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애틀랜틱스>가 선보이는 이미지의 힘
2020-03-12
글 : 홍은미 (영화평론가)
당혹스럽고도 신비로운 그 바다

<애틀랜틱스>를 관람한 이들은 아마도 비슷한 이유로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 것이다.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를 기어이 찾아보고자 했다면, 거기엔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경력이 많은 부분 흥미를 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티 디옵은 그 이름이 익숙하지 않을 뿐, 이미 단편 작품들로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클레르 드니의 <35럼 샷>(2008)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네갈의 대표적인 감독이자 시인이었던 지브릴 디옵 맘베티의 조카인데, 그가 만들었던 <투키 부키>(1988)를 모티브로 해 <천개의 태양>(2013)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감독의 수상 경력이나 유명세가 아니다. 세네갈계 프랑스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지니고 있을 감독의 깊은 정체성이 <애틀랜틱스>의 기저에 깔려 있음을 우선 언급해야 할 것 같았다. 더욱이 동명의 단편 다큐멘터리 <아틀란틱>(2010)을 극영화로 만들었을 때 왜 이 작품이 이야기를 입고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는지 잠시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빼어난 촬영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

열기 가득한 대지 위에 거대한 건물 하나가 아스라이 서 있다. 빌딩 옆으로는 언뜻 봐도 규모가 꽤 커 보이는 건물들이 새로이 들어서고 있고, 수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작업하고 있다. 흙바람 휘날리는 허허벌판 위에 서 있는 건물들. 아마도, 지금 저곳에서 땀을 쏟아내고 있는 세네갈의 젊은이들이 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마천루에 진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노동의 대가로 받는 푼돈으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이다. 그래서였을까. <애틀랜틱스>는 그들의 벌거벗은 땅과 그보다 더 벌거벗겨진 그들의 상황을 예민하게 비추며 여정을 시작하고, 세네갈계 프랑스인인 마티 디옵 감독은 자신에게 특별한 임무라도 주어진 듯 세네갈의 사회문화적 여건과 상황을 치밀하게 다룬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카메라가 다카르의 절망적인 땅 바로 곁으로 펼쳐져 있는 바다를 비추는 순간, 섣불리 이 영화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게 된다. 다만, 부서지는 파도 앞에서, 우리의 온 감각을 압도하는 바다의 풍광 앞에서 우리는 직감하게 된다. 불길하고도 신비롭고 끝내 속을 알 수 없는 이 바다가 <애틀랜틱스>를 요동하게 만들 것이라고. 그러나 이 영화의 바다를 말하기 위해선 거쳐야 할 경로들이 있다. 이 바다와 인물들과 영화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애틀랜틱스>는 시종 흥미롭고도 당혹스럽다. 서사엔 빈틈이 많고 영화의 무드는 급격히 변하며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간다. 우리는 이 영화의 장르를 정확히 짚어 말할 수 없을뿐더러 어느 순간 장르의 경계를 분간해보는 게 유용한 작업이기는 한 것인지 묻게 된다. 세네갈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차곡차곡 집적하는 가운데 절절한 로맨스를 펼쳐놓고, 별안간 초자연적인 현상도 끼워넣는 이 영화의 종잡을 수 없는 행보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대뜸 묻고도 싶다. 도대체 어떤 영화가 되려는 것일까?

예컨대 영화 중반에는 서사를 강하게 흔들어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갑자기,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유럽을 향해 바다로 나갔던 슐레이만과 그의 친구들이 망령이 되어 다카르에 돌아오는 사건이 그것이다. 사실 이 사건 자체가 놀랍다고 보기는 힘들다. 남자아이들이 위태로운 바다로 향했을 때부터 불길한 사건은 예견된 것이었고, 그들이 망령이 되어 돌아온다면 생사 여부를 확인할 길도 없이 망망대해를 떠도는 것보다 조금은 위안이 되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화는 불가해한 현상이 응당 일어날 수 있는 양 시침 뚝 떼고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놀라운 건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상황이나 재빠른 장르 전환이 안기는 매혹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눈길을 끄는 건 어떤 장르로 변주되더라도, 영화에 어떤 판타지가 개입되더라도 시종 유지되는 인물들의 초라함에 있다. 이를테면 남자아이들의 망령이 그들의 누이 혹은 연인과 친구들의 신체에 빙의된 모습은 보기 민망할 정도다. 이젠 허술한 오컬트영화라도 시작된 것인가 싶다가도, 악덕 업주에게 체불된 임금을 요구하는 망령들의 행동이 너무나 천연덕스러워, 자신들의 죽음에 스스로 제의를 치르려 하는 이들이 오히려 애처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잔잔한 물결에서 느껴지는 초자연적 힘

그런데 이 망령들의 귀환 후 전개되는 서사엔 수상한 점이 하나 있다. 슐레이만은 그들의 제의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여성이 아니라 형사 이사(아마두 음보우)의 몸을 빌려 사랑하는 아다(마메 비네타 사네)와 다시 조우한다는 것이다. 슐레이만이 이사의 몸을 빌리는 이유는 그것이 우선, 재계와 공권력의 은밀한 결탁을 효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서사적 장치가 되기 때문일 것이며, 미스터리한 사건을 추적해갈 수 있는 수사극의 용이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이사의 직업보다 그가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목적은 쓸쓸한 제의를 올리는 데 있지 않고 아다와의 신체적 결합에 있다. 물론 우리는 슐레이만이 원하는 신체적 결합을 성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아다와 이사의 몸을 빌린 슐레이만의 섹스는 아다가 억압적인 제도에 저항하는 또 하나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의식을 위해, 아다가 이 절망적인 땅에서조차 삶의 주체로서 우뚝 서는 지점까지 다다르기 위해, 영화는 서사에 내재한 모든 결함을 안고서 뚜벅뚜벅 걸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언뜻 빈약해 보이는 서사에 대해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르게 말하면 서사의 논리가 빈약해질수록 활성화되는 이미지, 그중에서도 바다의 표면이 비치는 이미지의 활동에 대해서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애틀랜틱스>를 보고 있으면 어느 누구라도 이 영화의 빼어난 촬영술에 감탄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니, 클레르 마통이 카메라를 잡은 이상 우리는 그녀의 능력을 기술로만 한정시켜 말할 수 없다. 자연의 야성과 관능성, 때로는 자연풍경이 품고 있는 불길한 무드마저 일깨워내며 개별 장소가 지닌 고유의 성격까지 단번에 바꿔버리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촬영감독이기 때문이다.

<애틀랜틱스>에서 초자연적인 힘이 강력하게 느껴질 때는 망령이 빙의된 소녀들이 거리를 활보할 때가 아니라, 카메라가 바다의 잔잔한 물결을 비추고 있을 때다. 해안가에서 부서지는 파도가 자연의 위력을 체감케 한다면, 깊은 바다에서 이는 잔잔한 물결은 젊은 생명들을 삼켜버리고도 침묵하는 초자연의 위력을 절감케 한다. 우리는 여기서 깊은 바다의 물결이 언제 처음 등장하는지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슐레이만이 아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도 못한 채 바다를 향해 시선을 보내는 때다. 이 순간 그가 보고 있는 바다는 두 연인 뒤로 성난 파도를 일으키던 그 바다가 아니다. 잿빛 하늘과 맞닿아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바다며, 마치 주술을 걸어오는 듯한 바다다. 그리고 아다의 꿈속에서 또는 황혼녘에 불길한 기운을 무섭게 뿜어내는 바다로 변모해 드러나기도 하는 바다다. 이 ‘애틀랜틱스’는 영원히 침묵할 것이다. 그 침묵을 잠시나마 깨우기 위해서라도 마티 디옵은 <애틀랜틱스>로 ‘애틀랜틱스’를 대면하기 원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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