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앤드루 스탠턴 / 목소리 출연 벤 버트, 엘리사 나이트, 제프 갈린, 프레드 윌러드, 존 라첸버거, 시고니 위버 / 제작연도 2008년
보스턴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였다. 성공적인 유학생이 되겠다는 일념하에 유학길에 올랐지만 생각보다 높은 영어 장벽에 심신이 지쳐 있었고, 그것을 풀기에 영화처럼 좋은 것이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보기에 애니메이션만큼 좋은 것은 없었고, 애니메이터를 꿈꾸던 나로선 당시 상영 중이던 픽사의 <월·Ⓔ>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픽사에 별 감정이 없던 나는 그때부터 완전히 팬이 되고 말았다.
영화는 시종일관 대사 없이 진행된다. 지구에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홀로 남아 있는 월·Ⓔ는 ‘삐삐’ 소리만 낼 뿐, 관객이 판단할 수 있는 월·Ⓔ의 감정이라고는 눈꼬리가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정도일 것이다. 애니메이터로서 만약 그런 로봇을 애니메이팅한다면, 감정표현이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로봇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고, 대사가 없는데도 몰입감은 상당했다. 얼굴에 눈밖에 없는 말 못하는 로봇을 가지고 100분이라는 긴 시간을 어쩌면 이렇게 효과적으로 이끌어가는지. 나에겐 놀라움 그 자체였다. 특히 첫 시퀀스에서 외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그네를 흔드는 월·Ⓔ의 연기력을 보고 탄성이 흘러나왔다. 당시 난 6분짜리 단편애니메이션을 제작한 후였다. <개조심>이라는 단편인데, 집을 지키는 개가 신문배달원을 막아야 하는 에피소드식 애니메이션이었다. 1년을 꼬박 거의 하루도 안 쉬고 만들어야 했던 작품인데, 만들면서 스토리 전개로나 감정선으로나 어려움이 많았다. 이야기의 흐름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하기도, 그리고 대사 없이 내가 생각하는 감정을 관객과 일치시키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특히 내가 생각하는 타이밍에 관객을 웃게 만들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물며 울게 만든다는 것은 나로선 내공이 너무 부족한 일이었다. 고작 6분짜리를 만드는 데 그렇게 힘들었는데, 100분짜리 <월·Ⓔ>는 그것을 완벽하게 해결하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만들면 돼’라고 하는 것처럼. <월·Ⓔ>는 어떻게 보면 매우 단순한 사랑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다 느낄 수 있었고, 환경오염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미래상에 대한 메시지를 줄거리 주변에 담백하고 쿨하게 녹여놓았다. 그때 당시의 나에게는 한마디로 완벽한 애니메이션이었다.
스토리에 대한 중요성, 비록 지금은 예전의 영광을 완전히 이어받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것은 픽사에 대한 관객의 기대감을 주는 요인이었다. 스토리는 픽사의 힘이고 권력이 되었다.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다보면 연기력을 포함한 애니메이션의 기술적인 면에 더 집중하고 싶어진다. 애니메이터로서 당연히 그래야 마땅하지만 생각해보면 나의 꿈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나의 꿈은 애니메이션 제작자였다. 이 글을 쓰면서 잊고 있던 초심을 조심스럽게 꺼내보게 됐다. 천천히 그리고 우직하게 제작자로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싶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한국 애니메이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여러 아티스트들 가운데, 한국 콘텐츠 중 유일하게 황무지로 남아 있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봉준호 감독 같은 인물이 언젠가는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김규현 애니메이터. 홍익대학교 게임디자인학과 교수. <빅풋 주니어>(2007),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 <아담스 패밀리>(2019) 등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