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포스 타임
2020-01-08
글 : 김혜리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의 결정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대혁명 전의 18세기 프랑스.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귀족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상대에게 보낼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고용된다. 모델 서기를 거부하는 엘로이즈를 속이기 위해 산책 동무로 가장한 마리안느는 바람 속을 걸으며 엘로이즈를 이루는 무수한 선을 눈으로 더듬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고정된 자세와 시선으로 정념을 그린다. 툭 터진 자연 앞에 던져진 엘로이즈의 고독하고 단단한 실루엣은 카스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낭만적 풍경화를, 침묵 속에 봉인된 열정을 상상하게 하는 여자의 뒷모습은 덴마크 화가 함메르쇼이의 실내 그림을 생각하게 만든다(그림은 <젊은 여자의 뒷모습이 있는 실내>(1904, 빌헬름 함메르쇼이), <여인과 석양>(1828, 카스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 위 왼쪽부터).

12/24

“포스는 선택받은 자한테만 있거든?” “지금이 몇 세기인데. 아니거든?” “맞거든?”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 이하 <깨어난 포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2017, 이하 <라스트 제다이>), 그리고 오늘 국내 시사를 가진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이하 <스카이워커>)의 흐름을 제일 짧게 요약한다면 위와 같을지도 모른다. <깨어난 포스>로 오리지널 3부작의 공식을 증보하고 차세대 캐릭터들을 성공적으로 소개한 J. J. 에이브럼스 감독은 시퀄 3부작의 피날레 <스카이워커>에서도 재차 안전한 노선을 택했다. 기본적으로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1977)을 리믹스한 <깨어난 포스>의 보수성은 팬덤의 향수를 채우고 스페이스오페라의 매혹을 상기한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3편인 <스카이워커>가 <라스트 제다이>가 반영한 동시대 정신과 확장된 가능성을 못 본 척하는 광경은 상당히 허망하다. 감독 J. J. 에이브럼스는 라이언 존슨의 <라스트 제다이>를 개별 영화로서 싫어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없었던 셈 칠 수는 없으며 완결편의 작가/연출자로서 2편이 제기한 안티테제를 수용한 합명제를 냈어야 했다. 그러면 <라스트 제다이>는 무슨 일을 했나? 라이언 존슨 감독의 작업은 일종의 우상 파괴였다. <라스트 제다이>는 우리가 긴가민가하면서도 따지길 망설인 <스타워즈>의 반복되는 모호한 요소들에 대해 또박또박 질문하고 답을 냈다. 포스는 바위를 들어올리는 염동력인가? 선택받은 자에게 유전되는 특권인가? 왜 모두 제다이를 애타게 찾는가? 광선검으로 퍼스트 오더를 물리치라고? 저항군은 무오류일까? 그리고 이 물음 중 일부의 씨앗은 J. J. 에이브럼스의 <깨어난 포스>가 뿌린 것이다.

<라스트 제다이>의 가장 급진적 혁신은 포스의 배타성을 제거하고 은하계의 정의와 평화는 스카이워커 가문만이 아닌 모든 선하고 용감한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소명이라고 명시한 것이었다. 심지어 카일로 렌(애덤 드라이버)은 평생 가족을 기다려온 고아 레이에게 너의 부모는 보잘것 없을 뿐 아니라 술값을 위해 딸을 판 인간들이었다고 못박았다. 즉 라이언 존슨은 경멸할 만한 인간이 너의 뿌리라 해도 그 사실이 네가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정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새 세대의 어린 관객에게 타전한 것이다. 그러나 <스카이워커>는 부제가 노골적으로 예고하듯 레이의 혈통을 스토리의 결정적 열쇠로 끌어옴으로써 <스타워즈>를 타고난 강자들이 이끄는 선악 이분법의 전쟁담으로 돌려놓는다. 레이의 남다른 힘은 그의 정직성과 용기, 관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가부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상속 재산이다(라이언 존슨이 <라스트 제다이> 직후에 만든 살인 미스터리 <나이브스 아웃>은 물려받은 재산을 상속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해로운 악으로 그린 바 있다). 카일로 렌의 대립항이자 파트너가 되려면 ‘아무나’로는 부족한 것이다. 레아 오르가나 제독(캐리 피셔)이 레이(데이지 리들리)에게 준 “네가 누군지 두려워하지 마라”는 조언의 의미는 변질됐다. 이 선택은 정치적 입장의 견지에서만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다. 1, 2편에서 스스로 경험하고 배우며 성장해온 레이 의 정체성은 3편에서 타인의 설명으로 규정돼버리고, 캐릭터로서 지녔던 뉘앙스도 축소됐다. 아마도 현실적인 제작 여건도 작용했을 것이다. 시퀄 3부작의 정신적 지주는 레아다. 공주에서 장군으로 거듭난 레아는 루크 못지않은 제다이이자 은둔한 루크나 남편 한 솔로와 다른 리더십으로 반군을 이끈다. 오리지널 3부작이 루크와 아버지의 대결이라면, 21세기 3부작은 카일로 렌과 어머니의 관계 해결, 그리고 레아가 거둔 레이의 성장이 양축을 이룰 거라 예상됐다. 그러니 캐리 피셔의 때이른 타계는 3부작의 궤도를 불가피하게 흔들었을 터다.

12/25

<스카이워커>는 아주 많은 행성(star)과 전투(war)가 등장한다는 면에서는 일부 팬들을 만족시킬지도 모른다. 갑작스런 부활을 은하계에 공지한 황제 팰퍼틴은 시스의 복수를 선언하고 반군은 그의 소재를 찾아 나선다. 전통대로 중요 인물이 칩거한 장소를 찾아낼 지도 내지 나침반 찾기에 1/3가량의 러닝타임이 할애된다. 3부작뿐만 아닌 ‘스카이워커 9부작’의 마무리를 짓는 이 영화는 무척 바쁘게 움직인다. 문제는 빠르기가 아니라 단조로운 리듬과 독창적 장면의 부재다. 마지막 40분의 플롯은 <스타워즈: 제다이의 귀환>과 거의 일치한다. 레이, 포(오스카 아이작), 핀(존 보예가) 삼총사는 한팀으로 움직이지만 대화할 틈 없이 계속 “다음은 거기로!” “위험해!” 같은 대사를 외치기 바쁘다. 인물로서 여정다운 여정을 갖는 캐릭터는 C3PO 정도다. 레이와 카일로 렌은 현상을 유지하고 포는 2편에서 장군들에게 배운 자질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불운한 핀은 하는 일마다 미수다. 레이를 향한 애정도 털어놓지 못하고 포스 감수성도 보일락 말락 한다. 무엇보다 핀은 2편에서 로즈(켈리 마리 트랜)의 고백을 들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처럼 행동한다. 로즈의 분량은 단역급으로 축소된 반면, 로즈가 있을 법한 자리에는 두명의 새 여성 캐릭터가 들어와 <라스트 제다이>로 악플러들의 미움을 산 로즈 대신 디즈니 플러스 채널의 시리즈에 등장시키려는 포석인가 짐작하게 된다. 제다이 사원을 불태우고 카일로 렌의 헬멧을 부숴버린 라이언 존슨과 반대로 J. J. 에이브럼스는 아이콘에 애착한다. 카일로 렌은 균열을 디자인으로 승화(?)한 새 헬멧을 착용하고, 광선검을 던져버렸던 루크의 영혼은 레이에게 제다이 물건을 조심히 다루라고 훈계한다. <스카이워커>는 스펙터클에 후하지만 대부분 기시감을 부른다. 카일로 렌과 레이는 지팡이를 든 볼드모트와 해리 포터처럼 포스 라이트닝을 겨루고 엘사가 그랬듯 파도를 타고 싸운다. 쓰러졌던 레이는 캡틴 마블처럼 일어서고 <로미오와 줄리엣>식 생사의 엇갈림도 따른다. 최근에는 <덩케르크>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목격한 우군의 감격적 총출동도 빠지지 않는다. <스카이워커>는 ‘스카이워커 사가’의 종장일 뿐 디즈니는 40억달러를 치르고 인수한 <스타워즈>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을 테고 개중에는 <라스트 제다이>에 응답하는 작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시퀄 3부작은 사랑스런 BB-8와 레이와 카일로 렌의 근사한 ‘은하계 페이스 타임’, 일명 포스 타임 장면을 애장 기념품으로 내게 남긴 채 타투인 행성 지평선 너머로 저물었다.

좋아요

D-O

<라스트 제다이>의 수훈갑 드로이드가 BB-8였다면 <스카이워커>의 MVP 드로이드는 저항군을 위해 크나큰 희생을 감수하는 C3PO다. 이번에는 짝꿍 C3PO와 R2D2 앞에서 다소 외로워 보였던 BB-8에게 파트너가 생긴다. 레이의 부모를 해친 시스 추종자의 전함에서 발견된 드로이드의 이름은 D-O. BB-8처럼 외바퀴 하반신을 굴려 이동하고 작은 안테나가 돋은 메가폰 모양의 머리를 얹은 생김새다. 오리에게 영감을 얻었다는 디자인과 동작은 디즈니-픽사의 마스코트 룩소 주니어와 월·E도 참고하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만든다. D-O의 능력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지만 은하계 표준어 ‘베이직’을 구사하며 예민하고 내성적이다. 포인트 컬러는 녹색으로 오렌지색 BB-8와 잘 어울리며 J. J. 에이브럼스가 임시로 목소리 연기를 했다가 최종본에 남았다. 고장난 꼬마 드로이드의 바퀴를 고쳐준 레이는 D-O가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를 지녔음을 대번에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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