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영화가 무려 5편이나 나왔다. 역대 가장 많은 관객이 극장가를 찾았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겨울과 올해 초만 해도 ‘한국영화 위기설’이 모락모락 피어오른 걸 떠올려보면 2019년 한해동안 쏟아진 박스오피스 기록이나 성과들은 예상 밖이다. 지난 12월5일 CGV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올해 한국 영화산업을 되돌아보는 토크쇼인 ‘영화 배급과 흥행’(주최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아카데미)이 열렸다. 김성훈 <씨네21> 기자가 진행한 이 토크쇼는 이하영 하하필름스 대표(전 시네마서비스 배급 이사)와 최재원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로컬 프로덕션 대표가 참석해 그 어느 때보다 화제가 많았던 올해 한국 영화산업의 주요 순간들을 배급과 흥행 전략의 관점으로 복기했다. 장장 3시간이나 진행된 이날 대담을 7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올해 한국 영화산업은 정말 호황일까
2019년은 ‘천만 영화’가 가장 많이 나온 해다. <극한직업>(1627만여명,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 <어벤져스: 엔드게임>(1393만여명), <알라딘>(1255만여명), <기생충>(1008만여명), <겨울왕국2>(1216만여명, 12월17일 현재) 등 5편이 천만 관객을 불러모았다. 종전 기록은 2014년의 4편(<겨울왕국> <명량> <인터스텔라> <국제시장>)이다. 올해 총관객수는 12월 17일 현재 2억2천만여명으로, 2017년의 2억1987만여명을 훌쩍 넘었다. 외형만 놓고 보면 올해는 호황이라 할 만한데 정작 최재원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로컬 프로덕션 대표는 “투자•제작을 하는 사람으로서 ‘역대 최고’가 무색할 만큼 체감상 추운 한해”였다고 한다. 이하영 하하필름스 대표 또한 “천만 영화가 많이 나온 만큼 나머지 영화가 피해를 봤다고 할 수 있다”며 그 근거로 “300만~500만 관객 사이의 ‘중박 영화’가 눈에 띄게 줄어든 사실”을 지적했다. 올해 중박 영화는 <봉오동 전투> <나쁜 녀석들: 더 무비> <82년생 김지영> <토이 스토리4> <돈> <악인전> 등 총 8편으로 지난해의 22편에 비하면 크게 줄었다. 올해 초 주40시간 근무제가 도입되고 최저임금제가 시행되면서 제작비가 덩달아 상승하고, 그러면서 손익분기점을 넘기가 예년보다 더 어려워진 상황에서 관객이 소수의 영화에 몰려드는 반면, 나머지 영화들이 한정된 시장을 ‘1/N’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극한직업>의 1600만 흥행 비결은
“<극한직업>이 코미디영화로서 가진 가능성과 컨셉은 잘 알겠지만(A급 배우가 출연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흥행이 예상되던 작품이 아닌 까닭에) 1600만여명이나 불러모을 줄 상상도 못했다.” 최재원 대표의 말대로 <극한직업>은 지난 설 시장에 개봉해 누구도 예상치 못한 흥행을 기록했다. 설 시장에서 한국영화가 천만 관객을 동원한 것은 2013년 <7번방의 선물> 이후 처음이다. 사실 <마약왕> <PMC: 더 벙커> <스윙키즈> 등 한국영화 3편 모두 참패해 한국영화 위기설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던 지난해 겨울 시장 결과를 감안하면 예상 밖의 흥행이긴 하다. 하지만 이하영 대표는 “<마약왕> <PMC: 더 벙커> <스윙키즈>를 보려던 관객이 영화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관람을 포기한 뒤 <극한직업>이 흥행하자 기다렸다는 듯 우루루 몰려들었다”고 <극한직업> 흥행 요인을 설명했다. 되돌아보면 지난 설 극장가는 <극한직업>이 시장을 독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극한직업>보다 한주 뒤 개봉을 택한 <뺑반>이 이미 흥행괘도에 진입한 <극한직업>에 밀려 흥행에 실패하면서 <극한직업>이 5일 동안 이어진 설 연휴를 독식한 뒤 2월에도 마땅한 경쟁작이 없자 4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해 개봉 15일 만에 천만 관객을 넘겼”(이하영)다. 무엇보다 무겁고 어두운 역사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로 피로도가 높은 극장가에 부담없이 웃을 수 있는 정통 코미디가 오랜만에 나온 것도 흥행요인이다. 최재원 대표는 “<극한직업>의 어떤 점이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냈는지 아직도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며 “확실히 관객의 니즈를 파악하는 게 예년보다 어려워진 게 사실이다. 관객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관람 영화를 선택할 때는 획일적”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돈> <우상> <악질경찰>은 왜 비수기에 뛰어들었나
1년 52주(때때로 53주) 중에서 12주차에 해당되는 지난 3월, 극장가에서 진풍경이 벌어졌다. <돈> <악질경찰> <우상> 등 총제작비가 80억원이 넘는 한국영화 3편이 나란히 비수기에 뛰어들었다. 장르도 소재도 각기 다른 3편의 공통점이라면 원래 예정된 개봉 날짜에서 밀린 영화라는 점이다. <돈>은 지난해 여름 개봉예정이었고, <악질경찰>은 처음에는 2월 중순으로 정했다가 세월호 사건을 소재로 하는 <생일>이 이 시기에 끼어들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소재가 겹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3월로 개봉을 미뤘으며, <우상>은 후반작업이 길어지면서 공개가 늦춰졌다. 그렇다고 그보다 2주 앞선 10주차엔 <캡틴 마블>이, 그보다 4주 뒤인 16주차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3월 개봉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저마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손익분기점이 높은 세 영화가 비수기에 뛰어든 상황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하영 대표는 “세 영화 모두 더 많은 관객을 불러모을 수 있는 작품인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악질경찰>에 투자한 최재원 대표는 “그럼에도 <악질경찰>이 의미가 있다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가 배급한 영화 중에서 처음으로 IPTV 매출액(약 22억원)이 극장 매출액을 넘어선 점이다. 그만큼 안방에서 본 사람들이 많았다”고 아쉬워했다.
디즈니에 비수기는 없다? <알라딘> 역주행의 의미
누가 4월을 비수기라고 했나. <아이언맨>(2008)을 시작으로 마블 유니버스가 점령해온 4월은 비수기 꼬리표를 뗀 지 오래됐다. 지난해 무려 6개월 동안 장기 상영한 <보헤미안 랩소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올해 5월 개봉한 <알라딘> 또한 역주행의 신화를 썼다. 이 영화는 첫주 80만여명을 불러모으기 시작해 입소문이 퍼지면서 천만 관객을 불러모았다. 이하영 대표는 “<알라딘>이 역주행할 수 있었던 건 음악 때문”이라며 “O.S.T가 좋은 덕분에 극장에서 관객이 함께 노래 부르고, 그게 하나의 문화가 되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분석했다. 최재원 대표는 “박정민 배우가 힙합을 해서 화제가 된 <변산> 같은 한국영화가 있지만 흥행까지 이어가진 못했다”며 “유명한 배우가 노래까지 부르는 할리우드영화와 달리 여전히 한국에선 배우가 노래까지 하는 부분에 대해 기획 단계에서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2020년에도 디즈니의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1월(<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 <스파이 지니어스>), 2월(<조조래빗>), 3월 (<온워드> <뮬란>), 4월(<블랙 위도우>) 등 상반기에 디즈니 영화가 매달 한두편씩 포진해 있어 한국영화가 피해갈 자리를 찾기 힘들다. 올해 천만 영화 5편 중에서 무려 3편(<어벤져스: 엔드게임> <알라딘> <겨울왕국2>)을 배급한 디즈니에 비수기는 없다.
현재 시장은 한국영화에 불공정한가
관객과 멀티플렉스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제작비가 상승하는 반면 한국영화 수익률은 점점 떨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디즈니를 포함한 할리우드영화가 매달 한두편씩 개봉하는 상황에서 한국영화는 개봉할 만한 자리가 한정되어 있다. 하필이면 한국영화 시장은 스크린독과점이 가능하다. 관객은 스크린이 많이 배정된 영화들을 보고 나면 피로도가 쌓여 다른 영화를 잘 찾지 않는다. 잘되는 영화는 더 잘되고, 안되는 영화는 손익분기점조차 넘기기 힘든 양극화현상이 벌어지고있다. 또 젊은 관객은 넷플릭스를 포함한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몰려간다. 최재원 대표는 “결국은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과연 공정한 게임인가 싶다. 할리우드처럼 사이즈 경쟁을 하는 게 맞는지, 사이즈 경쟁을 했을 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 아니면 제작비를 낮출 건지 등 어떤 고민을 해도 지금 산업 질서가 공평한 게임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하영 대표는 보통 2주 만에 700만 관객을 동원했다며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결국 한국영화는 할리우드에 잠식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앙꼬 없는 찐빵, 여름 시장이 싱거웠던 이유는
30주차인 7월 말부터 시작되는 여름 시장은 한해 가장 많은 관객수가 쏟아지는 성수기다. <알라딘>과 <기생충>이 쌍끌이 흥행을 이끌며 나란히 천만 영화가 된 5월 말, 6월 초와 달리 <나랏말싸미> <엑시트> <사자> <봉오동 전투>가 개봉한 올해 여름 시장은 경쟁이 다소 싱거웠다. “영화가 세지 않으면 죽는 자리”인 30주차에 먼저 개봉한 <나랏말싸미>는 SNS에서 역사왜곡 논란이 불거지면서 일찌감치 경쟁 레이스에서 떨어져나갔다. “30주차는 <부산행> <암살> 같은 영화가 아니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자리”(이하영)라는 얘기가 나온 것도 그래서다. 그다음 주인 31주차 <엑시트>와 <사자>가 같은 날 ‘박치기’했고, 결국 <사자>가 졌다. <엑시트>가 승승장구하는 사이, 여름 시장에 가장 늦게 개봉한 <봉오동 전투>가 환경훼손 논란이 있었음에도 478만여명을 불러모았다. 최재원 대표는 “개봉한 뒤 2주 안에 승부를 봐야 하는 현재의 배급 시스템이 과연 언제까지 유지되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든다”며 “개봉 첫주에 흥행 여부가 결판나는 지금 시스템에선 과거에 구사하던 ‘2등 전략’(흥행이 기대되는 영화와 나란히 개봉해 매진 때문에 흥행작을 보지 못한 관객이 다른 영화를 관람하는 현상.-편집자)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하영 대표는 “스크린독과점이 가능한 시장인 까닭에 1, 2주차 승부를 보려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얘기한 낙수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신생 배급사는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나
영화산업은 일반적으로 진입장벽이 높다. 지난해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이하 에이스메이커), 메리크리스마스 등 신생 배급사들이 충무로에 뛰어들었을 때 화제가 된 것도 그래서다. 올해는 이들의 본격적인 시험대였다. 에이스메이커는 <악인전>(336만여명), <변신>(180만여명), <블랙머니>(247만여명)를 개봉시키며 선전했고, 메리크리스마스는 <내안의 그놈>(191만여명), <양자물리학>(55만여명)을 개봉시키며 만만치 않은 데뷔전을 치렀다. 특히 이들을 포함한 작은 배급사들이 몰린 시기가 가을이었다. “시장은 독과점이 공고해졌고, 디즈니가 상수로 작용하면서 나머지 배급사들이 11월 같은 작은 시장에 몰려 제 살 깎아먹기식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최재원). 에이스메이커와 메리크리스마스 같은 신생 배급사들의 새롭고 다양한 시도가 시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기득권을 가진 기존 플레이어들은 더이상 새로운 시도를 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시장에 진입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 한국 영화산업은 다양한 시도를 하기에 까다로운 시장이다. 그러다보니 시장은 악순환이 되어가고 있고, ‘한국영화는 뻔하다’라는 인식이 관객에게 박히고 있”(이하영)다. “독과점 시장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신생 배급사들이 많아지는 현상 속에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얼마나 담보할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대기업과의 경쟁은 계속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최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