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의 연장선에서 생각하는 <날씨의 아이>
2019-11-27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버려진 아이들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를 보면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에 대한 표준적인 평가와는 무관한 생각이다. 특별히 제목에 ‘아이’라는 단어가 명시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신카이가 전작에 이어 버려진 아이들을 스크린에 들여온다는 점에 이끌렸다. <너의 이름은.>에서 어머니가 없는 가족의 형태로 예고되었던 미묘한 고아의식은 이 영화에서 부모로부터 방치된 아이, 버려지거나 갈 곳을 잃은 아이들의 모습으로 전면에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아이들은 도피와 순응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야기상의 불가피한 결과였다면 이는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영화는 어른의 규칙에 진입하기 전 단계의 아이들이 교환하는 감정과 행동에 주목한다. 서둘러 말하자면, <날씨의 아이>는 버려진 아이와 괴물이 된 아이가 만나고 헤어지고, 재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계의 빈틈을 응시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다소 늦은 감정의 확인과 너무 이른 체념의 정서

버려지거나 초자연적 능력을 사용하는 아이들의 표상이 신카이만의 특권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순 없다. 이를테면 전후의 이탈리아영화, 혹은 <엑소시스트>나 <캐리>와 같은 70년대의 아메리카 시네마에서 거리에 방치되고 괴물로 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이런 시도가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지켜본 유년기 아이들의 슬픔과 분노, 치명적인 감수성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를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일본 애니메이션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또한 무리일 것이다. 여기서 신카이가 다루는 건 스스로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아이들의 정서적 측면이다. 주인공 호다카(다이고 고타로)는 신분증도 없이 도쿄에 와서 처음으로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지상을 비추는 빛을 따라가는 한 장면이 등장할 뿐, 그가 고향에서 느낀 충동이 무엇인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반대편에서 히나(모리 나나)와 나기는 심리적으로 조숙해져 있다. 특히 히나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할 때, 그 말에는 삶에 대한 체념의 정조가 깃들어 있다. <날씨의 아이>의 아이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유년기의 기억과 정서가 삭제된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에 대해선 너무 일찍 성숙을 겪고, 사회에서는 여전히 미숙한 채로 배회하는 아이들. 다소 늦은 감정의 확인과 너무 이른 체념의 정서, 이는 연애적 경험 이전에 헤어짐을 먼저 겪는 호다카와 히나의 관계에 새겨진 불일치의 신호이기도 하다.

날씨와 감정을 잇고자 하는 시도에 부합하듯, 신카이는 그러한 불일치가 드러나는 두개의 장소로 세계의 표면과 인물의 신체를 선택한다. 영화의 도입부에 공중에서 호다카에게 떨어지는 기이한 물웅덩이를 떠올려보자. 그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세계의 표면에 다른 질감, 다른 원리의 작동 가능성을 환기하는 유체적 형상의 개입이다. 그와 같은 형상이 히나의 몸 내부에서 그 신체의 표면을 잠식하고 있음을 확인하는건 얼마 뒤의 일이다. 과다한 물의 이미지로 채워진 몸, 도피와 순응 사이 선택을 유예하면서 날씨의 영역과 현실이라는 두 세계에 동시에 거주하며 불화를 이루는 몸의 형태다. 그 몸을 드러내면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어딜 보고 있는거야?” 현실의 흔적이 감지되지 않는 이미지의 육체를 눈으로 맞닥뜨리며, 영화에는 세계의 물리적 원리와 어긋나는 현상이 도입된다. 공중에 표본처럼 떠 있다 추락하는 액체 덩어리, 중력을 거슬러 오르는 물의 움직임이 그러하다. 떠오르는 움직임과 떨어지는 움직임의 긴장이 형성되는 자리에 호다카와 히나의 신체가 자리하고 있다.

지표성이 없는 이미지를 정확히 ‘보기’ 위해, 역설적으로 이 애니메이션은 현실의 물리적 법칙에 붙잡혀 있는 신체의 육체성을 강화한다. 전자가 액체화되는 히나의 몸이라면, 후자는 히나가 사라졌음을 확인하고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호다카의 몸이다. 희미한 세계의 지면을 밟아가면서, 물리적 규범을 넘어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상상하는 이중적 열망이 달리기의 육감에 드리워져 있다. 물론 이 순간에 과도한 물이 인물들의 발아래 전제되고 있다. 발밑에 고인 물은 인물들의 몸을 미끄러뜨리고, 주체의 정서와는 무관하게 촉촉이 젖은 눈물을 투명한 경계면(눈) 너머로 흘려보낸다. 경계의 바깥을 프레임 내부로 들여오면서, 더불어 내부의 것들을 경계 바깥으로 내보내면서, 호다카는 히나가 밟은 경로를 고스란히 따라간다. 지표 없는 이미지를 따라가는 흔적으로서의 발자국. 제물이 된 아이를 되찾으려는 파수꾼으로서의 움직임. 표면의 물리적 법칙이 무력해지고, 발을 디딜 지반이 뒤집힌 하늘 위에서 히나와 호다카의 재회가 성립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의 몸이 뒤집힌 채로 공중에서 활공하는 이 장면은 그들의 몸에 가해지는 힘과 세계를 유지하는 힘이 형성하는 불일치를 기묘한 방식으로 조응시킨다. 그에 발맞춰 다음 장면에서 뒤집힌 지구의 외형이 비친다. 찰나지만, 이 가상의 무대에서 세계와 아이들은 공존을 이룬 것일까.

적지 않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버려진 아이들, 괴물이 된 아이들,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기존 질서로부터 추방당한 아이들이 출현해왔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이들의 신체는 인간의 몸으로, 인류 공동체의 규범으로 유지되거나 포섭되지 않는 위반적인 몸짓에 새겨진 구속과 금기를 우회한 결과물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몸짓은 세계와의 불화를 중단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불화라는 동력이 가지는 양가적 역학으로 인해 세계를 무너뜨리거나 스스로 무너지게 되는가.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보로 호명되곤 하지만 일견 특별한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신카이 마코토와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괴물의 ‘아이’를 구현한) 호소다 마모루가 맞물리는 지점은 바로 이런 질문이 제기되는 장소에서다. 그리고 이런 접점에서만 우리는 이들의 상징적 기원으로 여겨지곤 하는, 버려지고 괴물로 취급되는 아이들의 만남과 재회를 압도적인 크기의 운동감으로 그려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대가를 치른다

신카이 마코토는 <너의 이름은.>이 자신의 인물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방법을 모색한 결과물이라고 밝혔다. 여러모로 전작의 연장선에 있는 이 작품에서 연출자의 기조가 급격히 전환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놀라운 기적으로 재난의 결과를 뒤집는 <너의 이름은.>의 일차원적인 열망과 달리 <날씨의 아이>에서 이들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는 대가를 동반한다. 수몰된 도쿄, 또는 일본 전체의 기상이변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대가를. <날씨의 아이>의 아이들은 세계에 희망이 없음을 깨닫는 순간에, 그것이 그들의 희망을 보존하는 전제였음을 확인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꿨음을, 그것이 우리의 책임임을 두 사람은 분명히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그러한 경험으로 아이들의 감정에 변형을 가져온다. 아이들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소망이 이루어졌다면, 다음은 살아남은 아이들의 새로운 규칙에 대해 말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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