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가 고독과 소외, 분쟁, 광기에 싸인 현실 세계를 모자이크하는 방식
2019-12-04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문학의 정신과 영화의 육체

후보 감독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이하 <코끼리>)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3) 사이에는 몇 가지 접점들이 있다. 제목에 ‘코끼리’가 포함되어 있지만 두 영화에는 코끼리가 나오지 않는다. 후보의 영화 마지막에 울부짖는 코끼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두 영화는 다중 캐릭터 서사의 전범이 될 만한 모델로, 복수(複數)의 인물들이 그들 각자의 삶을 전환시키는 사건을 중심으로 교차하면서 부딪히고 순환하는 관계를 그린다는 점에서도 같은 맥락을 가진다. 형식에 관해 말하자면 저들은 하염없이 길게 늘어지는 롱테이크와 각자의 스토리를 갖는 인물들의 뒤를 좇는 유려한 스테디캠 촬영으로 각별한 시각적 인상을 창조한다는 점에서도 가까이 있다.

<코끼리>와 <엘리펀트>는 공통점이 더 있는데, 공히 ‘죽음’을 중심 모티브로 하여 서사가 짜였고, 모든 죽음이 해명할 길 없는 부조리의 냄새를 풍긴다는 점에서도 같다. 더하여 후보의 자살은 어쩔 수 없이 <코끼리>를 구제책이 없는 절망적인 세상에 대한 일종의 자살 메모로 읽도록 만든다. 이 영화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악화되어가는 동시대 중국 사회의 불모함에 관한 냉정한 묘사를 담고 있다. 이상적인 삶은 존재하지 않고, 무엇을 하든 후회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세계에서 어떤 차악의 선택을 할 것인가의 문제만 남아 있다. 화면이 열리자마자 엄습해오는 죽음(한 사내가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아파트 밖으로 몸을 던진다)의 내음이 스멀스멀 퍼져나가면서 전편에 걸쳐 자조의 기운이 확산돼간다. 그러나 왜 이토록 출구 없는 절망이 세상을 잠식했는가에 대한 원인 규명이 모호해지는 결말로 치달아가면서 <코끼리>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전개시킨다.

코끼리가 의미하는 것

<코끼리>는 짐작할 수 없는 인간 운명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공교로운 운명 앞에 선 인간의 행동반응을 생의 전환점에 놓인 네 인물의 스토리를 통해 엮은 우화다. 중국 북부의 특색 없는 마을에서 하루 동안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거의 동일한 비중을 갖는 네명의 인물들이 교차하는 우연의 태피스트리를 보여준다. 234분에 달하는 플롯은 절망적인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삽화를 시발로 하고, 그 난공불락의 어두움이 전이되어 급기야 세상을 완전한 어둠에 빠져들게 만드는 상황을 결말로 하여, 그 안에 각자의 사연을 포개는 구조로 짜여 있다.

네 주인공은 서로 다르지만 동종의 것이라고 할 만한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동네 조직폭력배인 위청(장위)은 절친한 친구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이를 알게 된 친구는 위청의 눈앞에서 별안간 투신한다. 가학적인 퇴임 경찰 아버지 아래서 숨죽이는 소년 웨이부(펑유창)는 단짝 친구 리카이를 핸드폰 도둑으로 몰아 괴롭히는 동급생 위솨이를 계단에서 밀쳐 중퇴에 빠트린다. 웨이부의 호감을 사고 있는 소녀 황링(왕위원)은 무정한 어머니와 파탄난 관계를 보상받으려는 듯 유부남 부주임 교사와 은밀하게 교제하고 있다. 웨이부의 아파트 주민인 노령연금 수급자 왕진은 딸을 편안하게 키울 수 있도록 자신을 요양원으로 보내려는 자식들의 냉대에 부질없이 방황한다. 소년기와 청년기, 노년기를 대표하는 각각의 인물들은 어느 세대의 삶도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을 집요하게 묘사한다.

원제목인 <Elephant Sitting Still>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코끼리는 여전히 앉아 있다’로 번역된다. 이웃한 시공간의 좌표를 부유하는 웨이부와 위청의 동선을 하나로 묶는 고리는 이 신비로운 코끼리에 매료되어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확인하러 가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혼돈과 폭력이 공존하는 세상과 어떤 영향도 주고받지 않으려는 우리 안의 코끼리. ‘구속’을 향한 소망을 나타내는 이 전설의 피조물은 더는 나아질 수 없는, 끔찍한 세계에 대한 암울한 비전의 투사체다. 절망적인 세계를 배회하는 인물들이 인생의 막다른 모퉁이로 밀어넣어졌을 때, 그들은 북부 도시 만저우리에 있는 코끼리의 전설을 떠올린다. 그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약속의 땅은 의미 없는 부조리 속에서 먹거나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코끼리가 앉아 있는 동물원이다.

<코끼리>는 감독이 되기 전 소설가로 먼저 존재감을 보여준 후보의 스토리텔링에 대한 탁월한 위업을 보여준다. 네 인물의 경로를 섞은 플롯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신들의 배치를 보여주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시간의 진동은 안정화되고 종국에는 모든 신들의 연결이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하루의 데드라인으로 설정된 플롯 시간 안에서 네 인물의 행로가 교차하는 순간을 분기점으로 하여 서사를 도해해 볼 수 있다. 인물의 이동, 관계라는 관점에서 서사의 첫 번째 분기점은 웨이부와 위청이 우연히 대면하는 순간(두 인물이 처음 만나는 장면으로 플롯의 중간 지점에 배치된다)이고, 두 번째 분기점은 만저우리로 가기 위해 돈이 필요한 웨이부가 왕진에게 당구 큐대를 팔아넘기고 이를 계기로 위청과 왕진이 대면하는 순간이다. 몽유병이라도 걸린 것 같은 인물들의 발길에 이끌려 도달하는 운명의 종착지는 웨이부와 황링, 왕진이 만저우리로 향하는 시간이다. 세개의 시간은 인물들의 공교로운 교차와 변화하는 운명을 제시한다.

스토리의 시작점에서 네 주인공은 인생의 중대한 순간에 봉착해 있다. 웨이부는 의도치 않게 학교폭력의 ‘희생자’에서 폭력의 ‘가해자’로 아이러니한 자리바꿈을 하게 되고, 위청 역시 의도치 않게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야기하면서 깊은 우울감에 빠진다. 황링은 부주임 교사와의 원조교제가 알려지면서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절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퇴역군인 왕진은 딸과 사위로부터 요양원 행(行)을 강요당하면서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게 된다. 복잡하고 다성적인 기원을 갖는 현실의 본질을 서사화하기 위해 <코끼리>는 강박적인 고독감을 공유하는 다중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시간의 교차 구조를 디자인하였다. 그러나 234분이라는 장대한 시간을 운행하는 <코끼리>의 플롯은 자의적인 랜덤의 방식이 아니라 정교한 내레이션의 조직으로 극적 긴장을 증폭시킨다.

교차하는 운명의 서사를 위해 플롯은 유사한 정황들의 계열을 이웃하도록 배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의 ‘죽음’을 중심으로 플롯을 다시 도해해볼 수 있다. 친구의 배신에 이를 악문 사내가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서두의 장면에는 작품 전체에 걸쳐 반복되면서 점점 확대되어가는 핵심적인 모티브가 함축되어 있다. 모든 인물들이 일상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 죽음과 조우하며 그것은 전염된다.

죽음의 전이라는 관점에서 플롯 구조는 네 단락으로 나뉜다. 위청의 친구가 시발이 된 투신자살로 출발하여, 왕진이 애지중지하는 개의 죽음으로, 웨이부의 우발적 행동이 발단이 된 위솨이의 죽음으로 그리고 서사의 끝에 배치된 웨이부의 친구 리카이의 자살로 죽음은 연결된다. 영화 속 인물들은 타인의 삶을 동정하거나 연대하여 희망을 줄 수 없는, 세대간에 보호권한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세대 간극은 웨이부와 그 아버지, 황링과 어머니, 왕진과 딸 부부의 관계를 통해 예시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무심하고, 자녀는 부모를 떠나보내려 하며, 교사는 학생의 곤경을 외면한 채 자신의 안위만 살핀다. 결과적인 악행은 의도와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위청의 불륜은 순정을 다한 여인에게 외면을 당한 뒤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굴절인 양 불경스럽게 행해진다. 위솨이에 관한 웨이부의 ‘살인’은 실랑이의 와중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발생한다.

이와 관련하여 거의 모든 인물들은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상황에 놓인다. 죽음의 뒤를 잇는 ‘책임 회피’의 전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위청은 친구의 아내에게 친구의 죽음이 전적으로 그녀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를 면책하려 한다. 웨이부가 단단히 믿고 변호하려 했던 리카이는 자신이 핸드폰을 훔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고백함으로써 웨이부의 믿음을 저버린다. 황링과의 관계를 담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폭로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부주임 교사는 자신의 경력이 망가졌다고 화를 내면서 책임을 면하려 한다. 왕진이 사랑하는 개를 물어죽인 개의 주인과 대면했을 때, 그들은 관리책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개만 걱정한다.

책임 회피와 관련하여 박해받은 사람들의 분노는 좌표를 달리하여 발산된다. 웨이부는 치밀어오르는 환멸의 순간에 거리의 노인들에게 가학적인 저주를 퍼붓는다. 황링과 그 어머니가 극렬하게 다툰 뒤 부주임 교사의 방문을 받는 기나긴 시퀀스에서 좌표가 굴절된 분노가 다시 폭발한다. 침실 창문을 넘어 거리로 접어들 무렵 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은 황링은 방향을 돌려 야구방망이를 들고 다시 실내로 들어간다.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는 부주임의 말에 충격을 받은 황링은 야구방망이로 부부를 가격한다.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책임 회피와 굴절된 분노가 가리키는 현실은 어떤 비극적 사태도 책임질 방도가 요원한 세계다.

동요하는 리얼리티를 닮은 카메라워킹

이야기의 끝지점에서 후보는 영화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코끼리의 울음소리를 들려준다. 웨이부와 황링, 왕진이 만저우리로 향하는 여정 중 한 벌판에 내렸을 때 코끼리가 운다. 현실의 바깥으로 급작스럽게 일탈하는 이 소리는 절망적인 절규인가, 미래의 희망을 불러오는 나팔 소리인가? 마지막 순간에는 또 다른 의뭉스러운 소리가 개입하는데, 정체를 알 수 있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또는 전세계를 향해 “당신들은 모두 지옥에 갈 것입니다!”라고 소리친다. 실제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지상의 지옥에 살고 있다. 만저우리의 코끼리를 확인하러 떠나는 이들의 여정은 도무지 풀리지 않을 가혹한 운명으로 점철된 황폐한 세상에서 강박적인 고독에 휩싸여 있다.

단선적이지 않은 이야기의 궤도를 따라가면서 영화 형식의 완력은 강력해진다. 한신의 길이는 매우 길고, 한 지점에서 진술된 에피소드가 플롯의 다른 지점에서 의미와 반향을 일으키기도 한다. <코끼리>의 역동적인 프레임 구성은 현대 중국 도시의 밀실공포증적인 억압을 형상화하는 꽉 조인 프레이밍, 진흙빛과 파란색, 갈색으로 전달되는 엄격한 조색(調色) 전략과 호응한다. 황량함을 강조하는 시각적 긴축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고, 연기는 로키로 조율되어 있으며, 음소거에 가깝도록 소리는 자제된다. 모든 인물은 읊조리듯 말하는데, 동네 조폭인 위청마저 존재를 성찰하기 위해 조용히 말하는 것 같다. 이처럼 조용히 말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웨이부의 아버지, 왕진의 개를 물어 죽인 개의 주인이 내지르는 패악적인 음성은 공포와 절망을 한층 강화한다.

<코끼리>에서 후보는 현대적 리얼리티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또는 인물의 상태에 밀착하기 위해 몸에 강박된 카메라, 제한된 시계(視界), 파쇄된 인물들의 상황과 연관되는 극단적인 카메라 앵글을 활용한다. 명확하게 짜인 서사의 라인을 따라가는 통례적인 영화들과 달리 카메라가 액션을 주재하고 있다기보다는 프레임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반응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 비결정적인 카메라워킹은 불안정하고 동요하는 리얼리티의 본질을 적확한 시각적 스타일로 뒷받침한다. 대부분 절망의 단서를 찾는 것처럼 캐릭터 주위를 배회하는 트래킹숏으로 화면이 구성되고 프레임의 한 국면(전경 또는 후경)에는 거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 대화를 촬영할 때도 후보는 고전적인 숏- 리버스숏 패턴을 피한다. 인물들의 뒤를 좇는 카메라를 따라 관객은 몰입적인 방식으로 캐릭터들에 대한 동정심을 발전시키게 된다. 초지일관한 촬영 양식에 의해 관객은 항상 캐릭터들을 따라 걷고 항상 그들과 함께 모든 사건을 경험한다.

다수의 장면 연출은 이야기의 서술과 그에 대한 시각적 진술을 동시에 수행한다. 카메라는 머리와 어깨 클로즈업에서 화각을 꽉 조여서 뒤에 놓인 배경으로부터 희미한 디테일을 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를테면 웨이부와 위청, 리카이가 대치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세 인물은 갑자기 거리에 나타나고 포커스가 맞지 않은 채 전경에서 후경까지 각자의 영역을 점령한다. 세 사람 사이의 행위와 그로 인한 긴장은 팽팽한 프레임의 구도와 배치, 액션의 연출로 비등점에 오른다. 프레임 안에서 중요한 순간은 거듭 가려진다. 특별히 죽음의 순간은 보는 이들의 시야로부터 벗어난다. 관객은 위청의 친구가 아파트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을 보지 못하고, 왕진의 개가 물려죽는 광경 또한 보지 못한다. 후자의 경우, 왕진의 주위로 카메라가 움직일 때 크게 울리는 짖는 소리가 들린 후 낭자하게 피가 흐르는 개의 모습을 볼 뿐이다. 계단 아래로 구르는 위솨이의 모습은 웨이부의 겁에 질린 얼굴로 대체되고, 리카이의 권총자살 역시 위청의 얼굴과 함께 화면 밖 사운드로 전해질 뿐이다. 장면 구성의 경제성과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이 드러나지 않는 폭력의 순간은 전시된 폭력 이상의 강도를 만들어낸다.

동물원에 앉아 있는 코끼리에 대한 네 인물의 동경은 이전 삶의 많은 부분이 아마도 그랬던 것처럼 능동적이기보다는 관성적이다. 도덕적으로 견딜 수 없지만 저들이 살아 있다고 느낄 만한 유일한 순간은 누군가를 계획적으로 또는 의도치 않게 해를 입히는 순간이다. 가망 없는 세계에 관한 가차 없는 시선으로 후보는 현대적인 서사 구축의 풍성함과 깊이, 눈부신 영화 형식의 힘을 절묘하게 교배하였다. <코끼리>는 동강난 이야기 조각들을 무분별하게 나열하고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희미한 논리에 따라 배열함으로써 고독과 소외, 분쟁, 광기에 싸인 현실 세계를 모자이크한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는 종합적인 결론이나 엔딩이 존재하지 않는다. 허허로운 벌판에 울려퍼지는 코끼리의 울음은 영화가 발 딛고 선 나약한 비관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의 간극을 메운다. 오늘날 중국 사회뿐 아니라 우리의 세계와 강력하게 공명하는 <코끼리>는 문학의 정신과 영화의 육체를 이상적으로 조화하려 한 조숙한 예술가 후보의 재능을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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