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5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내 이름은 돌레마이트>는 오늘날 블랙 무비가 장르로서 발휘할 수 있는 고유한 매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영화의 주인공은 랩과 힙합의 선조로 간주되는 미국의 실존 엔터테이너 루디 레이 무어(에디 머피). 선정적 운문을 비트에 실어 공연하던 코미디언 루디는 어느 날 영화의 파급력에 눈뜨고, 필름의 ‘필’자도 모르는 채 친구와 영화과 학생들을 모아 액션 코미디 <돌레마이트>를 무작정 크랭크인한다. 영화 <내 이름은 돌레마이트>가 흥이 오르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 일찍이 <에드 우드>(1994)를 쓴 각본가 스콧 알렉산더와 래리 카라제브스키는 최악의 테크닉과 최선의 열정이 뚝딱뚝딱 영화 한편을 지어 올리는 광경을 사랑스럽게 그린다. 에디 머피도 최상급 연기를 보여주지만, 웨슬리 스나입스, 다빈 조이 랜돌프, 키건 마이클 키 등 조연진도 틈만 나면 영화를 가로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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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직접 겪지 않은 시간에 대해서도 노스탤지어를 품을 수 있다. 문화의 시차(time lag) 덕분이다. 예를 들어 세기말 즈음 1980년대생 젊은이들은 1960년대생 대중 예술가들의 과거가 당긴 성장담으로 청춘이라는 개념의 한켠을 완성하고 내면화했다. 물론 1960년대생들의 10대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형성됐을 것이다. 평생 10편만 만들겠다고 예고한 1963년생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아홉 번째 작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이하 <원스 어폰 어 타임>)가 그리워하는 시대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도래로 1960년대 말에 막을 내린 고전기 할리우드다. <펄프 픽션>(1994)으로 현대영화의 게임 규칙을 갈아치우고 40대까지도 악동 소리를 들은 장본인치고는 다소 뜻밖의 그리움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은 ‘황금기’의 막바지인 1969년- <이지 라이더>와 <미드나잇 카우보이>가 이해 개봉했다- 의 할리우드를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궤적을 따라 소요한다. 이중 한명은, 엇나간 일부 히피족을 흡수한 맨슨 일당에게 1969년 8월 잔혹하게 살해된 배우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다. <악마의 씨>(1968)로 주가를 높인 감독 로만 폴란스키와 막 결혼해 배우로서 밝은 미래를 기다리던 샤론 테이트의 생이 광포하게 찢겨나간 비극은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고전기 할리우드의 낙일(落日)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그리움과 애수는 타란티노 영화와 관련해 좀처럼 끌려나오는 단어가 아니지만,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는 영화 전반에 드리워진다. 제목부터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넓은 의미의 동화다. 당대 할리우드의 사실주의적 재현이 아니라 타란티노가 그 시대 텔레비전과 영화에 탐닉하며 상상한 그 너머의 세계다. 영화인들이 차를 몰아가는 할리우드 대로는 오렌지 빛으로 출렁이고, 들릴 듯 말 듯한 당시 라디오의 음향이 영화 초반 30분을 감싼다. 실존 영화인들의 일화를 고증했으나 고증된 일화는 타란티노가 상상한 할리우드의 분위기를 완성하는 타일로 쓰인다. 누구나 아는 패스티시의 귀재 타란티노는 그맘때 텔레비전 서부극과 범죄 시리즈, 연예 뉴스를 감쪽같이 복제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를 들락거리게 함으로써 이 동화에 완벽한 삽화를 만들어넣는다. 그리고 1960년대 말 10대 배우로서 현장에 있던 커트 러셀에게 내레이터를 맡긴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의 주인공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전성기를 지나 TV시리즈 조연급으로 밀려나는 중인 배우다. 우리는 브래드 피트가 릭의 스턴트 대역 클리프 부스로 나온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영화산업의 변화에 따라 둘의 지위가 뒤바뀌는 <이브의 모든 것>식 드라마를 예상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주역은 시대의 무드이기 때문에 그런 전개는 일어나지 않는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은 대놓고 보수적이다. 릭과 클리프는 한배를 타고 업계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릭의 치다꺼리를 도맡는 클리프는 “형제 이상 부부 이하” 친구이자 릭에게 질투도 경쟁도 하지 않는 관계로 그려진다. 뭐니 뭐니 해도 각자의 일을 주어진 자리에서 하는 시대인 것이다. 타란티노는 영화에서 베벌리힐스 언덕에 자리한 릭의 저택과 퇴근 후 클리프가 돌아가는 계곡에 자리한 남루한 트레일러를 뚜렷이 대비시킨다. 그러나 클리프에겐 박탈감의 흔적이 없다. 차도에 붙어 있는 릭의 집 또한 정문과 진입로를 갖춘 이웃 폴란스키 저택에 비하면 초라하다. 그럼에도 릭은 폴란스키 집에 초대받길 희망할 뿐 그에게 반감은 드러내지 않는다. 불평등은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 타란티노가 애정을 표하는 올드 할리우드는 수직통합된 스튜디오 시스템을 중심으로 스탭들이 확고한 위계 속에서 맡은 바 노동을 하며 영화 공장을 돌리는 세계다. 에이전트(알 파치노)가 배우와 미팅을 갖기 위해 35mm 셀룰로이드 필름 캔을 가져다가 영사기로 돌려보는 우아한 시절이며, 범죄자도 할리우드 배우도 저녁이 되면 똑같은 인기 드라마 <F.B.I>를 시청하기 위해 TV 앞에 앉는 통합된 대중문화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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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은 경력이 내리막길에 들어선 릭과 클리프, 반대로 스타덤의 입구에 들어선 샤론 테이트를 소개한 다음, 세 사람이 따로 떨어져 보내는 1969년 2월의 하루를 세 갈래로 뒤밟는다. 뒷날 샤론 테이트와 친구들을 살해한 찰스 맨슨 일당의 모습도 주변에 어른거린다. 그러나 역사상 악명 높은 범죄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관객이라면 서스펜스를 느끼기 어렵다. 불길한 전조를 감지하는 정도다. 이후 릭과 클리프는 일의 돌파구를 찾으려 6개월간 이탈리아에서 스파게티 웨스턴을 찍고 LA로 돌아온다. 이탈리아에서 결혼한 릭이 클리프와 고별 술자리를 갖기로 한 밤, 찰스 맨슨 일당이 샤론 테이트가 사는 주소로 찾아온다. 그 집의 전 주인인 음악 프로듀서에게 악감정이 있었던 찰스 맨슨의 눈먼 지시가 어처구니없는 동기다. 릭과 클리프, 샤론이 서로 접점 없이 보내는 하루를 그린 2장에서 영화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숙취를 안고 현장에 간 릭은 대사를 까먹고 자학하다 심기일전해 작은 성취감을 누린다. 남편에게 줄 선물을 산 샤론은 <렉킹 크루>(1969)의 상영관에서 관객과 함께 스크린 속 자신을 바라보며 행복에 잠긴다. 생의 절정에 선 이 젊은 여성을 따르는 카메라의 시선은, 시신을 어루만지듯 멜랑콜리하다. 감독은 “끔찍한 죽음으로만 기억되는 배우에게 삶을 즐기는 이미지를 주고 싶었다”는 요지로 샤론 테이트의 장면들을 설명했다. 그의 목적은 달성됐지만 <원스 어폰 어 타임>의 샤론 테이트가 요정 이미지에 가까운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비단 대사가 적어서만은 아니다. 타란티노는 샤론 테이트를 범죄 피해자 명단에서 못다 핀 스타의 자리로 불러내긴 했으나, 눈부신 청춘으로부터 행복한 임신부로 이어지는 관습적 여성미의 총화를 넘어서진 못했다. 2장에서 가장 기묘하고 매혹적인 단락은 클리프의 하루다. 히피 소녀를 차에 태워준 클리프는 예전에 촬영한 농장이 소녀의 거처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거기 모여 사는 맨슨 추종자들이 농장주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결국 한명을 때려눕힌다. 이것은 흡사 하나의 미니 서부극이다. 어두운 과거를 가진 고독한 사나이가 소녀를 만나 마을에 들어왔다 불의를 감지하고 시장을 면담한다. 그리고 으름장을 놓고 돌아가는. 타란티노는 언제나 숨막히는 시퀀스 제조기였다. 그중 대부분은 도살장 앞에 줄 선 가축의 공포와 서스펜스를 자아냈다. 하지만 <원스 어폰 어 타임>의 2장에서 타란티노의 호흡은 시퀀스 단위를 훌쩍 넘어 시공간을 장악한다. 타란티노의 할리우드 동화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를 잇는 역사 고쳐쓰기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기사 클리프의 활약으로 악당을 물리친 운좋은 왕자 릭은 친절한 샤론 여왕님의 초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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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
로저 미첼 감독의 <여배우들의 티타임>은 연기예술에 대한 공헌으로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은 80대 배우 주디 덴치, 매기 스미스, 조앤 플로라이트, 아일린 앳킨슨의 티테이블 앞에 카메라를 세운 다큐멘터리다. 셰익스피어, 자연스런 연기의 정의, 무대공포증, 결혼, 노화 등 다양한 화제가 연기 어벤저스 사이에 오가는 가운데, 펀치라인을 가장 자주 터뜨리는 인물은 매기 스미스. <오셀로> 공연 중 몰입한 로렌스 올리비에로부터 갑자기 맞은 사건을 돌이키며 “국립극장에서 처음 별을 본 날”이라고 꼬집고, 클레오파트라 역을 안 하자니 아쉽고 영국에서 하자니 외모 품평 듣기가 싫어서 절충책으로 캐나다에서 공연했다고 좌중을 웃긴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맥고나걸 교수, <다운튼 애비>의 레이디 바이올렛 등 예의 현명한 노부인 캐릭터만 알고 있는 영국 밖 관객으로서는, 이 배우의 신랄한 유머 감각과 반사신경을 즐길 수 있는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