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쉽지 않은 직업이다. 매 작품마다 캐릭터에 맞게 변신하는 일 자체도 어렵지만,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리기까지의 길은 더욱 험난하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많은 것을 포기하고, 대세 배우로 자리매김한 이가 있다. 11월 12일 현재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신의 한 수: 귀수편>부터 정지영 감독의 신작 <블랙머니>까지. 두 편의 영화로 관객들을 찾아온 허성태다. 대기업 사원이었던 그는 꿈을 좇아 늦은 나이에 배우에 도전, 몇 년간의 무명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쉽지 않은 길을 선택, 결국 성공 가도에 오른 그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대기업 사원에서 배우 도전
부산 출생의 허성태는 학창시절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그렇게 부산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 전자기기 기업 해외 마케팅 부서에 취직했다. 전공을 살려 러시아 TV 영업을 담당해 판매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거제도에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조선소에 관리직으로 이직, 연봉 약 7000만 원을 받는 성공한 샐러리맨이 됐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배우를 꿈꿨던 허성태는 35살의 나이에 SBS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 <기적의 오디션>에 지원했다. 등장부터 러시아어 인사와 함께 “전 세계 조선업계에서 가장! 현장직처럼 생긴”이라며 재치 있는 자기소개를 한 그는 <올드보이>의 한 장면을 연기해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 통과를 받아냈다. 잇따른 심사위원들의 호평에 눈물을 보이며 절을 하기도. 그 길로 허성태는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 배우로 전향했다.
그의 선택에는 아내의 몫도 컸다. 오디션 지원 당시 결혼 6개월 차의 신혼이었던 허성태는 현실적인 문제로 크게 고민했으나 아내가 오디션을 보라고 강하게 설득했다. “항상 남 눈치 보고 현실, 돈에 매달려왔으니 지금은 그런 것 생각하지 마라. 나도 직장 있으니 꿈을 따라가라”며 적극적으로 응원했다. 덕분에 허성태는 여러 인터뷰 등에서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1등 공신으로 늘 아내를 꼽았다. 2010년 결혼했지만 사실혼 관계였던 두 사람은 2019년 혼인 신고를 마쳤다.
무명 시절
허성태는 <기적의 오디션>으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었지만 곧바로 스타덤에 오르지는 못했다. 2만 명이 넘는 지원자 중 최종 5위를 기록, 이후 캐스팅 제의를 기다렸으나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작품들에서 단역부터 연기 생활을 이어갔다. <광해, 왕이 된 남자> <하이힐> <해무> 등의 영화에 등장했지만 대부분 작은 역할이었다. 이외에 <신의 퀴즈 3> <응답하라 1994> <정도전> 등 60편이 넘는 여러 방송사의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활동했다. 이를 통해 그가 벌었던 돈은 일 년에 1000만 원 미만. 후회가 들 때도 있었지만 꿋꿋이 버텼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이시우 감독의 단편영화 <짜장면의 유혹> <악수> 등에서 주연을 맡으며 연기력을 쌓아갔다.
최근 그는 인터뷰를 통해 단역 시절의 노고,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자주 털어놓기도 했다. 오랫동안 단역을 이어오고 있는 배우들을 향한 조언 요청에는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사실 겁이 난다. 내가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확신이 있다면 계속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며 조심스러운 의견을 비췄다.
<밀정>으로 스타덤, 대세 배우로
이런 허성태가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된 시점은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서 일본군 정보원 하일수 역을 맡으면서다. 이 역시 짧은 등장의 조연이었지만 허성태는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주며 단번에 관객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영화의 중심 악역 하시모토(엄태구)의 ‘폭풍 따귀’도 유명하지만, 주인공 이정출(송강호)이 하일수에게 날리는 따귀도 이목을 끄는데 한몫했다. 이 부분은 사실 대본에는 없었지만 허성태가 송강호에게 직접 부탁한 것이다. 덕분에 두 캐릭터의 성격을 잘 대변한 장면이 완성됐다.
뒤이어 출연한 <남한산성> <범죄도시>에서도 캐릭터를 백방 살린 모습으로 활약했다. 삼전도의 굴욕을 진중하게 풀어낸 <남한산성>에서는 조선을 위협하는 청나라 장수 용골대를 연기해 카리스마를 보여줬으며, 주조연 배우들의 조화가 빛났던 <범죄도시>에서도 존재감을 뽐냈다. 악역인 장첸(윤계상)과 대면하는 장면에서는 쫄깃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명대사인 “내 누군지 아니?”도 사실 장첸보다 그가 먼저 뱉은 말이다. “조용히 해라~it! 쪽팔리게!”도 있다.
악역 전문 배우?
거친 이미지 때문일까. 허성태는 단역 시절부터 악역을 자주 맡았다. 성공의 도화선이 된 <밀정>에 이어 OCN 드라마 <터널>에서는 살인마를 맡아 소름 끼치는 연기를 펼쳤다. 코믹 범죄극 <꾼>에서도 다른 인물들이 가벼운 톤을 유지할 때 홀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기꾼을, 일제강점기 속 국어사전 집필을 소재로 한 <말모이>에서는 조선어학회 멤버들을 괴롭히는 일본인을 연기했다. 덕분에 악역 전문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에 대해 그는 “작품의 뜻이 좋으면 역할에 상관없이 맡았다”는 생각을 전했다.
그러나 그는 “악역에서 벗어나 보다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배경의 일본인(혹은 앞잡이 캐릭터)는 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유사 역할로는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연기 변주를 이유로 꼽았다. 이런 그의 의지 때문일까. (스포일러 주의!) 최근 출연한 첫 상업영화 주연작 <열두 번째 용의자>에서는 살인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사실 친일 청산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독립운동가를 연기했다.
차기작
마지막은 허성태의 차기작이다. 대세 배우답게 세 편의 작품들이 시청자,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모두 기존의 악역 이미지에서 벗어난 코미디 장르다. 11월20월 방영을 앞둔 tvN 코믹 수사극 <싸이코패스 다이어리>에서는 주인공 동식(윤시윤)의 조력자로 등장, 허당끼 가득한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2019년 개봉 예정인 <스텔라> 역시 슈퍼카를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다.
<신의 한 수: 귀수편>에서 혈전을 벌였던 권상우와는 영화 <히트맨>으로 다시 호흡을 맞춘다. 전직 특수요원(권상우)이 웹툰 작가로 변모하며 인생 2막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허성태의 캐릭터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코믹한 극의 분위기에 어우러질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