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발표된 <친절한 금자씨> 이후 한동안 스크린에서 배우 이영애를 볼 수 없었다. 무려 14년 만에 그녀가 선택한 작품은 김승우 감독의 입봉작 <나를 찾아줘>. 시나리오의 강렬함에 이끌린 이영애가 공백을 깨고 다시 대중 앞에 나섰다. 자주 볼 수 있는 배우보다는 뿌리 깊은 배우가 되길 원했던 그녀가 걸어온 다섯 가지 영화 속 모습들을 찾았다.
공동경비구역 JSA / 2000
소피 장 소령 역
한국 영화계에 작가성을 증명해 보인 <공동경비구역 JSA>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박찬욱의 데뷔작이라 할만하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남/북 초소병이 각각 지키는 비무장지대 내 특수구역이다. 이곳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중립국에서는 수사관 소피 장(이영애)을 파견한다. 그녀의 꼼꼼하고 명석한 추리로 풀리지 않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할 즈음, 상부에서는 '결과'가 아닌 '과정'을 내세운 압박이 내려온다. 최초의 목격자 남성식(김태우) 일병, 총격 사건의 당사자 이수혁(이병헌) 병장, 북한의 오경필(송강호) 중사, 일곱 발의 총상으로 전사한 북한 초소병 정우진(신하균)을 둘러싼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점차 베일을 벗는다. 탁월한 지점에서 변주되는 시간상의 배열이나, 네 병사를 담는 카메라의 독특한 패닝 기법 등 고민을 거듭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복잡다단한 사건의 심지를 겨냥하는 '소피 장' 이영애의 이지적인 캐릭터를 확인할 수 있다.
선물 / 2001
정연 역
<작업의 정석> <패션왕>을 만든 오기환 감독의 데뷔작. 무명 개그맨 용기(이정재)와 아동복 가게를 운영하는 정연(이영애)는 3년 차 부부 사이다. 하지만 '결혼은 현실'이라는 해묵은 말처럼 두 사람은 매일같이 서로에게 비난을 쏟아붓기 바쁘다. 연줄과 접대 없이 무대 위에 오르기 힘든 현실에 좌절하는 용기. 졸지에 능력 없고 가정도 못 지키는 남편이 돼버린 그와 아내의 갈등은 깊어진다. 꾸준히 방송국 PD의 아내를 찾아간 정연이 남편을 어필하는 한편, 얼굴의 핏기가 점점 사라져 가는 그녀는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용기는 죽기 전 정연에게 첫사랑을 만나게 해주려는 목표를 세운다. 희극뿐인 무대 위, 그리고 비극이 기다리는 무대 밖 현실. 객석의 울음을 불러내는 신파조의 멜로 영화 <선물>은 대중적인 공감을 위해 이 대비를 기술적으로 활용한다. 신인 시절 풋풋한 이정재의 당찬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새삼스럽다. 넘치지 않는 연기력을 보여주는 이영애 특유의 담담함은 도리어 대담한 에너지로 다가온다.
봄날은 간다 / 2001
라디오 PD 은수 역
이즈음 허진호의 멜로 영화에는 언제 꺼내 보아도 생생한 활력과 감수성이 있다. 은수의 대사 "라면 먹을래요?"는 스칠 수도 있었던 인연을 엮고, "자고 갈래요?"로 훌쩍 뛴 한 마디는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을 단숨에 좁힌다 (정확히 말하면, 유행처럼 번진 "라면 먹고 갈래?"는 기억의 집단적 오류다). 그렇게 말의 기호에 싸인 농밀한 신호를 타고 라디오 PD 은수(이영애)와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는 마치 필연처럼 연인이 된다. 하지만 <봄날은 간다>가 포착하는 사랑의 모양은 상승에서 하강으로 그려진 포물 곡선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상우의 원통한 물음은 사실 대답도 함께 품고 있다. 사랑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수더분하고 거침없던 매력의 은수는 상우와의 깊어지는 관계에 불안을 느끼고, 이 연애의 균열을 짐작한 두 사람은 엇갈린 방황을 거듭한다. 떠들썩한 환희의 순간이나 지독한 권태로움 대신 영화가 관심 두는 것은, 말들의 미묘한 행간이나 일상을 불쑥 파고든 잔여물이다. 제22회 청룡영화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친절한 금자씨 / 2005
금자 역
박찬욱 감독과의 두 번째 작업에서 단독 주연으로 나선 이영애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복수의 화신이 된다. 13년간 교도소에 복역하며 이금자(이영애)에게 생긴 별명은 '친절한 금자씨'. 온화한 미소로 성실한 수감생활을 하는 금자는 수감 동료들이 두려워하는 '마녀'(고수희)를 아주 상냥하고 친절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복역을 마친 금자는 더 이상 친절해 보이지 않겠다는 선언의 붉은 눈 화장을 하고 세상으로 나온다. 그리곤 그녀를 아름다운 죄수로 살게 한 파렴치한 백 선생(최민식)을 향한 복수의 준비를 시작한다. 차분한 이목구비와 목소리의 이영애에게서 역설적으로 서늘한 광기를 끌어낸 캐릭터 이금자는, 한국 영화 사상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의 탄생을 알렸다. 박찬욱 감독의 미학적 야심과 연출이 집약된 걸작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를 잇는 이른바 '복수 3부작'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아랫집 / 2017
406호 여자 역
이경미 감독이 과거 <친절한 금자씨>의 촬영 현장에서 가장 '맹한' 스크립터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그 특별함 속에는 남다른 세계관이 자리해 있었고, 감독이 된 이경미는 <미쓰 홍당무>로 데뷔해 <비밀은 없다>를 발표하는 동안 촉망받는 여성 감독 주자로 떠올랐다. 국내의 유명 감독들과 단편 영화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TV 프로그램 <전체 관람가>는 유일한 여성 감독의 자리에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그녀는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를 캐스팅했다. 단돈 3천만원의 제작비로 완성한 이경미의 단편 <아랫집>은 프로젝트에서 나온 10편의 영화 중 독보적인 호평 세례를 받았다. 균질한 내러티브보다는 비약과 공백을 앞세운 연출이 신선함을 몰고 왔다. 극중 406호 여자 역할의 이영애는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린 강박적인 인물을 연기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링해가며 아이디어를 내는 등 열정적인 배우 이영애의 모습이 담긴 비하인드 영상도 함께 화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