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2019 한국영화 진단 연속 기획➊ - 상업영화가 놓치고 지나간 것들
2020-01-07
글 : 송경원
감독이 사라진 자리

과거는 기록으로 묻어두면 지나간 일에 머물지만 다시 꺼내어 말하는 순간 현재로 거듭난다. <씨네21>에서는 2019년 한국영화를 비평적인 관점에서 진단하는 3주간의 연속 기획을 준비했다. 논의의 결을 다양하게 하기 위해 대상을 상업영화, 독립영화 그리고 영화 영토 최전선의 포스트 시네마로 구분하여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 1237호에 한국 상업영화를 중심으로 2019년을 되돌아봤다. 1238호에서는 김소희 평론가가 한국 독립영화의 현주소와 여성감독의 약진에 대해 분석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1239호에선 김병규 평론가가 김응수, 임흥순 감독 등 포스트 시네마라 불리는 작업들을 중심으로 변모하는 시네마의 풍경에 대한 고찰을 진행할 것이다. 이번 연속 기획은 <씨네21>이 영화 저널리즘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자 한 고민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영화시장의 상업적 판단과 필요를 중계하거나 안일한 시스템을 지적하는 것 이외에 더 할 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020년의 시작을 구태여 2019년 한국영화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하는 건 새삼스런 평가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 글은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패턴에 기대 받아쓰기를 답습해왔을지도 모를 <씨네21>의 반성문이자, 혹여 놓치고 지나갔을 영화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한 탐색이다. 부디 이 글들이 촉매가 되어 2019년 간과된 영화들에 대한 논의가 다시금 활발해지길 기원한다. 그리하여 지나간 과거는 다가올 미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패턴에 기대면 몸이 편하다. 편한 만큼 게을러진다. 이맘때면 연례행사인 양 한국영화 위기설이 피어오르는데, 이제는 없는 게 어색한 경고의 목소리들은 위기를 일상화시켜 끝내 무감각하게 만들어왔다. 한국영화 앞에 붙는 위기라는 수식어는 어쩌면 영화산업을 향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때 되면 울리는 휴대폰 알람 같은 위기설은 영화 저널리즘 입장에서 일종의 의무방어전 냄새가 난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다. 이른바 작가 감독들의 개성이 폭발했던 2000년 초반 황금기를 지나 기획영화들이 쏟아져나온 결과 찍어낸 것마냥 비슷한 영화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산업의 외연이 확장되고 흥행이 거듭될수록 영화의 미학적 긴장은 흩어지고 안이한 결과물들이 용인되는 사태. 그렇게 예술로서의 영화를 향한 모험은 사라지고 패턴이 반복된다. 하지만 패턴의 함정에 빠진 건 매년 똑같은 문제를 지적하는 영화 저널리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문제를 지적당하는 쪽과 제기하는 쪽 모두 고민과 발버둥을 미뤄둔 사이 ‘한국영화’라는 고유한 정체성은 사이좋고 평화롭게 가라앉아가는 중이다.

<기생충>이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기생충>이 있는데 웬 엉뚱한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사실 진짜 위기는 지난해에 감지됐다.(결과가 주는 충격과는 별개로) <리얼> 같은 위험한 기획이 시장에서 걸러지지 않았고, <인랑>의 김지운 감독과 <버닝>의 이창동 감독 등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시장과 평단(특히 젊은 관객층)에서 예상 밖의 저항을 받았다. 예술영화 시장에서 안정적인 모델을 만들어냈던 홍상수 감독은 영화 외적인 문제로 입지가 좁아지기도 했다. 진정 심각한 건 2000년 초반 이후 홍상수, 이창동, 박찬욱, 장준환(넓게 잡아 나홍진까지) 등의 바통을 이어받아 장르적 관습을 부수고 자신의 색을 드러낸 감독이 점점 희귀해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1년 전만 해도 2018년을 변곡점으로 보고 2019년엔 본격적으로 우울한 지표들이 나타날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안이한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봉준호가 강림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찾아온 <기생충> 덕분에 2019년은 한국영화 100주년에 걸맞은 성과를 거뒀다는 변명의 여지를 확보했다. 착시를 불러일으킬 만한 수치도 있다. 흥행 면에서 2019년은 역대 가장 많은 관객이 극장가를 찾았을 뿐 아니라 천만 영화가 다섯편, 그 중 두편이 한국영화였고 <엑시트>도 거의 천만명에 근접한 940만 관객을 동원했다. 질적인 면에서도 가능성을 엿보인 한해였다. 상업영화가 고만고만한 이야기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찍어내는 사이 <벌새> <메기> <아워 바디>처럼 형형색색 개성으로 빛나는 옹골찬 독립영화들도 씨앗을 틔웠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기억에 남는 영화들을 꼽아보니 예년에 비해 그리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무엇보다 흥행과 평단 양쪽의 찬사를 한몸에 받은 <기생충>이 있다. 다소 견해가 갈릴 순 있어도 <기생충>이 장르와 작가적 비전 사이에서 독창적인 균형을 잡아낸 영화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올해 역시 위기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그 범주를 상업영화에 대한 피로도와 신뢰의 상실로 좁혀서 접근해보자. 위기란 단어가 인이 박인다면, 살짝 주관적인 감상을 더해 ‘재미가 없다’고 해도 좋겠다. 애초에 흥행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영화가 없는 만큼 ‘상업’영화의 기준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여기서는 우선 일정 규모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되어 이른바 ‘대중의 감각’을 고려하고 기획된 영화들 위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상업영화로 인지되는 그 결과물들이 더이상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몇해 전부터 시즌을 공략하는 한국 상업영화에 대한 흥미를 급격히 잃어가는 중이다. 굳이 보지 않아도 소재와 예고편만 보면 대강 짐작이 가능하고, 이야기가 다르다는 걸 제외하면 형식적으로는 분간이 거의 힘들 정도로 엇비슷한 영화들로 넘쳐난다. 솔직히 말해 동어반복의 이미지에 질려버렸다. 한국 상업영화에는 감독이 없다. 정확히는 감독들이 주어진 기획 아래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자본이 커질수록 정해진 공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게 당연한 일이라는 걸 감안하고서라도 끝나고 나서 감독의 이름이 기억에 남는 영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작가 고유의 언어가 독창적인 형식으로 구현되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만약 감독이 제작 공정의 일부에 머무는 데 저항하지 않고 스스로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데 동의한다면 심각한 문제다. 감독이 바뀌어도 영화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고 느껴지는 영화가 점점 늘어난다. 반대로 분명 다른 감독이 만든 영화들인데 장면마다 기시감을 느끼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다시 말해 감독‘의’ 영화가 사라지는 중이다. 2019년 한국영화를 하나의 현상과 맥락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기생충>은 오히려 방해물이다. 이것은 평균을 내는 작업이 아니며 <기생충>이 한국영화 전체를 구할 순 없다. 우리는 차라리 <자전차왕 엄복동>의 실패에 주목해야한다.

<자전차왕 엄복동>(이하 <엄복동>)은 한국 상업기획영화가 가진 패턴들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영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영화는 관객에 의해 저평가받았다고 생각한다. 여느 때라면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았을 테지만 판단 이전에 이미 조롱과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물론 <엄복동>은 범작도 되기 힘들 만큼 만듦새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전개, 남발되지만 충족되진 않는 볼거리, 평면적인 캐릭터 등 소재에 의지한 기획영화의 패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답습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건 이 정도로 기본적인 만듦새에 문제가 있는 영화가 그렇게 드물지도 낯설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건 <엄복동>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거의 대부분의 기획영화들이 지닌 태생적 한계다. 즉 <엄복동>은 의도치 않게 한국 상업기획영화의 착각과 환상을 여실히 드러내는 리트머스지 역할을 해버렸다. <엄복동>에도 있을 건 다 있다. 신파, 액션, 실화 바탕의 사실성 등은 동전의 양면처럼 성공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엄복동>의 경우 평균 이하의 완성도로 이 모든 장점과 가능성들을 죽이고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만을 그야말로 살뜰하게 쓸어 담는다. 개별로 보면 조금씩 처지고 아쉬운 정도인데, 합쳐놓고 보면 관객의 수준을 무시하는 건가 싶을 만큼 구태의연해지는 참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엇비슷한 기획영화에 이미 지친 관객은 예고편만 보고도 이 영화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엄복동>을 둘러싼 일련의 현상은 일말의 기대조차 사라진 한국 상업영화에 대한 피로와 반작용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감독의 증발로 인한) 내러티브에 대한 멸시와 스타일의 부재가 자리한다. 2019년 한국 상업영화는 관객에게 지나친 관용을 바라고 있다.

기계적인 조립과 나열, 실종된 내러티브

개별 영화에 대한 세세한 분석을 다루고 싶은 욕심이 있지만 지면 관계상 큰 맥락의 흐름만 짚고 넘어가겠다. 슬픈 예감이지만 지금부터 거론될 한계들은 2020년에 양산될 영화들에서도 계속 지적될 것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규모가 큰 영화일수록 감독이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작아진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카메라 만년필설’은 사실의 분석이 아니라 그랬으면 하는 희망사항 혹은 물살을 거스르겠다는 저항에 가깝다. 영화는 당연히 집단 창작이다. 하지만 제한된 조건, 정해진 틀 안에서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 자신의 색깔로 물들이는 이들이 있다. 2000년 초반 한국영화에서 발견되는 그 발버둥을 우리는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라는 고유명사로 기억한다. 하지만 현재 기획영화에는 그와 같은 저항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정해진 공정과 이야기의 조립이 있을 뿐이다. 시즌을 공략하는 영화일수록 이 경향이 두드러진다.

올겨울 극장가를 공략하는 <백두산>과 <천문: 하늘에 묻는다>(이하 <천문>)를 예로 들어보자. <백두산>은 종합선물세트다. 재난영화를 뼈대로 남북한의 첩보물, 총격 액션, <인간극장>류의 신파, 곰살맞은 개그까지 알뜰하게 들어차 있다. 2시간 동안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한 당연한 공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구성요소들이 하나의 맥락과 호흡으로 꿰어져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에피소드식으로 나열, 전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간신히 영화의 꼴을 갖추고 있을 뿐, 한편의 내러티브라고 보기 어렵다. 비유하자면 각 파트들을 개별 제작하여 기계적으로 조립한 조악한 형태인데 연결의 이음매마저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 내내 거슬린다. 적어도 한편의 영화가 되고자 한다면 그 이음매를 지워 매끄럽게 봉합하려는 노력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백두산>은 이 단계를 수시로 건너뛴다. 가령 만삭의 임신부인 최지영(배수지)이 차와 함께 물에 휩쓸린 후 아무렇지 않게 수영을 해서 빠져나온다. 그게 가능하냐는 지적을 하는 게 아니다. 이미 보여줘야 할 것이 정해져 있기에 중간 과정의 설득을 수시로 생략해버리는 영화의 태도가 문제다. 마치 이 정도는 장르적 허용으로 인정해달라는 듯 던져두고 책임지지 않는 장면이 도처에 깔려 있다. 이야기의 개연성을 이야기 안에서 ‘발생’시키는 게 아니라 이야기 바깥에서 ‘납득’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내러티브의 조립이라는 측면은 해외영화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시네마틱 유니버스 전체로 촉수를 뻗어 개별 장면들을 조립한 결과물이고, 이는 원작이 있는 콘텐츠에서 수시로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의 영화가 되기 위해선 이를 하나의 톤으로 연결시켜나가는 것이 감독의 최소한의 역할인데, <백두산>을 필두로 한 2019년 한국영화들은 구슬만 잔뜩 만들어두고 정작 이를 꿸 실이 사라진 건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천문>은 재미있는 균열을 드러낸다. 이 영화 역시 기계적인 조립요소가 다분한데 특히 코미디를 담당하는 선공감 삼인방(김원해, 임원희, 윤제문)의 분량은 굳이 허진호 감독의 손길이 아니라도 상관없는 사족 같은 장면들이다. 이 장면들을 고스란히 다른 영화에 갖다붙인다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한국영화의 습관 같은 장면들. 짐작건대 감독은 이런 순간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반면 허진호의 고심이 묻어나는 장면들도 있다. 영화 초반부 장영실(최민식)이 천문의기를 불태우라 명령한 세종(한석규)을 찾아가 읍소하는 장면에서 장영실은 냉정히 돌아서는 세종에게 “이럴 거면 왜 내게 하늘을 보라 하셨소!”라며 일갈한다. 핵심적인 대사인 만큼 장영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거나 감정을 전시하고픈 욕심이 날 법도 하건만 영화는 장영실을 포커스 아웃시키고 세종의 시점에서 그 애달픈 목소리조차 희미하게 들리도록 처리한다. <천문>에는 코미디 장면처럼 방치된 순간들과 함께 이렇게 의도적으로 ‘비껴 찍은’ 장면들이 꽤 있다. 감독 허진호와 연출을 의뢰받은 기능장 허진호가 묘하게 섞여 있는 그 희한한 조합. 기계적 조립의 의무방어전을 최소한으로 해내고 그 안에서 나름의 포인트를 찾아낸 것 같은 발견들. 그나마 이 정도의 개성과 형식에 대한 고민을 드러낸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할 만큼 한국 상업영화 시스템에서 감독의 존재는 점차 투명해지고 있다.

가뭄 중에 기억에 남는 건 어떤 식으로든 감독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영화들이다. 상반기 흐름을 뒤집어버린 <극한직업>은 이병헌 감독이 꾸준히 해오던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경찰공무원이 자영업자가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이 영화는 이병헌 특유의 말맛이 살아 있다. 여름 시장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엑시트> 역시 청춘들의 현실을 재난에 빗대어 핵심만 간략하게 추린 간결함이 돋보이는 영화다. 이 영화들은 장르의 클리셰를 따오는 가운데도 감독의 시선과 특유의 호흡이 살아 있는, 뚝심의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물론 상대평가라는 것을 감안해주길 바란다. <극한직업>도, <엑시트>도 결정적인 순간에서 주저하며 후반으로 갈수록 감독 본인의 색을 흐리고 만다. 그럼에도 이 영화들은 최소한의 호흡이라 할 만한 것들을 가지고 간다는 점에서, 아니 적어도 스타일에 대한 고민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평가받아 마땅하다. 동시에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한다는 사실이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짐작게 한다. 하향평준화를 향해 침몰해가는 거대한 배 안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의 눈높이와 기대치도 함께 가라앉는 중이다.

더 많은 실패가 필요하다

한국 상업영화 기획의 결정적인 문제는 덜 실패하는 쪽에 판돈을 건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장점을 키우기보다 실수를 줄이는 쪽으로 작동했을 때 창작자의 개성은 모난 돌마냥 깎여나갈 수밖에 없다. 사업적인 입장에선 당연한 거지만 대중영화는 사업인 동시에 예술이기도 하다. 한쪽을 포기하기 시작했을 때 배가 뒤집히는 건 순식간이다. 때문에 우리는 <봉오동 전투>나 <뺑반> 같은 기획영화의 안일함을 지적하는 한편 <증인>이나 <생일> <미성년> <암전> 같은 시도들을 기억해야 한다. 자극적이지 않은 소재로도 얼마든지 단단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증명한 <증인>, 이제야 세월호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대중적으로 전달할 것인지 제대로 된 거리감을 확보한 <생일>, 모범적인 사례라 해도 좋을 만큼 연기의 결을 살려낼 줄 아는 <미성년>, “야심 없는 소품에 가깝지만 한국 호러 마니아의 장르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잘 드러난 작품”(듀나)인 <암전>은 흥행과 별개로 의미 있는 시도이자 모험이었다. 흥행까지 이어진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이 영화들은 천만이라는 천박한 환상이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필요한 만큼의 목표치를 향해 달려갈 줄 아는 뚝심 있는 기획력이 돋보인다. 결국 감독이 색을 드러낼 수 있었던 건 이를 허용해준 기획의 방향 덕분이기도 하다. 흥행과 작품성, 대중과 예술 사이에서 균형을 맞춘다는 건 서로 양보하는 타협의 의미가 아니다. 덜 실패하는 쪽, 몸이 편한 쪽으로 기대기 시작하는 순간 영화는 사라지고 상품만 남는다. 적어도 이들 영화에는 대중성과 작가성, 양쪽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긴 충돌의 흔적들이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이미지의 진실성을 탐구하는 감독의 고뇌이자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이다. 창작자가 존경하지 않는 영화를 관객이 존경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한국 상업영화가 관객을 존경하지 않는데, 관객이 한국 상업영화를 낮춰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다시 언급되어야 할 영화로 <우상>과 <사바하>를 꼽고 싶다. 두 영화의 결은 약간 다르지만 의미 있는 실패라는 점에서 2019년의 영화로 재발견되어야 한다. <우상>은 흥행과 평단 양쪽에서 버림받았는데, 적어도 영화 비평 쪽에서는 좀더 논쟁적으로 다뤄졌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감독의 비전을 통제하지 못한 기획의 실패라는 점에 한국 상업영화의 전형적인 패턴과 정반대로 가는 희귀한 전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한편 <사바하>는 장르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는 감독의 중력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장르의 틀과 매력을 유지하되 어떻게든 자신의 몸에 맞게 비틀어내는 것. 비슷한 패턴을 따르는 가운데 한끗 차이가 나는 것. 무엇보다 마치 지문과도 같은 각자의 호흡을 유지하는 것. 영화의 영토는 그 치열한 고민으로 조금씩 넓혀져왔고, 영화의 역사는 무수한 실패들의 축적으로 유지된다. 굳이 덧붙이자면 이러한 실패의 퇴적물들을 다시 꺼내고 다듬어 재발견될 수 있도록 소개하는 것이 영화 저널리즘의 몫이다. <우상>의 실패를 비판하긴 쉽다. 하지만 ‘의미 있지만 아쉬웠던 시도’라는 상투적인 용어로 적당히 얼버무리는 순간 이것은 지나간 기억으로 박제되어버린다. <우상>에 대한 비평적 분석은 이 영화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무모한 실패들이 더 나올 수 있도록 북돋는 쪽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엄복동>을 조롱하긴 쉽다. 하지만 나는 한 사람의 관객이자 영화 저널리즘 종사자로서 반대의 목소리도 듣고 싶다. 만드는 쪽은 물론 관람하는 쪽에서도 더 많은 패턴의 의견과 이야기들이 나와야 한다. 감독의 존재감이 사라져가는 한국 상업영화에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저항하는 유일한 수단은 보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찬사든 불만이든 우리에겐 더 많은 실패와 함께 그것을 지지해줄 당신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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