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산행> <밀정>, 드라마 <도깨비> 이후 약 2년간 개인적인 휴식기를 가졌던 배우 공유가 3년 만에 스크린을 찾았다. “쉼 없이 바쁘게 여러 인물을 연기하면서,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다 잠 못 이루기도 했던” 나날들 이후, 한없이 사사롭고 일상적인 충전의 시간을 거친 그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다소 의외의 선택을 내렸다. 더이상 히어로나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닌 모습으로 김지영의 파트너가 된 공유는 남편, 아버지, 아들, 회사원 등 여러 보편의 역할을 수행하는 30대 남성의 삶에 위화감 없이 스며든다. “시나리오를 읽고 내 마음이 움직인 게 확실한데, 외부의 시선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면 스스로에게 창피할 것 같았다”는 말처럼, 2019년의 공유는 자기 자신과 편안한 거리를 두면서 배우로서의 소신에 집중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시나리오의 어떤 점에 마음이 동했나.
=현실을 건드리고 있는 지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의미를 분석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감정이 끓어오르는 작품이었다. 내 가족의 모습이, 특히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울처럼 현실을 비추는 영화에 관객으로서 피로감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라도 마주하지 않으면 살면서 내 모습, 내 상황을 제대로 바라볼 일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남편 대현이 김지영의 삶 속 구성원 중 한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영화의 전체적인 짜임새도 좋았고, 주인공 김지영을 중심으로 우리가 살면서 간과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아무렇지 않게 숨쉬듯 넘어갔던 비합리적인 지점들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짚어낸다고 느꼈다. 또 배우 정유미와 여러 작품을 함께했고, 왜 그녀가 이 영화를 택했을지 나 나름대로 예상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영화 속 대현은 원작 소설보다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됐다.
=대현이 원작보다 자상하고 스위트하게 그려지는 것이 독이 되면 어쩌지하는 기우가 있었다. 사실 언제나 생활 연기에 욕심이 있었고, <82년생 김지영>은 내가 하고 싶었던 톤 앤드 무드의 영화였기에 배우로서는 연기하면서 신이 났던 작품이다. 예를 들어 같은 회사 소속인 공효진 배우의 생활 연기를 오래전부터 리스펙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배우 공유가 대현을 연기함으로써 생기는 일장일단을 의식했고, 아무래도 내 단점부터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객관화를 하는 과정에선 내가 합류하는 것이 작품에 해가 될까봐 노파심도 컸다. 그래서 기능적으로 영화에 도움이 된다면, 대현이 비난받고 미움받는 대상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시사회가 끝나고 이런저런 평을 접했을 때도 대현이 너무 착하게 나온 건 아닌지 검열하게 됐는데, 그때 돌아온 감독님의 대답이 나를 안심시켰다. 대현이 지금보다 더 무심하고 차갑게 표현됐다면, 후반부에 아내의 건강 상태를 이유로 캐릭터의 태도가 변화할 때 다소 비현실적이고 극적으로 보일 것 같다는 말씀이었다. 한편으로는, 대현이 기본적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설정되는 것이 지영이 처한 상황을 오히려 더 부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현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영의 고통은 여전하다는 게 지영의 상황을 더 역설적으로 나타내지 않나. 김지영의 삶은 단순히 같이 사는 사람의 성격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잃을 수밖에 없는 많은 복합적인 요인들, 사회제도를 비롯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제라는 뜻이니까.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대현이 더 씁쓸한 의미를 낳을 수도 있다고 봤다.
-소설보다 캐릭터가 따뜻해진 것에 더해, 대현이 영화의 톤을 밝게 띄우는 장면들이 생겨났다. 작품 주제에 있어선 조심스러운 지점인데, 동시에 공유를 캐스팅해 영화의 대중성과 호감을 높이려는 전략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배우로선 딜레마였을 것 같다.
=그런 장면들은 대체로 대본에 없었지만, 명확히 의도된 애드리브였다. <82년생 김지영>은 예산이 그리 작지 않은 상업영화의 틀 안에 있다. 극중 지영에 비해 등장 횟수는 적지만 가끔 나왔을 때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 대현 캐릭터가 대중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미덕이라고 봤다. 사실 지금보다 어렸을 땐 이런 부분에 대해 꽉 막혀 있다고 해야 할까, 결벽이 좀 있었다. 소비되거나 남용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지금도 영화 속 캐릭터로서 내가 할 도리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생긴 여유일 수도 있고,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지만, 상업적인 부분에서 내가 가진 영향력 같은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 또한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또 보탬이 되고 싶다. <82년생 김지영>은 그런 부분에서도 깊게 생각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작품이다.
-얼마 전 차기작 <서복> 촬영을 마쳤는데.
=몸도 많이 썼고, 인물 자체가 동적이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쉽지 않았다. <82년생 김지영>이 내게는 천국이었구나 싶을 정도로. <82년생 김지영>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서복> 현장에서 많이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