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미국 아카데미 회원으로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 투표 참여한 정정훈 촬영감독, "<기생충>팀 만나 부럽고 자랑스럽다고 얘기해주었다"
2020-03-12
글 : 김성훈

‘호빵맨’ 같은 통통한 양볼이 쏙 들어갔다. 체중이 무려 8kg이나 빠진 덕분이다. 지난해 정정훈 촬영감독은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루빈 플라이셔 감독의 영화 <좀비랜드: 더블탭>(2019)을 찍자마자, 다음날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신작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올해 개봉예정이다.-편집자)를 연달아 작업했다. 또 알폰소 고메즈 레존 감독과 <커런트 워>(2018)의 보충촬영과 색보정 작업을 마무리해 영화를 개봉시켰다. 지난 1년 내내 앞만 보고 달려온 그와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하며 그간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미국 현지시각으로 2월 9일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2주 앞둔 까닭에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한 그로부터 <기생충>의 LA 현지 분위기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지난해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 촬영이 끝난 뒤 어떻게 지냈나.

=오랜만에 이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좀비랜드: 더블탭>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 등 전작을 연달아 찍으면서 아내와 오래 떨어져 지낸 까닭에 이를 만회하기 위해 가정에 충실했다.

-최근 광고를 찍었다고.

=영화를 찍지 않을 때 광고 작업을 종종 한다.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의 후반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1차 편집은 마무리됐다. 스탭들끼리 모여 간단한 내부 시사를 마친 뒤 현재 2차 편집이 진행되고 있다.

-결과는 어떤가.

=괜찮았다. 에드거 라이트 감독 집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보았는데 음악도 믹싱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버전이라 거친 편인데도 꼼꼼하게 신경 쓴흔적이 역력했다. 에드거 라이트가 어떤지 물었을 때 “마지막 작품은 안될 것 같다. (웃음)”라고 대답했다. 내가 매 작품을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며 작업한다는 사실을 에드거 라이트 감독 역시 잘 안다.

-그와의 작업은 처음이지 않나.

=그는 그동안 호흡을 맞춘 감독들보다 훨씬 꼼꼼하고 계획을 짜는 걸 즐긴다. 그의 철두철미한 성격은 박찬욱 감독이 콘티를 철저하게 짜는 것과는 약간 다른 개념이다. 에드거 라이트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계산하고 연습하는 작업 방식으로 유명하다. 그런 스타일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함께하기로 해서 크게 놀라진 않았는데, 촬영이 끝난 뒤 체중이 무려 8kg이나 빠졌다. 현장에서 많이 챙겨먹었는데도 살이 그렇게 빠졌다.

-현장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나보다.

=그의 촬영 현장에는 의자가 없다. 보통 한국영화는 촬영감독 의자까지 만들어주진 않지만, 할리우드에선 영화 로고와 이름이 박힌 의자가 제공된다. 촬영이 끝날 때까지 의자를 모으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에드거 라이트의 촬영 현장은 오랫동안 함께해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의자를 아예 만들지 않는다더라. 오랜만에 아주 열성적인 감독과 작업해 살이 많이 빠진 덕분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젊어졌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동안 열심히 움직이지 않았던 건가 싶어 많이 반성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오랜만의 필름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 않나(<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는 필름 70%, 디지털 30% 정도 섞어 촬영됐다.-편집자).

=그래서 더욱 긴장됐다. 필름 작업을 안 한 지 오래돼 까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하니 금방 적응됐다. 오히려 디지털보다 훨씬 더 편했다. 또 영국의 촬영 시스템이 할리우드의 그것과 다르기도 했고.

-어떻게 달랐나.

=일의 경계가 조금씩 다르다. 촬영팀의 경우, 키그립과 개퍼의 역할이 할리우드와 차이가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키그립이 블루매트를 세팅하고, 조명팀이 조명을 설치한 뒤 그립팀이 빛을 세세하게 끊는 식으로 일을 진행한다. 하지만 영국을 포함한 유럽 시스템에선 조명팀이 조명과 관련된 모든 역할을 도맡는다. 영국은 충무로와 시스템이 비슷해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영국 촬영 스탭들과 호흡을 맞춘 건 이번이 처음이다. <캣츠>(2019)와 <예스터데이>(2019) 등에 참여한 마크 클레이턴이 개퍼를 맡았다.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키그립이던 짐 필폿이 키그립으로 합류했다. 짐 필폿은 박찬욱 감독님이 강력하게 추천했다. 다행히 전작 <커런트 워>에서 호흡을 맞춘 촬영팀과 함께할 수 있었다. 에드거 라이트의 전작을 함께해온 스탭 속에 나를 포함한 촬영팀이 새로 합류하는 모양새라 처음에는 긴장이 많이 됐다.

-루빈 플라이셔 감독과 작업한 <좀비랜드: 더블탭> 얘기도 해보자면, 루빈 플라이셔와의 인연은 그의 전작인 <베놈>(2018)에서 이미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지만 원래 <베놈>의 촬영감독 최종 후보 두명 중 하나였다. 하지만 강력한 경쟁자였던 매튜 리바티크 촬영감독이 <베놈>을 찍겠다고 결정하는 바람에 기회를 잃었다. <베놈>이 끝난 뒤 루빈 플라이셔로부터 “<좀비랜드: 더블탭>이 들어가는데 촬영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제안을 받았다. 나 또한 전작의 팬이었고, 우디 해럴슨, 제시 아이젠버그, 에마 스톤 등 좋아하는 배우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기회라 선뜻 수락했다. 무엇보다 <좀비랜드> 시리즈는 단순한 좀비영화가 아니라 가족 이야기라 그게 마음에 들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땠나.

=주인공 리틀록(애비게일 브레슬린)은 어떻게 자랐을까. 10년이 지난 ‘좀비랜드’는 어떤 모습일까. 시나리오를 읽기 전부터 많은 것들이 궁금했는데 이번 영화 또한 가족 이야기이자 성장담이었고, 덕분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는 아버지(우디 해럴슨이 연기한 탤러해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너무 좋았다.

-루빈 플라이셔가 촬영 전 특별히 주문한 건 뭔가.

=이 영화는 코미디 장르니 배우들의 생생하고 즉흥적인 리액션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찍을 때 카메라 세대를 동원해 인물의 정면숏, 어깨너머 숏, 측면숏 등 세 방향으로 담아낸 것도 그래서다. 생생한 연기를 재현하기 어려우니 화려한 조명을 포기하는 대신 배우들의 리액션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한다는 감독의 주문에 공감했다.

-매 테이크 우디 해럴슨, 제시 아이젠버그, 애비게일 브레슬린, 에마 스톤 등 배우들이 주고받는 대사와 행동을 예측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영화는 같은 대사라도 어떤 배우가 구사하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많이 달라지는 이야기다. 배우들이 서로 친하고 경험이 많아 대사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호흡이 잘 맞았다. 그들의 연기에 따라 카메라의 움직임이 바뀌어야 해서 감독의 권유로 배우들의 연습 과정에 참여해 유심히 지켜보았다.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 또한 그런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들의 연습을 지켜보면 슛 들어갈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장난도 많이 치고.

-촬영하기 전에 정한 또 다른 촬영 원칙이 있었나.

=앞에서 강조했듯이 배우들이 자유롭게 움직여야했고, 43회차라는 빡빡한 촬영 일정 탓에 하루에 찍어야 할 분량이 많았다. 촬영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웬만해선 조명을 수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세팅했다.

-43회차 만에 찍은 영화라고.

=제작진이 처음에는 스튜디오에 55회차 촬영을 요구했지만 예산 문제, 배우 일정 때문에 회차가 많이 줄었다. 43회차 안에 촬영을 무사히 마치는 게 도전이었다(참고로 정정훈 촬영감독은 2014년작인 <블러바드>에서 19회차 만에 촬영을 마친 적 있다.-편집자). 테스트 촬영할 때 한컷이라도 더 찍기 위해 애썼던 것도 그래서다.

-애틀랜타에서 촬영을 진행했는데.

=애틀랜타에 마블 영화를 찍는 거대 스튜디오가 있는데 그곳에서 거의 다 진행했다. 백악관 시퀀스도 스튜디오 안에 마련된 세트장에서 찍었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바빌론 시퀀스의 옥상 장면도 스튜디오 주차장에 세트장을 지어서 촬영을 진행했다. 바빌론 바깥은 애틀랜타 시내에 있는 폐건물을 미술 작업해 찍었고.

-특히 바빌론 시퀀스는 여러모로 촬영이 중요한 장면이었다. 많은 인물과 좀비가 등장하는, 규모가 큰 장면인 동시에 인물들이 가족으로 유대감을 주고받는 감정 신인데.

=핏줄로 맺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탤러해시와 리틀록의 관계를 통해 아버지와 딸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게 중요했다. 아버지로서 소외됐다가 결국 가족을 지키는 건 탤러해시의 몫이었다. 그러면서 옛 식구들과 새로운 식구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감정을 만들어야 했다. 촬영감독으로서 촬영 규모보다는 가족,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과 화합 등 다양한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게 중요했다.

-루빈 플라이셔 감독과의 호흡은 어땠나.

=그는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이다. 이제는 웃음기 하나 없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됐다. 현장에서 배우들이 우리가 농담을 주고받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할 수 있냐”라고 걱정했지만, 우리는 “농담일 뿐이다. 절대 상처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웃음)

-루빈 플라이셔는 에드거 라이트와 작업 스타일이 다른가.

=둘은 할리우드와 영국 영화의 차이를 보는 것 같다. 루빈 플라이셔는 작업 방식이 할리우드 스타일이지만 소박한 반면, 에드거 라이트는 굉장히 꼼꼼하고 치밀하면서도 항상 특별한 것을 원하는 성격이다. 어쨌거나 <좀비랜드: 더블탭>을 찍자마자 LA로 돌아온 뒤 곧바로 런던으로 날아가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를 찍었다. 두편의 스타일이 극과 극이었던 탓에 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 회원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약 2주 앞둔 미국 LA 현지 분위기는 어떤가.

=미국 일반 관객 사이에서 화제가 될 만큼 <기생충>은 돌풍이다. 현지 분위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한국 언론이 보도하는 내용만 보고 ‘국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기생충>에 대한 이곳의 관심은 한국 언론이 보도하는 것 이상이다.

-영화는 어떻게 봤나.

=북미 개봉했을 때 챙겨보았는데,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봉준호 감독, 배우 송강호와 잘 아는 사이라고 자랑할 만큼 영화가 좋았다. (웃음)

-홍경표 촬영감독의 촬영은 어땠나.

=(홍)경표 형의 촬영은 항상 좋다. 아카데미 촬영상 후보에 오를 거라고 예상했는데 오르지 못해 무척 아쉽다. <기생충>의 서사와 메시지가 전세계 관객에게 잘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촬영 덕분이다. 그의 촬영은 늘 기본에 충실하다. 내가 찍었으면 아카데미까지 가지 못했을 거다. (웃음)

-LA에서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배우를 만났나.

=만났다. 부럽고, 자랑스럽다고 얘기해주었다. 이번 노미네이트는 <기생충>이라는 영화뿐만 아니라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가 개인으로서 평가받는 자리이기도 하지 않나. 2001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와호장룡>은 리안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찍은 영화라 한국에서 온전히 제작된 <기생충>과 전혀 다른 사례다.

-그래서 표는 누구에게 던질 건가. (웃음)

=<기생충>을 포함해 후보에 오른 모든 영화가 저마다 장점과 매력들을 갖추고 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할 생각이다.

-투표는 했나.

=아직.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공정하게 투표할 생각이다. 수상 결과를 떠나서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건, 그간 아카데미 시상식이 영어권 영화의 잔치였는데 <기생충>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작품상, 감독상 등 여러 후보에 오른 건 대단한 일이다. <기생충>을 계기로 한국인들이 문화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점에서 기분이 좋다.

-다음 작품은 뭔가.

=루빈 플라이셔 감독의 신작 <언차티드>(출연 마크 월버그, 톰 홀랜드)에 합류했다. 잘 알다시피 동명의 인기 게임을 원작으로 한 작품인데, 아직은 자세한 얘기를 꺼낼 수 없다.

사진 김유키에. 알폰소 고메즈 레존, 에드거 라이트, 정정훈(왼쪽부터).
사진 머레이 클로스 스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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