라”고 얘기하는 바람에 현장 분위기가 많이 풀렸다. (웃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당시 한국영화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성제_<현대인>이 1999년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상을 받았을 때 독립영화 안에서 말이 많았다. 조영각 집행위원장이 그걸 감수하고 틀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던진 화두를 논의하는 세미나나 포럼이 많이 열렸는데, 액션 장르이고 충무로 스탭들이 대거 참여한 사실을 두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게 무슨 독립영화냐고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쓴 <십 분짜리 영화 학교>처럼 찍었다는 얘기도 나왔고. 알려진 제작비는 3500만원이지만 실질적으로 쓴 제작비는 1억5천만원에 이른다. 비디오테이프 1만5천장이 팔릴 만큼 비디오 시장에서 반응이 무척 좋았다.
감독이 영화학교 출신이 아니어서 가능했던
-당시 <나쁜 영화>(1997)를 찍고 남은 자투리 필름으로 찍었다는 얘기도 있던데.
김성제_부풀려진 얘기인 것 같은데, 일부만 썼고 나머지는 새 필름으로 찍었다.
최영환_대한민국에 있는 16mm 필름 카메라는 다 써본 것 같다. 빌려왔더니 고장이 나 있고, 그만큼 카메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드라마 <미생>을 찍은 최상묵 촬영감독이 일정이 될 때마다 와서 촬영부로 도와주었다. 스탭들이 그런 식으로 시간되는 대로 와서 돕고 그랬다.
김정호_이 영화는 16mm 필름으로 찍어서 디지털로 편집한, 거의 최초의 작품이다. 당시 디지털로 편집하는 경우가 없었다. 류 감독이 몇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편집했는데 그렇게 만족해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눈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의 에너지가 구심점이 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품앗이를 했다고 본다.
김성제_이 영화는 유별났다. 장르영화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읽을 거리가 많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나온 다음해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들은 이 영화에 참여했던 스탭들을 많이 찾았다. ‘최영환이 누구야’ 그러면서. 무게 잡던 당시 독립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어깨가 가벼워서 의미가 더욱 컸다.
강혜정_그건 류승완 감독이 영화학교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당시 영화과나 한국영화아카데미를 나오지 않으면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류 감독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이야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얘기했을 때, 상대방이 그걸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지금도 그가 종종 하는 얘기가, 너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감독이 되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감독이 되고 싶어서 감독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둘은 너무나 다른 문제라는 거다. 그는 이야기를 너무 하고 싶어 했고,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영화였다. 이 영화는 개봉은 커녕 어떻게서든 완성시키겠다는 마음이 컸고, 열정과 창의력이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찍었다.
김정호_디지털 리마스터링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은데, 영화를 만들 때 활용한 자료들을 잘 보존했으면 좋겠다. 개봉할 때 자료들을 챙기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 점에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운이 좋았다. 작품에 참여한 노력과 열정을 보존하고, 거기에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다. 무엇보다 영화를 만들고 싶으면 만들어야 하는데, 작은 영화일수록 제작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김성제_작은 영화는 만들고 나면 힘이 빠진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같은 선순환구조가 지금은 힘든 현실이다.
최영환_제작비가 적으면 그 금액에 맞는 제작 시스템을 꾸려야 하는데 한국에선 스탭들에게 열정페이를 요구하는 것도 문제다.
김성제_그럼에도 최영환 촬영감독은 저예산영화에 참여할 때는 상업영화에서 받는 개런티와 다른 계약을 한다. <또 하나의 약속> 때도 그랬고.
강혜정_<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다시 나올 수 없는 사례라고 본다. 작은 영화가 꾸준히 나올 수 있는 선순환구조는 국가의 정책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운이 좋았던 건, 류승완 감독이 좋은 배우들을 꾸릴 만큼 명민했고, 김성제라는 걸출한 프로듀서가 있었으며, 김정호 대표님이 이 모든 걸 잘 지켜주셨다. 무엇보다 일하는 과정에서 스탭과 배우가 감독을 지켜준 게 가장 고맙다.
박성빈_매일 영화를 보며 좀비처럼 살다보니 아내가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친한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찍으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르면 내년 3월, 늦으면 내년 7월에 촬영을 시작한다. 목표는 하나다. 선댄스영화제에 나가보는 거다. 되든 안 되든 해보려고 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다시 영화를 하기로 마음먹은 지금, 내게 큰 용기와 원동력을 준 뜻깊은 작품이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누나, 형들을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