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포드 v 페라리>를 통해 드러낸 미국 영화산업의 본질
2020-03-12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자동차산업과 영화산업의 상관관계

<포드 v 페라리>(2019)의 배경인 1960년대 중반은 레이싱 장르의 영화가 폭발했던 시기다. 1966년 존 프랑켄하이머가 <그랑프리>로 금자탑을 세운 뒤, 레이서로도 유명한 폴 뉴먼의 <위닝>(1969)이 나왔고, 그들에게 질세라 스티브 매퀸은 <르망>(1971)의 주인공을 고집했다. 만듦새에서 <위닝>이 다소 밀리는 편인데, <그랑프리>와 <르망>은 양극에서 레이싱 영화에 접근했다. 전자가 첨단의 시청각 표현에 낭만적인 톤을 더했다면, 후자는 르망 매뉴얼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사실적이고 건조한 레이싱영화였다. 두 영화에는 특이한 구석이 몇 가지 발견되는데, 그중 하나가 공히 언급하지 않는 이름이다. 레이싱카가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두 영화에서, 레이싱의 역사를 쓴 페라리가 계속 언급되는 것은 당연하다. 포르셰의 영광이 열린 즈음에 제작된 <르망>에서 매퀸이 포르셰를 모는 것도 수긍이 간다. 그런데 두 영화가 제작되던 시점에 실제로 ‘르망 24시’를 휩쓴 건 포드였다. 포드의 GT40 시리즈가 경주를 4회 연속으로 제패했음에도 영화 속에선 포드라는 이름이 들리지 않는다.

포드의 이름을 꺼내든 <포드 v 페라리>는 얼핏 포드가 일군 승리의 역사를 재현하는 듯하다. 페라리의 아성에 도전한 포드는 결승점에 자기들의 차 3대가 나란히 들어서는 환희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제임스 맨골드가 포드에 박수를 보내려고 연출한 것 같지는 않다. <포드 v 페라리>에서 그는 앞선 영화에 맞서기보다 적절하게 받아들이는 묘를 발휘했다. 경기 장면에서 <르망>이 진하게 느껴진다면, 소재와 주제 면에서는 <그랑프리>로부터 많은 걸 가져왔다. 그렇다면 선배 영화와 유사하다는 인상을 주어야 하는데 결과물은 딴판이다. 맨골드는 두 영화를 따랐으면서도 어느 한쪽도 닮지않은 영화를 내놓았다. 장르 감독으로서 그의 경지는 그렇게 드러난다. <포드 v 페라리>의 독보성은, 레이싱영화가 공식처럼 사용하는 데서 벗어나 참신한 영역을 일궜다는 데 있다.

장르의 틀을 벗어난 레이싱영화

역사적으로 레이싱이 남성 영역에 속했던 까닭에 레이싱 장르 또한 남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남성성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레이싱영화의 성격은 아이러니하다. 위험을 초래하는 죽음과 연인 역할의 여성을 끌어들여 장식처럼 갖다붙이는 것으로 남성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짜맞춘 과정처럼 사랑에 빠지고, 여성의 매력이 레이서로서 남자의 우월함을 증명한다. 죽음도 예외는 아니다. 레이서는 사고의 불안을 떨치기 힘든데, 그들에게 “죽음의 가능성 가까이 차를 몰아 삶의 격렬함을 더욱 느낀다” 같은 유의 멋들어진 대사가 주어진다. 죽음과 싸워 이긴 영웅의 이미지가 그들에게 써지는 거다. <포드 v 페라리>의 노선은 정반대다. 캐롤(맷 데이먼)의 근처엔 여성의 그림자도 없으며, 켄(크리스천 베일)은 아내와 아들에게 충실한 남자다. 레이서의 실존과 얽힌 내레이션은 옛 영화에서 그대로 가져왔는데, 그걸 읊는 건 켄이 아닌 캐롤이다. 은퇴한 레이서로서 레이싱팀을 맡은 그는 차 바깥에서 안을 보는 입장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언어는 죽음의 향을 발산하지 않는다. 켄은 평상시에 ‘H.A.P.P.Y’를 노래처럼 부르는 인물이다. 안타까운 엔딩이 기다리고 있으나 죽음은 기록된 사실이지 그의 남성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장치가 아니다. 공식에서 탈피해 역으로 장르의 풍성함을 개척한 맨골드가 하려는 말은 무엇일까.

레이싱 장르에서 주인공의 역할은 딱 하나, 경주에 참여해 달리는 일이다. 캐롤과 켄도 경주에 참여하기는 한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레이싱카를 만드는 데 더 큰 비중을 둔다. 둘은 잘 알고 사랑하는 대상을 일로 삼은 노동자들이다. 켄이 레이싱카 개발에 참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생계이며, 일상에서 그는 나무를 댄 구식 자동차를 몬다. 노동자인 그들과 긴장을 빚는 인물은 회사의 대표와 그의 측근이다. 그들은 레이싱카 개발에 자금을 지원함과 동시에 갈등의 원인을 낳는다. 포드의 대표인 헨리 포드 2세는, <그랑프리>에서 일본산 레이싱카의 대표로 나오는 야무라와 비교된다. 레이서 출신인 야무라는 경기와 차의 본질에 대해 탁월한 시각을 보유한 자다. 현장에서 스톱워치를 든 채 경기에 개입하는 그는, 경기 도중 헬기를 타고 트랙을 떠났다 마칠 때쯤 돌아오는 포드 2세와 다르다. 포드 2세는 경기에 별다른 애정이 없거니와 기본적인 지식도 부족한 인물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캐롤은 그를 레이싱카에 태우고 트랙을 돈다. 혼비백산한 포드 2세는 오줌을 지린 표정으로 앉아 차에서 내리지도 못한다. 클라이맥스에서 포드 2세는 우승자 곁으로 갈 뿐 진짜 공헌을 한 캐롤과 켄을 향해 눈길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켄에게 진정한 경배를 표하는 인물은 경쟁사인 페라리의 대표다.

저열한 경영자와 훌륭한 창작자, 그 사이의 관객에게

맨골드는 흥미진진한 포드 이야기에서 어떤 본질을 보기 원한다. <포드 v 페라리>는 유럽과 미국의 자동차 회사를 빌려 영화산업을 은유한 작품이다. 타비아니 형제의 <굿모닝 바빌론>(1987)에는 대대로 돌을 만져온 이탈리아의 장인 가족이 나온다. 굶주림에 지쳐 미국으로 떠난 그들은 D. W.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1916)의 현장에서 작업을 맡는다. 타비아니는 화려한 바빌론 세트가 이탈리아 장인의 손에서 탄생했다고 상상한 것이다. 거칠게 말해, <인톨러런스>의 거대한 실패는 훗날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유럽식 예술영화가 아닌 미국적 장르로 길을 트는 계기로 읽힌다. 실수는 반복된다. 마틴 스코시즈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유작 <순수한 사람들>(1976)을 경배한 나머지 <순수의 시대>(1993)를 만들었다. 진짜 귀족이 만든 귀족의 영화와 미국 부르주아가 귀족의 흉내를 내는 영화는 격이 달랐고, 스코시즈는 자기 영역으로 돌아온 끝에 <아이리시맨>(2019)에 이른다. 그게 장르의 역사다. 유럽 예술영화가 정점에 이른 1960년대 전후에 주춤했던 할리우드는 다시 그들에게 어울리는 소재와 주제를 개발해 세계 영화시장을 지배했다.

독립영화 <헤비>(1995)로 데뷔한 맨골드는 <캅랜드>(1997) 이후 줄곧 메이저 영화사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을 제작·배급해온 이십세기폭스가 <포드 v 페라리>도 제작했다. 얼마 전, 월트 디즈니사가 폭스를 인수함으로써 <포드 v 페라리>는 집을 잃은 작품 신세가 되었다. 폭스가 전통적인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를 대표하는 이름이라면,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할리우드 장르의 형성 및 발전과 별로 상관이 없는 곳이다. <포드 v 페라리> 도입부에서 켄의 정비소를 찾은 건방진 고객은 “이 나라에선 소비자가 언제나 옳아”라고 외친다. “허튼소리”라고 응수하는 켄의 대답이 곧 맨골드의 생각이다. 2019년 미국 박스오피스는, 창작자의 몫이 사라진 곳에서 거대 영화사와 관객이 합작한 결과가 어떤 건지 잘 보여준다. 흥행 10위 내의 영화 가운데 시리즈와 리메이크가 아닌 작품은 한편도 없다. <아바타>가 흥행 수위에 오른 다음해부터 10년째 진행 중인 코미디의 주역이 바로 디즈니다. 할리우드영화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비창조적인 시대를 이끄는 회사에 자기 창작물을 넘겨야 했던 맨골드의 생각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열한 경영자가 훌륭한 창작자를 바라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관객은 진짜 영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을 알아보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포드 v 페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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