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한국영화 비평 연속 기획의 두 번째 주제는 한국 독립영화의 변화다. 자기복제와 하향평준화로 실망감을 안긴 상업영화와 달리 2019년 독립영화는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 한국 독립영화 시장은 한동안 침체를 거듭한 끝에 황폐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황야에 새로운 싹이 하나둘 피어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호에선 김소희 평론가가 여성의 약진으로 기억될 독립영화의 변모와 지속가능성에 대해 진단했다. 1239호에는 변모하는 시네마의 풍경에 대한 김병규 평론가의 글이 이어질 예정이다.
올해 여성영화의 약진은 굳이 독립영화로 한정 짓지 않아도 납득 가능한 성취다. 국제영화제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며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은 데 이어 14만 관객을 동원하며 유의미한 스코어를 기록한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한국 독립영화가 갈 수 있는 가능성의 걸음을 넓힌 상징적인 사건이다. <벌새>와 함께 <메기> <아워 바디> <밤의 문이 열린다> <우리집> 등 여성감독이 만든 여성 서사 영화들이 비슷한 시기에 소개되면서 하나의 흐름으로까지 인식되었다. 이들의 영화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기 힘든 차이와 개성을 지닌다는 것도 중요하게 언급되었다.
신진 여성감독들의 대두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빅뱅이 아니라 시대적인 요구를 반영하는 하나의 파편이다. 여기서는 2016년 문화예술 전 분야와 연계된 ‘영화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2018년 재점화된 미투 운동과 관련된 현상임에 특별히 주목하고 싶다.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영화를 만든다는 대의를 위해 희생되었던 것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중요한 성격 중 하나는 개별 사건은 단순히 당사자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제삼자라고 인식되는 이들의 태도와 결부된 문제라는 인식의 변화다. 제삼자에 의한 2차 가해문제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논의되었고, 묵인과 무지에 대한 반성도 요구되었다. 이를 확장하면 사건을 대하거나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인식 변화가 더 중요하게 요구되는 시대로 전환되었다는 말도 된다. 미투 이후의 관객은 영화 안에서만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 어떤 관객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도록 요구됐다.
여성 서사를 부인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오해되어왔으나 영화계 내 성폭력 운동과 미투 운동은 누군가를 끌어내리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그 자리에 무엇이 있어야 했나 혹은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운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쏟아진 여성감독의 대두는 그 자리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한 다채로운 답을 꺼내어보는 작업의 일환으로 보인다. 여성감독을 특정하는 데에는 어떤 전제가 붙는다. 영화판이 상대적으로 남성화되었고, 여성 영화인들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현저히 적었다는 사실이다. 여성감독의 영화들이 주로 사적인 소재에 천착한다고 분석되는 동시에 이것이 은밀한 폄훼의 근거가 되어온 것도 호명의 이유다.
올해 여성 서사 영화들은 그 내용이나 형식의 변화보다는 여성 서사라는 카테고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의 변화가 주요하게 감지된다. 여성감독들은 서사에서 여성성을 언급하는 것을 하나의 편견 혹은 한계로 생각하거나 여성감독이라는 틀에 저항하던 것에서 벗어나, 여성의 이야기임을 드러내는 편을 택했다. 여성감독이라는 호칭 역시 차별적 구분이 아닌 연대와 환영의 호명으로 받아들이고 쓰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여성 영화인들이 많아지면 더는 여성을 카테고리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일견 당연하고 긍정적인 현상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남성 영화인만큼 여성 영화인이 많아지면 그것으로 영화계가 균형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일까. 여성 범주에 관한 한정적 수용은 표면적인 성별 균형만큼이나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상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고민해야 함을 일깨운다. 이 글은 어렴풋하게나마 그 상을 가늠해보기 위해 쓰인 것이다.
김보라 감독은 <벌새>가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임을 여러 자리에서 밝혀왔다. 이제 누구도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폄훼의 근거로 삼지 않았다. 대신 사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보편의 이야기가 되는지의 과정에 주목했다. 사적 서사의 가치가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는 영화가 성수대교 붕괴와 김일성의 죽음이 교차하는 1994년이라는 시간을 뾰족하게 향해갔기 때문이다. 영화는 국가적 재난을 은희(박지후)의 1인칭 시점의 이야기 속에 포함하면서 시대와 개인이 서로를 상징하듯 비추게 했다. 이를 두고 결국 국가적 재난을 말하기 위해 개인의 서사를 착취했다거나, 역으로 사적 서사의 가능성을 증명하기위해 재난을 이용했다는 것 모두 어느 정도는 무리한 주장이 된다. <벌새>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구분을 깨뜨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러한 구분을 혼동시키는 방식으로 구분 불가능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혼동이 사적인 것을 바라보는 기존 시각을 흔들 가능성을 지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벌새>는 두리번거리는 중학생 은희의 모호한 얼굴로 끝나는 영화라 할 수 있는데, <우리집>은 소녀 하나(김나연)의 난감한 얼굴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독립영화가 소녀의 시선에서 새로움을, 소녀의 얼굴에서 사적인 것의 가능성을 포착하고 있음을 예감케 한다. 윤가은 감독은 부모의 갈등을 마주한 하나의 난감한 표정을 집요한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견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괴로움을 준다. 이때 화면을 가득 메운 얼굴은 ‘사적이다’라고 말해지는 것이 얼마나 큰 충격과 고뇌를 포괄하는 일인지를 가늠하는 표면으로 작동한다. 소녀들의 성장과 모험담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집>은 그동안 소년의 성장물에서 보여준 모험담에 대한 비판적 전환을 시도한다. 길 위에 선 소년들이 집에서 멀어져야만 어른이 되었다면, 소녀들은 집과 분리되지 않고도 어른이 된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 가치판단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어느 한쪽의 세상과 그 가능성에 무지했다. 안주영 감독의 <보희와 녹양>은 희귀한 조합에 가까운, 청소년기 이성 단짝 친구의 모험담을 그린다. 모험을 추동하는 표면적 이유는 소년의 아버지 찾기인데, 실상은 부성에 관한 분열적 발견, 어머니에 대한 이해, 소년 자신을 마주하는 여정 등에 중심이 고루 분배되어 있다. 소년 서사와는 다른, 소녀 서사를 세우는 것이 페미니즘의 요구에 부합한다고 인식되는 속에서 <보희와 녹양>은 그동안 소년성과 부성이 재현된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다시 쓰는 길로 나아간다. 이 여정은 새로운 남성성을 재현하는 일이 여성성을 재현하는 것만큼 중요함을 일깨운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
이옥섭 감독의 <메기>는 영화를 둘러싼 폭력 문제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한 사례다. <메기>는 폭력 사건에서 시작해 폭력 사건으로 문을 닫는데, 전자는 불법 촬영 범죄고 후자는 데이트 폭력이다. 두 범죄 모두 여성 피해자의 비율이 훨씬 높은 젠더 기반 폭력이다. 이제껏 영화가 젠더 기반 폭력 문제를 어떻게 풀어냈는지를 돌이켜보면 <메기>의 참신함이 명료해진다. 영화는 몰카 이미지를 엑스레이 이미지로 전환해 보여준다. 엑스레이가 반전시킨 것은 단지 몰카이미지의 표면만이 아니다. 엑스레이 이미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여성의 신체 이미지가 아닌 남성 성기의 실루엣이다. 이는 피해 이미지의 확대재생산을 중단하려는 선택인 동시에, 그 이미지의 추상성으로 인해 이성애적 섹스의 틀에서도 벗어난다. <메기>에서 데이트 폭력은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데이트 폭력에 관해 이야기하는 상황’만이 재현된다. 독립영화에서 재현 대신 대화나 이야기에 기대는 것은 예산 부족으로 인한 한계가 아니라 독립영화가 시도해온 영화적 표현법의 일환이다. 몇몇 영화들은 대화나 독백의 영화적 가능성을 실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2018년 개봉한 <밤치기>의 정가영 감독은 욕망의 시각적 재현보다 욕망에 관해 말하기에 중점을 둔 작품을 제작해왔다. 욕망을 반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노골화하는 방편이라는 것이 독특하다. 임정환 감독은 <국경의 왕>에서 이국의 장소라는 세팅 위에 뉘앙스, 단어와 단어 사이의 미끄러짐 등 대화와 언어의 실험을 통해 독립적인 방식으로 블록버스터 서사를 품어보는 시도를 했다. 논의의 폭을 넓히면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에서 결혼 생활을 플래시백으로 재현하는 대신, 니콜(스칼렛 요한슨)의 기나긴 독백 시퀀스로 서술하는 방식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자유자재로 시간을 오려 붙이는 가운데 영화적인 것을 인식해온 대중영화의 방식 옆에서, 독립영화는 실시간에 가까운 지속 혹은 재현 불가능함에서 영화적인 것을 고민해왔음을 다시 인식하게 한다.
<메기>에서 데이트 폭력은 피해자 지연(이주영)이 가해자의 여자친구 윤영(이주영)을 찾아가 털어놓는 이야기로 표현된다. 이때 지연은 단순히 데이트 폭력 피해를 서술하는 자로 소비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연과 윤영을 연기한 두 배우의 실명이 같다는 사실에서 아이러니한 의미를 생성하는 한편 비둘기와 소통하는 지연의 독특한 개성,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이는 대화, 대화 사이의 공백 등을 생략하지 않으면서 짧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새긴다. 지연과 만난 후로 오랜 의심과 번민의 시간을 거친 윤영은 이제는 전 남자친구가 된 성원(구교환)을 찾아가 “여자 때린 적 있어?”라고 묻는다. 성원이 “응, 전 여친 때렸어”라고 인정하는 즉시, 영화는 성원을 거대한 싱크홀 속에 빠뜨리며 성원의 지연에 대한 2차 가해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한다. 판타지적 단호함은 현실적 요구에 대한 반영의 성격을 지닌다.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가 범죄사건을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대신, 한 여성의 시선을 경유하도록 유도하는 방식 역시 주목된다. 왜 피해를 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몸을 빠져나온 혜정(한해인)의 유령은 피해자인 동시에 자기 죽음의 목격자다. 범죄의 끔찍함을 재현하는 대신,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나에게로 왔는가를 바라보는 영화는 결국 나의 죽음이 다른 피해에 대한 외면 혹은 다른 사람의 죽음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사건에서 분리되거나 사건을 착취하지 않으면서도, 사건을 온전히 품어내는 방식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욕망을 논하는 욕망
여성감독의 활약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야기되면서 여성이라는 구분에 대한 반발이나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덜한 가운데, <아워 바디>만큼은 이례적으로 ‘여성영화’라는 분류에 반기를 들었다. 최희서 배우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여성영화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가 관객으로부터 싸늘한 반응을 얻었다”고 털어놨다( <씨네21> 1225호, ‘<아워 바디>의 최희서-나를 찾아줘’). 최희서 배우는 변화하는 몸이라는 소재가 남성들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것이고, ‘여성영화’가 하나의 해석 틀이 될 것을 우려했음을 발언의 이유로 들었다. 이날 인터뷰를 진행한 김혜리 기자는 인터뷰 글 중간에 이례적으로 주석을 삽입해 “(<아워 바디>가) 이슈를 분명히 드러내는 페미니즘영화는 아닐 수 있으나 남성중심적 영화계의 상황에서 여성임을 호명하는 일은 아직은 필요한 것 같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덧붙였다. 남는 의문은 왜 페미니즘영화가 누군가에게는 피하고 싶은 한정적 해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나서서 선언해주길 바라는 억압된 것으로 인식될까, 하는 거다. ‘여성’에 대한 환영 뒤 그에 대한 혐오가 심리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잠시 페미니즘영화의 정의로 돌아가보자. 페미니즘영화에 대한 정의는 각자 다르겠지만, 샹탈 애커만이 <잔느 딜망>(1975)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보다 여성영화를 더 잘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샹탈 애커만은 자신의 영화를 페미니즘영화라고 정의하면서 여성 관객에게 특별히 소구하는 순간을 가졌으며, 그동안 주류 언론에서 소홀히 했던 여성의 일상적인 표현들이 잠재한 작품이라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페미니즘 혹은 여성영화라는 분류가 차별적 카테고리가 아니라 가치 있는 이름임을 여전히 강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애석하게 만드는 통찰이다. <아워 바디>가 여성영화일 수 있다면 그것은 여성이 홀로 집에 있을 때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보는 숏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때 자영(최희서)의 몸이 완전히 일상적인 방식으로 찍힌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성의 몸을 성적인 방식으로 착취한 것은 더욱 아니다. 일상적인 모습조차 누군가의 관음증적 욕망을 자극하는 현실 속에서 <아워 바디>는 실험영화처럼 보일 정도로 정돈된 연기와 극적 상황 묘사를 선택한다. 노출은 최소화하되 몸을 탐닉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고수하면서 의도적인 혼란을 초래한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워 바디>가 가진 퀴어성이다. 재현된 것은 이성애 섹스지만 이성애를 파괴하기 위한 섹스처럼 보일 정도로 이들 섹스 신은 레즈비언적 욕망에 가닿는다. 정치적 올바름의 차원에서 퀴어를 기입할 뿐 욕망과 그 가능성에 관해서는 눈감는 경향에서 벗어난 <아워 바디>는 욕망의 설익은 재현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욕망을 감지하게 한다. 그 욕망은 관객을 욕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지향해야 할 영화적 욕망이란 욕망에 빠지기도 전에 그에 관한 질문이 먼저 도드라지는 구성된 욕망이 아니라 그 속으로 미끄러져서 구르다가 문득 깨닫게 되는 욕망은 아닐까. 어떻게 하면 동사로서의 욕망을 소거하지 않고도 즐겁게 욕망할 수 있을까. 배우가 자신의 몸을 소유하고, 카메라가 관객의 시선을 통제한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를 담은 <아워 바디>가 남긴 값진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