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1987년 영화 <모리스>가 32년 만에 국내 첫 선(11월 7일 개봉)을 보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각색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작품으로 관객들의 지지가 뜨겁다. 포스터에서 볼 수 있는 강렬한 눈빛의 젊은 시절의 휴 그랜트. 그는 데뷔작 <프리버리지드> 이후에 택한 동성애 시대극 <모리스>로 베니스국제영화제 볼피컵(남우주연상)을 꿰찼다. 휴 그랜트 하면 떠오르는 로맨틱 코미디 3대장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가 있기 전까지, 그가 밟아온 초창기 주요작 3편을 추렸다.
모리스, 1987, 제임스 아이보리
포스터를 꽉 메운 휴 그랜트는 모리스가 아니다. 주인공 모리스 역할은 배우 제임스 윌비가 담당했고 휴 그랜트는 그에게 찾아온 첫사랑 클라이브를 연기했다. 191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모리스>의 이야기는 초반부터 지적인 대화로 가득하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가 모인 학내 사교 클럽에 진입하게 된 모리스가 클라이브와 차츰 우정을 쌓아 간다. 서로의 취향을 나누며 기쁨을 느끼던 두 사람 사이에는 어느새 우정보다 더 사적인 감정이 싹트게 된다. 숨 쉴 틈 없는 긴장이 들어차게 만드는 클라이브의 갑작스러운 고백. 모리스는 낯선 기분에 차가운 말을 내뱉고는 금세 후회한다.
서로를 향한 강한 이끌림은 둘의 사랑을 운명처럼 엮고, 또 찬란한 순간들을 적잖게 빚어낸다. 하지만 클라이브는 모리스의 영원한 사랑이 되지는 못했다. 사회의 시선과 압박에 점차 변해가는 태도를 보여준 휴 그랜트의 다채로운 연기가 인상적이다. 영화 초반과 후반의 클라이브가 서로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 그렇게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볼피컵은 제임스 윌비와 휴 그랜트의 차지(공동수상)로 돌아갔다. 더구나 두 사람은 데뷔작마저 같다. 연극 <말피 공작부인>을 준비하는 옥스퍼드 학생들의 코미디 <프리버리지드>(1982)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1994, 마이클 뉴웰
이후 휴 그랜트는 멜로/로맨스 영화를 꾸준히 찍었고, 그 가운데 제임스 아이보리의 다른 시대극 <남아있는 나날>에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렇게 잘 할 수 있는 한 쪽 길을 꾸준히 개척해 온 그는 1994년, 마이크 뉴웰 감독의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이하 <네결한장>)을 만나게 된다. <네결한장>의 각본가 리처드 커티스는 향후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를 쓰면서 휴 그랜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거듭난다. <네결한장>의 주인공 찰스(휴 그랜트)와 캐리(앤디 맥도웰)는 남의 결혼식에 방문하기 바쁜 청춘 남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기 없는 사람들은 아니다. 만남은 많았지만 정착하고픈 상대는 만나지 못했다. 어느 결혼식에서 마주쳐 하룻밤을 보내게 된 이들도 곧 남이 되어 떠난다.
영국 남자 찰스와 미국 여자 캐리. 우연히 다시 결혼식에서 만난 캐리에게는 약혼자가 생겨 버렸다. 하지만 재력과 명망을 갖췄다는 약혼자는 그녀와 영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서로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 둘은 다시 하루를 보내지만, 캐리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변의 많은 남녀들은 너도나도 운명을 상대를 찾아 떠나는데, 찰스와 캐리는 만났다 헤어지기만 반복한다. 제목 그대로 네 번의 결혼식, 그리고 한 번의 장례식에서 이들은 만나고 인연을 운명으로 바꿔 나간다. 제10회 선댄스영화제에 처음 공개된 <네결한장>은 당시 영국에서 최고로 흥행한 영화에 등극했으며, 영국 아카데미의 주요 상을 휩쓸었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 1995, 이안
또다시 한 편의 시대극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이성과 감성>을 대만 감독 이안이 영화화했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는 시대를 불문한 인류의 보편적 관심사인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19세기 초의 잉글랜드를 무대로 펼친다.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자매가 있다. 언니인 엘리너(엠마 톰슨)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을 가졌고, 동생인 마리앤(케이트 윈슬렛)은 감성적이며 열정적인 성격이다. 다른 성향대로 둘의 연애담은 각기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재산은 첫 번째 부인의 자녀에게 상속되었고, 한순간에 둘째 부인의 집안은 무일푼의 신세가 된다.
휴 그랜트가 맡은 배역 에드워드는 첫째 딸 엘리너와 교감을 쌓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에드워드에게 오래전에 약속한 정혼 상대가 있다는 것. 그러나 이성적인 엘리너는 약속을 지키는 그의 성정을 알기에 자신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영국 귀족 특유의 포시(posh) 악센트가 멋진 신사 이미지의 휴 그랜트는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에드워드가 되기에 적역이었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는 그해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고 미국 아카데미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각색상을 수상했다. 엘리너 역할을 한 배우 엠마 톰슨이 이 작품의 각색을 담당했다는 사실 역시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