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 시빌(버지니아 에피라)은 관객에게 사랑받기 힘든 캐릭터다. 은근한 코미디에 강박이 있는 영화 <시빌>의 난감한 웃음은 대개 직업적 본분을 잃은 시빌의 막장 행보에서 비롯된다. 상담자의 사연을 소설로 쓰는가 하면, 오랜 알코올중독 이력에 힘입어 과감한 만취 행패를 선보이는 식이다. 그런데도 시빌은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싶은 여자다. 환자들을 치료하지만 정작 자신의 트라우마는 돌보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매력적인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환자의 사연에 깊이 이입하다 못해 모든 사연의 주인공을 자기로 치환하는 뻔뻔한 능력의 출처가 궁금한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여기엔 얼핏 의외의 캐스팅처럼 보이는 버지니아 에피라의 힘이 컸다. 벨기에 출신인 버지니아 에피라는 20대 초반부터 주로 TV시리즈에서 활동하면서 부드럽고 친숙한 이미지로 알려졌다. 30대 이후로는 스크린으로 넘어가 코미디 장르의 조연으로 활약하며 연기의 보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서른아홉, 열아홉> <사랑해도 괜찮아> <업 포 러브> 등에서 주연을 꿰차고 준수한 연기를 선보였지만, 한편으론 멜로드라마가 선호하는 여성주인공의 한계를 자각해야 했다. 그러니 과감한 성적 묘사와 더불어 시니컬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시빌>에 버지니아 에피라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이질적이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배우가 지닌 기존의 이미지를 전복시켜 캐릭터를 확장하고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음을 일찌감치 간파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시빌>의 에피라는 개성 있는 외모와 동물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상대 배우 아델 엑사르코풀로스보다 생기가 넘친다. 어떤 배우든 그를 제대로 해석하는 작품의 저력이 있다면 언제나 도약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영화 2019 <시빌> 2018 <불가능한 사랑> 2018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2016 <엘르> 2016 <빅토리아> 2016 <업 포 러브> 2015 <사랑해도 괜찮아> 2015 <임대가족> 2013 <서른아홉, 열아홉> 2009 <바론 클럽> 2009 <휘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